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5 / 0128 ----------------------------------------------
세종
이렇게 보낼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갈 상대가 아니었다. 조금은 싸워주며 나도 스트레스를 풀 생각이었다고!
그런데 이게 뭐야. 선빵 삼아 휘두른 일격에 왕이 죽어버렸다.
팔목과 목이 잘려 죽었다. 잘린 목과 팔의 절단면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4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구가 넘어간다.
이놈이 약한 것도 아니다. 오랜만의, 몸으로 느껴질 정도로 높은 밀도를 가진 영혼을 가지고 있다. 몸에 두른 마력장을 뚫고 들어오려 해서, 내 마력으로 흩어버린다.
“적장, 물리쳤다?”
전혀 물리친 것 같지 않다. 나는 전백귀후십귀를 본다. 이놈, 이놈이 원인이다. 진화하더니 너무 고성능이 되었다.
장난삼아 던진 돌에 개구리가 죽는다더니, 딱 그 짝이다.
전백귀후십귀가 너무 뛰어났다. 대충 휘두른 공격에 적장이, 그것도 적국의 왕이 죽었다.
실전에서 써보는 건 오크의 신이랑 싸운 후에 처음이라 성능이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다.
후우, 이게 다 내 부덕이지 누굴 탓하겠어. 토닥토닥. 죽은 왕의 머리를 만지며 위로해주었다. 너도 참 운이 없구나.
되살려서 다시 싸울까? 그러면 무슨 재미야. 그냥 흙으로 돌아가게 냅두자. 부디 다음 생에는 지성체가 아니라 벌레나 개미 이런 거로 태어나거라. 혹여 또 지성체로 태어났다가 나랑 만나지 말고.
남은 놈들도 많으니. 이별은 이 정도로 해둘까. 짧은 시간, 3초 정도 되는 시간이었지만 즐거웠다.
“도, 도망쳐!”
“괴물, 괴물이다아아아!”
내가 일어나자 병사들이 패닉을 일으키며 도망친다.
신무기가 전혀 통하지 않고, 왕이 일격에 죽었다.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군이 와해할 조건을 모두 채웠군.
무차별적으로 흩어져 도망가는 군세. 나는 그걸 쫓는다.
내가 좀 죽였다 해도 고작 수만 명이다. 남은 인원이 40만이 넘는다. 그리고 40만이 넘는 군중이 앞뒤 보지 않고 도망가면 발이 꼬인다.
“으아아! 살려줘!”
“내 발! 내 발!”
도망가며 밀고 넘어지고 뒤엉켜 땅을 구르고.
투두두두두!
이성을 놓은 병사가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무기 조작을 잘못했는지 폭발도 일어난다.
그걸로 시작. 혼란이 도래한다. 광기가 전장을 휩쓴다. 광기의 대상은 모두 아군이다. 동료이며, 친구이며, 어쩌면 가족일지도 모를 놈들이 서로를 쏴죽인다.
투드드드! 투쾅! 콰광!
잡음이 호쾌하고,
으아아! 끄악! 이건 악몽이야!
섞여 들려오는 비명에 귀가 편하다.
예전에, 광기가 싫어 해학에 몰입했다. 해학에 몰입하니 광기가 편해졌다. 미쳐버렸다. 나는 전장을 피했지만, 전장이 나를 불렀고, 모르모트 시절의 악몽이 나에게서 피와 살에 대한 거부감을 앗아갔다.
결과, 살점이 튀는 전장을 꺼리지 않는, 살육을 환영하는 광자가 탄생했나니.
내 인생이 어찌 이리되었나 개탄스럽다. 난 이런 삶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삶이 다가와 강요했다. 이리되어라.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되어라. 그렇지 않으면 네가 네가 아니게 될 것이다. 이성을 잃은 광자가 되어 너 자신을 잃으리라.
난 나를 잃진 않았으나 미쳤다.
광기가 만든 분노는 깊고 깊어 풀 길이 없으며, 가슴속에서 식지 않고 끓는다.
자, 고아하고 천스러운 자아비판은 이 정도면 됐다. 현실로 돌아가자.
현대 병기가 활약하는 전장에서 나는 홀로 구시대적인 무기를 들고 있다. 검으로 째고, 베고, 가른다.
초인. 3급 이상의 각성자로 보이는 놈들이 때로 내 앞을 가로막는다. 총을 든 놈도 있고, 칼을 든 놈도 있다. 공통점이라면 모두 제법 마력을 다룰 줄 안다.
모두 한 방이다. 무어라고 외치는 소리는 모두 뒤로 흘러가 들리지 않는다. 내 귀에는 전장이 만들어내는 소음만이 가득하다. 소음, 그 이상의 소리는 들리지 않으며, 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끓어지는, 그러나 선명한 기억. 귀와 눈에는 노이즈가 낀다. 노이즈가 흘러가고, 그 속에서 나는 피를 뒤집어쓰고 그 온기를 느낀다. 온기였던 사람을 느낀다.
