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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머리 구석을 긁어대는 위화감에 대한 짜증이 극에 달하려 한다. 수십 개의 분할 사고 중 하나라고 해도 그게 내 생각이 아님이 아니다. 그 위화감도 어엿한 내 생각이며, 위화감에서 나오는 짜증은 어련한 내 짜증이다.
위화감을 머릿속에 담아두길 선택한 것이 내 선택이니. 이건 내가 자처한 고행이 되는 건가.
욕구는 다양하며, 짜증도 다양하다. 내 머리 구석을 찔러대는 짜증은 섹스로 풀리는 짜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라팔이와 뒹굴고 사랑이랑 놀아도, 잠깐 진정될 뿐. 이 짜증을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잠잠하다가도 갑작스레 튀어나와 나를 놀라게 했다.
그래서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나는 먼저 환호했다.
캘리포니아로 떠난 반역자를 맞아주고 이 주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전장을 좋아하는 건 정치인과 상인, 그리고 미친놈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예외 없는 미친놈이다.
“국정도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종교계를 모두 쳐냈기 때문에 민심도 아직 잡히지 않았습니다. 사기가 높은 건, 수도 주변의 국민들 정도입니다.”
“정예 전사들 중에도 반역에 가담한 자들이 상당수입니다. 보병을 충당한다고 해도, 초인 전력이 압도적으로 부족합니다.”
“내가 가겠다.”
“허나, 폐하. 뇌인의 건틀렛을 또 잃을 수는 없습니다.”
“짐이 죽기라도 할 거라는 소리인가?”
“적군 중 뮤텐의 왕이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폐하에게 변고가 생기면 또 누군가 역모를 생각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왈왈, 멍멍. 개소리. 아니, 수인소리가 들리는 회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간다. 회의실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도 나를 제지하지 않는다.
여기 머물며, 나는 내가 미친놈임을 행동으로 증명했고, 미친놈의 미친 짓에 끼어들어 피해 보고 싶은 인간은 없다. 그게 답도 없는 무력을 가진 미친놈이라면 더더욱.
회의실을 박차고 들어온 나를 보고 왕은 무언가 생각에 잠기고, 대신들은 호통을 치려다 입을 다문다. 나한테 한 번씩 데였던 놈들이다.
그리고 나한테 소리치는 놈도 몇 있다.
“네 이놈! 누군지 몰라도, 여기가 어디라.......”
개처럼 생긴, 진짜 코와 입이 튀어나와 개의 특징이 두드러진 대신 하나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아가 벽에 박혔다. 기절해 벌린 입에서 강냉이 몇 개가 떨어진다.
“적병의 수는?”
왕이 대답한다.
“50만이네.”
“난 여기 전쟁의 숫자 단위를 모르거든. 많은 거야? 적은 거야?”
“대군...... 은 아니고 한 나라가 동원할 수 있는 평균적인 전력은 되겠지.”
50만이 평균. 신성력도 있고, 포션을 비롯해 마법, 무술, 진명, 기능까지. 살아남을 수단이 많으니 싸울 인구도 많은 건가.
죽일 맛이 나겠군. 지금 나는 아마 웃고 있을 것이다.
나를 보던 사람들이 창백하게 질리는 것을 보면 확실하다.
“초인 전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대충 짐작은 가지만, 그래도 묻는다. 단어 하나의 이해 차이 때문에 오해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
“말 그대로 초인, 그대들 기준으로 하면 3급 이상의 각성자를 가리키는 말일세. 얼마 전 당신이 흔적도 없이 갈아버린 2천 장병이 모두 초인이었지.”
“아, 그 약한 놈들?”
버티지 말라고 쏜 공격이긴 했지만, 진짜 한 방도 못 버티고 녹아버릴 줄은 몰랐다. 반역까지 준비한 놈이 자신만만하게 내놓아서 대단할 줄 알았는데.
“그래서, 그놈들은 어디서 쳐들어오고 있는데?”
“북쪽 국경선을 넘고 있다고 하네. 그리고 이상한 점이 하나.”
“뭔데?”
