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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국은 망했고, 뮤텐도 망했다. 모랄쉰은 안전하다. 그러므로, 내가 할 일도 없다. 없었다.
내 좆집들과 뒹굴거나, 고어한 장면에 내성이 없는 피오라를 데리고 중국 투어를 다니거나 했다.
유상민, 미친놈이 일거리를 들고 오기 전까지.
“이 책의 과거를 좀 봐 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유상민은 내민 것은, 거대한 책이었다. 독특한 문자에 쇠사슬이 감겨 있고, 중앙에는 자물쇠까지 감아 봉인해둔 책이다. 금지된 마도서를 생각나게 한다.
“그 전에, 나한테 할 말 없어?”
“제발 자료 좀 그만 보충해요.”
그렇게 말하는 유상민은 눈이 퀭했다. 골방 마법사들의 눈이 저랬다. 모랄쉰의 자료와 뮤텐의 자료, 거기에 지금도 중국에서 살아남은 첩보팀이 성서와 신화를 모아오고 있다.
중국에 볼일이 끝났으니 첩보팀장도 처분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좀 더 두고 봐야 하게 생겼다.
모인 자료의 양은 서가 3개를 넘어가고 있다. 신이 없는 지구에도 그렇게 많은 신화와 신이 존재했다. 신이 실존하는 세계이니. 성서나 신화가 많은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싫어.”
고생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그러니까 나는 착실하게, 아주 열심히 일해서 자료를 모을 거다. 뭐, 모으는 건 내가 아니라 내 명령을 받은 놈들이니까 더 열심히 모을 거다.
부하가 있다는 게 이렇게 좋다.
“그러면 빨리 그거나 봐줘요. 뭔가 중요한 자료 같아 보이는데, 열쇠도 안 보이고 풀리지도 않아요.”
“마력 봉인인가. 쉬운 형식은 아니네.”
푸는 게 문제가 아니라, 푼 이후가 문제인 형식이다. 정해진 방법 외의 방법으로 해체하면, 책이 그대로 불타 사라진다. 아주 노골적으로, 정식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내용물을 보지 못할 거라고 마법의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건 나도 방법이 없다. 유괴범이 인질을 잡고 있는데, 유괴범을 해치우면 인질이 자살하겠다고 주장하는 꼴이다. 구해주기 싫어지는 인질이다.
평소라면 무시했겠지만, 이건 그럴 수도 없어서 문제다.
저놈이 들고 왔다는 것도 그렇고 엄중한 잠금을 봐도 그렇다. 무언가 있다는 느낌이 팍팍 나는 물건을 보고 넘어갈 수도 없다.
“비켜봐.”
낡은 책상에 가득한 낡은 책들을 밀어내고, 쇠사슬 감긴 책을 중앙에 둔다. 아공간에서 황금 태엽을 꺼내, 책에 꽂는다.
시간을 감는 태엽은 일정 공간의 과거를 읽을 뿐만 아니라, 이런 물건의 과거도 읽을 수 있다. 성능만 보면 사이코메트리랑 크게 다르지 않다.
태엽을 감는다. 주변이 일그러지며 환영이 펼쳐진다. 낡은 서가가 보인다. 태엽을 더 감는다. 쭉쭉 감는다. 책의 시간이 뒤로 흘러간다.
이 낡은 서가를 나서 다른 호족의 책장으로, 가게 책방으로, 때론 종군하는 장군의 품에.
이 책의 역사가 보인다. 시간은 뒤로 흘러가다. 물결처럼 일정하게, 변함없이 책은 책으로서 그 자리에 있었다.
태엽으로 들어가는 마력이 많아진다. 벌써 수백 년을 넘어 천 년이 되어간다. 하나 안 것은 이 책의 내구도가 끝내준다는 사실.
먼지가 자욱하던 시절도 있고, 깔끔하게 잘 관리되던 때도 있다. 시간이 지나도 책은 낡지 않고 책을 감고 있는 사슬과 자물쇠는 녹슬지 않는다. 이 책만이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
심지어 불에 속에서도 멀쩡했다.
천 년을 넘은 시점부터 날짜 세기를 그만두었다. 태엽이 잡아먹는 마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100만 군대를 상대로도 이만큼 마력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갈 길은 멀다. 책의 근원은 보이지 않는다. 빌어먹을. 가볍게 시작한 일이 어쩌다 이래 됐데. 마력이 무한하다 해도, 마력을 쓸수록 내 정신력이 소모된다. 책의 역사가 빠르게 머리를 지나가니 머리에 흘러오는 기억도 많아진다.
완전 기억 능력이 독이 되고 있다. 쓰잘데기 없는 기억이 수천 년 분량이나 쌓이니 내 정신도 조금씩 삐걱댄다.