웃으며 사냥감을 뒤쫓는 나는, 틀림없는 인간 사냥꾼이다.
자, 도망쳐라. 가여운 사냥감아. 네가 지치면 그때 가서 숨통을 끊어주마. 아니다. 그냥 끊어주마. 기다려 주기에는 주변에 사냥감이 너무나 많다.
나는 내 배역에 몰입했다. 메소드 연기가 있다면 이런 것이다.
한 자루 칼에 몸을 맡긴 사냥꾼이 되어, 사냥감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쉬지 않고 사냥에 몰두했다.
정신을 차리니, 붉은 평야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몬스터들이 다가와 피를 마시고 시체를 뜯는다. 나에게 다가오는 몬스터는 없다. 멀찍이 거리를 두고, 내 영역을 인정하듯이 붉게 변한 평야의 외곽을 차지한다.
사람들은, 인간과 수인을 불문하고 내 영역을 존중해주지 않건만. 한낱 괴물인 너희들이 내 영역을 존중해 주는구나.
그러면 나는 인간이 아닌 몬스터인가.
지랄, 감상에 젖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과하면 병이다.
사냥감이 없어질 때까지 사냥했다. 살아남은 것들은 없다. 저 멀리 도망에 성공한 놈들이 보이지만, 쫓지 말자. 너무 사방으로 도망가서 쫓기도 귀찮다.
피가 섞인 붉은 흙을 한 움큼 손으로 퍼낸다. 비릿한 피 냄새가 난다.
“딱 좋게 젖었네.”
나는 흙을 퍼서 쌓는다. 붉은 흙이 쌓이고, 흙과 섞인 살점도 쌓인다. 물컹한 내장도 주워서 올리고, 잘린 다리도 올리고, 하반신이 잘린 상반신을 올리고, 하반신을 찾아 그것도 올린다.
내장과 살과 뼈와 붉은 흙이 뒤섞여 층층이 탑을 이룬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탑을 쌓다가, 한 가지 걱정이 머리를 스친다.
두꺼비의 취향이 빨간색이 아니면 어쩌지? 새집을 안 주나?
***
북쪽 경계 초소의 경계병 라리카는 북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50만의 군세가 확인되고 26시간이 지났을 무렵의 일이었다.
‘슬슬인가.’
뮤텐의 군대가 진군 중이라 예상되는 지역에 들어섰다. 적의 초계병에 대비해야 했다.
라리카는 숨을 죽이고, 자신의 진명과 기능을 사용했다. 둘 다 은밀 계통의 효과를 가지고 있다. 기능은 익히기 까다롭고, 진명은 태어날 때부터 선택받는다. 진명과 기능이 모두 은밀이라는 특성을 가지는 라리카는 경계병으로서는 축복받은 부류였다.
은밀히 뮤텐의 군대가 있을 방향을 살피던 라리카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50만의 대군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초소의 병사들이 일자무식이라고 한들, 50만이나 되는 군대의 진행 방향을 오인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무언가 착오가 있겠지. 좀 더 찾아보자. 라리카는 나아갔다.
나아갈수록, 풍경이 변했다. 흙에는 피가 섞였고, 갈가리 찢긴 시체가 보였다. 처음 보는 철 덩어리, 무기로 보이는 것들도 땅에 떨어지고 부서져 있다.
라리카에게는 그 모든 광경이 이질적이었다. 흩어진 시체도, 부서진 쇳덩이도. 마치 다른 세계의 광경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 갈수록 피 냄새가 진해졌다. 피와 흙이 섞여 처음 맡아보는 기묘한 냄새를 풍겼다. 발효된 피의 냄새? 발효된 흙의 냄새? 라리카의 짧은 배움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냄새였다.
시체가 늘어가고 펼쳐진 평원의 참혹성이 늘어갈수록 그 냄새 또한 덩달아 진해졌다. 라리카는 코를 싸매고 전진했다. 구토가 올라왔지만, 꾹 눌러 삼켰다.
정찰병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또 한편으로는 어딘가 홀려서. 라리카는 전진했다.
‘그것’은 그 자리에 있었다. 피로 붉게 물든 땅 위로,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라는 양 당당히 존재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위장에서 올라오던 구토감이 도를 넘었다.
우웨엑!
토막난 시체도, 발에 밟히는 물컹한 내장의 감촉도, 피와 흙이 부패해가는 냄새도 참을 수 있었지만, 저건 아니었다. 그런 것은 저것에 비하면 너무 약했다.
라리카는 속에 든 것을 모두 게워낸 후에야 겨우 그것을 바로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탑이었다.
귀신의 탑. 악마의 탑.
붉은 흙더미에 시체가 켜켜이 쌓여 있고, 팔다리가 기형적으로 튀어나와 있다. 군데군데 꽂힌 쇳덩이가 딱딱하다.