“정찰병의 보고서에는 처음 보는 무기와 병기로 무장하고 있다고 되어 있었어.”
신병기? 더 좋다. 단순한 학살은 재미가 떨어지지. 조금의 위험 요소는 있어야 스릴이 사는 것 아니겠어. 내가 만족할 만한 스릴은 절대로 주지 못하겠지만, 이 정도로 만족하자.
나 정도 되면 어떤 일에서 스릴을 느끼긴 불가능에 가깝다.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를 타도 그냥 내가 달리는 것보다 느려.
차라리 우주에서 맨몸으로 지구 진입 놀이를 하지. 운석이 내가 된다!
음, 이 놀이는 진짜 재미있겠다. 나중에 한 번 해보자.
룰루랄라 북쪽 국경으로 날아간다. 텔레포트를 사용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여흥이다. 여행에는 여로 또한 하나의 즐거움이리.
북쪽 국경이라 해도, 이런 세계에서 국경이 명확히 정해져 있진 않았다. 북쪽 경계선이라는 곳에도 요새 하나에 높은 망루와 초소가 있을 뿐.
그 북쪽 경계선에서 더욱 북쪽, 바글바글 사람의 무리가 몰려온다. 지성체는 모두 사람이라고 표현하니, 사람의 무리라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런 의미로 생각하면 고블린까지 사람취급 하는 건 어떤가 싶지만, 전장을 앞에 두고 잡생각은 좋지 않지. 생각을 비우고 앞에 보이는 군대에 집중한다.
50만의 사람이 피와 살과 흙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선명하다. 그 환각은 너무나 선명하여 당장에라도 손에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당장에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시야를 확대해, 곧 죽을 가련한 목숨들의 면면을 눈에 담는다. 그리고 난 보았다.
문명의 이기를.
총?
모두는 아니지만, 병사들은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50만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총을 든 병사의 숫자가 반이 넘는다. 그것만이 아니다. RPG라고 해야 하나? 그런 쪽의 무기도 보이고 박격포도 보인다.
그리고 최후방에서 진군하는 열 대의 트럭으로 보이는 차량, 화물 적재함에는 미사일 발사대로 보이는 것을 얹고 있다.
내가 무기에 대해 빠삭하다면 저것의 이름도 알겠지만, 내가 본 건 티비 너머에서 저 트럭이 수십 발의 미사일을 쏘는 장면이 전부다.
현대 화기로 무장한 판타지 세계의 수인들.
저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머리가 갠다. 지독히도 날 괴롭히던 위화감이 사라진다.
킥킥킥. 웃음이 새 나온다. 그랬나. 그렇게 된 거였나. 종교계가 수립한 프로파간다 작전. 그 작전 개요소를 보고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았다.
저 과거와 현대가 기묘하게 섞인 군대가, 총과 창을 함께든 군대가. 판타지와 현실이 섞인 병사의 행렬이 내게 알려준다.
매스 미디어. 대중 매체.
그 작전 개요서는 매스 미디어를 이용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대중을 선동하는 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갈리, 마법이라는 신비가 존재하며, 기사와 마법사가 판치지만 문명 수준은 중세에 머무른 그곳에 머물렀던 나는 안다.
중세의 놈들은, 저렇게 능숙하게 대중을 선동하지 못한다. 숫자의 무서움은 알지만, 대중을 선동해본 경험이 적거나 없다. 저렇게 잘 짜인 프로파간다 계획서가 나올 수가 없다.
어쩐지, 내가 읽기에 지나치게 편하더라.
나는 아갈리를 거치고 중간계에 머물고 있다. 내 육신은 두 개의 차원을 겪었지만, 내 정신은 여전히 지구의 그것이다.
지구의 인간이 현대 문명적 사고를 가진 인간이 짠 계획이니 내가 읽기 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위화감을 느꼈던 거다. 이놈들이 짜기엔 계획서가 너무 지구적이었다.
쯧. 유상민에게 보여줬으면 바로 알았을지도. 그러면 위화감을 잡아낸다고 쇼를 할 필요도 없었잖아.