아, 짜증나.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찌른다. 알싸한 고통이 정신을 깨우고, 손끝에서 펼쳐진 마법이 기억을 지운다. 수천 년 분량의 기억, 그것도 찌꺼기 같은 기억이다. 그런 것까지 이 작은 뇌세포에 얹어놓고 살고 싶지는 않았다.
-히이익!
-와, 저래도 안 죽어요?
-으아아! 사람이 자살한다!
주변이 시끄럽지만, 무시. 나는 계속 과거로 파고든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종착점에 도달했다.
흑백의 세계 속에 나는 서 있다. 내 앞에는 수천 년 동안 똑같은 모습을 유지해온 책이, 책상에 고이 놓여 있다. 책상에는 한 노인이 앉아 있다.
-처음 뵙겠소.
대륙 공용어로 노인이 말한다. 그 시선은, 똑바로 날 보고 있다.
어째서? 우선 그런 생각이 든다. 사이코메트리는 과거를 보는 것이지 과거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저 노인은 명백히 나를 의식하고 있다.
-놀랄 것 없소. 이건 어디까지나 혼잣말. 그쪽에서 뭘 묻더라도 대답하는 것도 불가능하다오. 그대가 누군지 나는 모르오, 엘프일 수도, 드워프일 수도, 요정일 수도, 마족일 수도 있지.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같은 인간이었으면 좋겠소. 아마 그대가 인간이라면 몇 번째일지도 궁금하오. 우리 이후의 두 번째일까? 세 번째일까?
노인은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멋대로 늘어놓기 시작한다. 모르는 이야기는 들어서 모르니 모르는 이야기다. 잠자코 듣고 있자.
-이런, 말이 많아졌군. 그래도 이해해주시오. 벌써 십 년 가까이 누구와도 대화하지 못했단 말이오. 이런 식으로나마. 누군가와 연결될지도 모르는 대화를 하고 있으니 적잖이 기쁘다오.
십 년 가까이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그건 왜일까? 갇힌 장소에 있어서? 스스로를 가둬서? 아니면, 대화를 나눌 사람이 정말로 아무도 없어서? 마지막이라면 조금 끔찍하다. 당시에는 인류가 저 노인밖에 안 남았었다는 소리니까.
-내 진명은 미래시 계열이요. 쓸모가 거의 없지만, 아주 먼 미래를 볼 수 있지. 그래서 이렇게 혼잣말을 하는 거요. 누가 이 혼잣말을 들을지도 모르니까. 개인적으로는 들어줬으면 좋겠군. 그래야 이 책이 쓸모가 있어지니까.
노인이 책상 위의 책을 끌어당겨, 자물쇠가 달린 책을 쓰다듬는다. 정성스레, 애틋하게, 손이 책 표면을 만진다.
책을 책상 중앙에 되돌리고, 노인이 입을 연다.
-본론으로 들어가겠소.
그의 눈이 날 본다. 눈이 마주칠 리가 없는데도 눈이 마주친 것 같다. 그 눈은 나와 비슷하다. 광기. 미친 인간의 눈이다.
-그대가 인간을 알고 있다면 이렇게 말해야겠지. 지금 그 시간에 존재하는 인간들이 소환되기 전에도, 이 세계에 소환되었던 인간들이 있었소. 그대들이 처음이 아니오. 몇 번째인지도 모르오.
라팔과 전에 비슷한 대화를 나눴지. 던전과 그 안에서 발견되는 문명에 대해서. 노인은 그 멸망한 문명의 인간이다.
-그대가 인간을 모른다면 또 이렇게 말해야겠지. 옛날, 먼 옛날 인간이라는 종족이 있었소. 불합리하게 이 세계에 끌려와 억울하게 사라진 종족이 있었소.
억울하게 사라졌다. 나는 그 단어에 주목했다. 노인은 확정적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신이란 놈들은 중간계에 지성체를, 지성체를 포함한 그 행성을 소환한 후에 멸망시키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노인의 말이 그 가설에 힘을 보태준다.
-내가 바로 그 인간이라는 종족이오. 불합리한 세계에서 불합리하게 사라져야 했던 종족의 말예. 나는, 우리는. 왜 우리가 이렇게 불합리한 일을 당해야 했는지를 조사했고, 그 끝자락을 잡는 데 성공했소. 이 책에는 그 모든 내용이 담겨 있소.
-지식을 원하는 자. 진실을 원하는 자는 마도서의 인도에 따라 이곳에 오시오.
그것으로 끝이었다. 무언가 간섭이라도 한 것처럼, 사이코메트리가 끊기고 나는 강제로 현실로 되돌려진다.
책을 파고들 듯 꽂혀 있던 황금 태엽이 스르르 빠져나와 눕는다. 유상민이 질문한다.
“뭔가 봤어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책이, 마도서가 변화를 보인다. 책 표지에 서서히 문양이 떠오른다. 그렇게 완성된 문양은 화살표였다.