피 냄새, 흙 냄새, 녹슨 쇠의 냄새.
탑을 중심으로 떠도는, 아마 원혼이라 불러야 좋을 것들을.
개의 수인인 라리카는 보고, 맡고, 느꼈다.
그리고 몸을 공포에 질려 몸을 떨었다. 저건 미쳤다. 광기의 산물이다. 저것이 광기가 낳은 탑이라면, 저 탑을 낳은 사람이 있을 터. 그들은 어디에 있나?
탑에만 정신이 팔렸던 라리카는 뒤늦게 발견했다. 탑을 등지고 자신에게로 걸어오는 이인조를.
인형처럼 아름다운 소녀와 상쾌하게 웃고 있는 균형 잡힌, 무인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완벽한 체형을 가지고 있는 남성.
그들은 걸어와, 라리카의 양옆을 지나쳤다.
남자가 라리카에게 말을 걸었다.
“정찰병이냐? 수고해.”
단순한 격려의 말. 그런데도 라리카는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수인이 가지는 동물의 감각이 미친 듯이 경종을 울려댔다. 상대가 적의가 없을 에도, 옆을 지나가며 말을 걸었을 뿐임에도 그랬다.
저건 위험하다. 본능이 그리 말하였다.
거짓말처럼 두 사람은 라리카를 지나쳐 걸어갔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는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호흡을 골랐다. 한참 동안 호흡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라리카의 앞에는 탑이 있었다.
다시 욕지기가 올라왔다.
***
제법 괜찮은 작품을 만들었다. 중간에 라팔이 와서 함께 만들었다. 흙을 모으고 고철을 쌓고 생산적인 활동이었다.
라팔이 뒤늦게 쫓아와서 함께 만들었다. 좆집과 주인의 첫 공동 작업이 시체의 산을 쌓는 일이다. 제정신으로 할 일은 아니다.
느긋하게 돌아오는 길에 우리 편으로 보이는 수인 병사가 하나 있어서 평소라면 하지 않을 수고하라는 말까지 해주었다.
전쟁, 인간이 뒤에서 조종한 전쟁. 인형으로 놀아난 수인들. 오늘 죽은 병사의 태반은 내 죄일까, 뒤에서 조종한 놈들의 죄일까.
유상민이 두 달은 걸린다고 했던가? 심심하진 않겠다.
“회귀. 어떤 느낌이냐?”
내가 옆의 라팔에게 묻는다. 큰 이유는 없다. 아니다. 내가 죽인 사람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궁금해졌다.
“심연, 그리고 부활.”
“심연?”
“말 그대로 심연. 다른 표현은 못 찾겠어.”
“심연이라.......”
곱씹는다. 심연, 어떤 느낌일까. 죽은 놈들이 봤을 심연과 내가 살아온 인생. 뭐가 더 지옥일까.
“그 심연이란 거, 다시 보기 싫냐?”
“응. 싫어. 절대로.”
라팔치고는 드물게, 아주 드물게도 매우 강한 어조였다.
나는 늘 하던 것처럼, 내가 만든 전장을 한 바퀴 돌았다. 일종의 습관이다. 아갈리에서부터 이어진, 의미도 기억나지 않는 나치고는 이상한 습관.
전쟁이 끝나고 여유가 있으면 나는 항상 피의 길을 산책한다.
아마 미치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치지 않기 위해 미친 광경을 본다. 아주 창의적인 발상이다.
전장을 한 바퀴 둘러보고, 바로 세종에 있는 내 공방으로 텔레포트한다. 인어는 오늘도 물속에서 몸부림친다. 한 달이 넘었는데도 적응을 못 하고 있다.
앞으로는 바빠질 것이다. 연구할 시간도 없겠지. 그래, 넌 필요 없다.
주먹을 내리친다. 연구용 수조가 깨지고 물이 흘러나온다.
뭍에 나온 인어가 숨을 쉰다. 나는 인어에게 불필요한 산소 호흡 기능은 남겨두지 않았다. 숨이 막혀 켁켁 대지만, 인어는 숨을 쉰다. 고통 속에서 안도한다.
육지에서 안식을 얻는 인어. 인어라는 존재의 존재모순이다.
영혼 탐지 마법을 작동시키고, 인어의 숨통을 끊는다.
인어에게서 날아온 영혼은 천장을 통과해, 나리에게로 흡수된다.
저렇게 되는 거군. 성녀를 몽땅 죽여서 영혼을 한데 모으면 여신이 부활하나?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손에 있는 성녀를 키우는 거겠다. 여신의 영혼이 모여 어떤 작용을 일으킬지 모르니 이게 최선이다. 성녀의 숫자까지 조절해야 하나.
신을 죽이고 성녀의 숫자를 조절한다.
하, 진짜 내가 신이라도 된 것 같군.
============================ 작품 후기 ============================
10초 후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