화살표가 한 방향을 가리킨다.
“이 화살표의 끝에 모든 대답이 있단다.”
과거에도 소환되었고, 또 멸종한 인류. 몇 번이나 반복되는 소환. 불합리한 소환과 그 끝에 있는 진실에 다가간 노인. 수상한 것투성이다.
불합리한 소환. 그 소환에는 신이 연관되어 있다. 노인이 알아낸 진실이란, 신과도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나는 이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해야 한다.
그 빌어먹을 놈들에 대해서 하나라도 더 알 수 있다면, 그러다 약점이라도 하나 잡을 수 있다면, 나는 천리 길도, 만리 길도 마다치 않을 것이다.
말 그대로 나는, 신을 죽이는 일에 인생을 걸고 있다. 여기엔 과장도 허언도 없다. 나에게 있어 그것만이 자명한 이치이다.
난 내 인생을 쓰레기통에 처박은 놈들을 지옥이란 똥통에 처박아 주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고.
단서가 있는데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전에 하나. 유상민에게 확인할 것이 있다.
“중간계에, 우리 이전에도 인간이 소환되었었다는 게 진짜야?”
다른 지성체가 소환되었다는 대화는 전에 라팔이랑 했었다. 그런데 그게 확정적으로 인간이라는 건 처음 알았다.
“사료로는 남아 있는데요. 신이란 놈 때문인지 몰라도, 여기 세계는 기술 발전이 없어요. 마치 중세처럼 수백, 수천 년 동안 과학, 기술, 문명 거의 모든 것들이 답보상태예요. 지구의 중세시대와 비슷해요. 신의 뜻이 너무나 확고하니. 그것에 위배되는 기술이 설 자리가 없죠.”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다. 나는 적당히 의자를 찾아 앉는다. 그리고 라팔이 내 무릎에 앉는다.
“중세도 나름 꾸준히 발전해왔다는 걸 생각하면, 여기가 더 악질이에요. 마법을 제외한 기술은 수천 년 동안 정말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어요. 신들이 그걸 막았죠.”
유상민은 구역질 난다는 얼굴이다. 흥미와 재미의 여부만으로 인생을 결정하는 놈이 그렇게 꺼려하는 일도 있나?
내가 묻는다.
“그게 그렇게 싫어할 일이냐?”
“성서와 신화를 조사하면서 나온 사실이에요. 컨베이어 벨트가 뭔지는 알아요?”
“그 정도야 알지.”
공장에서 돌아가는 그거잖아.
“컨베이어 벨트, 그것과 비슷한 자동 생산 장치. 상대성 이론에 필적하는 과학적 발견. 모두 있었어요. 과거에 모두 중간계에서 그것들과 비슷한 물건이 만들어진 적이 있어요. 그리고 모두 사장되었어요. 신의 뜻에 반하다는 이유로.”
신이 개입해 문명 발전을 억제한 흔적 있음이라. 흥미로운 사실이다.
“답보는 생산을 막고, 답보는 역사를 재미없게 만들어요. 조사관이 천직이라 그런 건 엄청 싫은데요. 반복되는 일상은 재미없잖아요.”
유상민이 질색한다는 얼굴로 말한다. 오늘 이놈은 유독 말이 많다. 자기 전문 분야가 나와서 그런가.
“유적과 유물을 만든 존재에 대해선 말이 많은데요. 대답만 먼저 하면, 지구인과 똑같은 특징을 가진 인류가 소환된 적은 분명 있어요. 그 책이 그거예요?”
“수천 년이나 전에 이 책을 만든 노인이 자길 인간이라고 말하더라.”
중간에 기억을 지워버린 바람에 얼마나 과거인지는 정확히 나도 모른다. 수천 년 전이라는 사실만을 알겠다.
“던전의 문명을 이룩한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지. 이 책의 저자도 인류가 멸망해가고 있다고 말했어. 그 이유는?”
“말했잖아요. 신의 뜻. 이단.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와 장황한 수사로 떡칠 된 문장뿐이라 확실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요. 다만, 정황을 보면 확실해요.”
그게 그렇게 이어지나. 신이란 놈들은 무언가를 위해 다른 지성체를 다른 차원에서 소환했다. 그리고 신의 뜻으로 없애버렸다. 영문을 모르겠다. 없앨 생각이면 소환하질 말던가. 놈들의 의도를 모르겠다.
“이걸 알아낸 건 아마 저희가 최초에요. 이건 엄청난 자룐데요.”
“뭐가?”
“전생에 일어났던 세계 대전, 대 전쟁.”
내 품에 있던 라팔이 툭 던진다.
과연, 이것도 이렇게 이어지나. 전에 했던 예측이 그대로 맞아 들어가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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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줄 요약.
신이 나쁘다.
신이 나쁜 놈이다.
고로 신을 죽여야 한다.
완벽한 삼단논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