과거는 접어두고, 그 작전 개요서와 저기서 오는 기묘한 군대를 보며 확실해진 사실이 있다.
반란부터 전쟁까지. 모두 인간이 개입하고 있다.
두 개의 수인 왕국 깊숙이, 인간이 파고들어 정치를 조종하고 있다.
희열로 소름이 돋는다.
아아, 즐거워라. 암귀(暗鬼)를 깨부수는 건 언제나 최고로 즐겁다. 그들이 오랜 시간 공들여온 계획을 하나하나 쳐부수는 것만으로 쾌감이 느껴진다.
암계(暗計)를 부순다고 옆에서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니니 더욱 좋다. 최고다.
그놈들이 무슨 죄냐고? 암계를 꾸민 것이 죄다. 가령 그 목적이 선한 것일지라도 죄다. 나는 암계를 부수고 암약하는 세력을 부수고, 아무튼 부수면서 쾌락을 느끼는 미친놈이니까.
일단, 저기 오는 군대부터 박살 내자.
혼란스러운 내정. 여기에 외침이 가해지면 국가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 일을 꾸민 놈들은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 예상을 뒤집어 주지. 머리를 쥐어짜서 전제부터 다시 쌓아 올려라. 나라는 변수를 계획에 넣어서 말이야.
군대와 적당히 떨어진 상공에 멈춘다. 여기서 보니 무기가 참 다양하다. 이름도 모르는 무기가 잔뜩 있다. 저쪽을 뒤에서 지원해주는 세력은 상당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나보다.
나는 연극을 하듯, 저들에게 선언한다.
-아아, 들리나. 귀군들은 왕국...... 무슨 왕국이었더라?
까먹었다.
-아무튼 왕국의 국경선을 넘었다. 군사훈련 중의 실수라면 당장 기수를 돌려 돌아가도록 하라. 아군과의 합동 훈련이라도 하고 싶으면 정당한 외교적 절차를 받고 다시 와라. 이건 경고다. 그 이상 접근하면 아국에 대한 적대행위로 판단. 섬멸에 들어가겠다.
저들이 문명의 상징인 총을 들고 있다면, 나도 문명인답게 일단 대화를 시도한다.
돌아오는 것은 총알과 포탄의 세례. 나를 향해 쏟아지는 투사체가 모두 허공에 정지한다.
후두둑. 힘을 잃은 총알과 포탄이 땅에 떨어지고, 나도 함께 땅에 착지한다. 전백귀후십귀를 뽑는다.
총. 위력적인 무기다. 청소년만 되도 쏠 수 있으며 생물을 상대로 살상력은 절대. 세종에서도 총을 찬 사람들을 심심찮게 봤다.
포. 한 발로 수십 명의 인간을 쓸어버릴 수 있는 무기다. 경험해보진 않았어도, 비슷한 마법에 빗대어 생각하면 그 위력은 악몽이다.
그런 무기들을 나는 단 한 자루의 칼로 상대할 생각이다.
신무기를 들고 의기양양하겠지? 그 자신감을 칼 한 자루로 전부 부숴주마.
전백귀후십귀의 날을 손가락으로 쓴다. 붉게 변한 칼날은 가만둬도 요사스레 빛난다.
칼 한 자루만 들고 군대에 돌격하는 용사의 등장이시다. 실은 용자는 광자고 용사가 든 검은 광검이다.
미친놈과 춤 한 판 춰보자.
50만 군대를 향해 홀로 돌격한다. 총알이 내 몸을 두드리지만, 겉가죽도 뚫지 못한다.
군대와 접근, 거리를 100 정도 남겨둔 시점에서, 횡으로 크게 일섬.
검의 궤적에 있던 것들이 잘려나갔고,
선봉이 무너진다.
무너진 대열을 파고들며 깊숙이 침투, 여기서부터는 간단하다. 휘두르면 된다.
휘두르고, 휘두르고, 휘두른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검풍이 날아가 수백을 베어낸다. 백 번이면 수만, 천 번 가까이 휘두르면 오십만이다.
몇몇 총탄이 날아와 나를 꿰뚫는다. 마력이 담긴 총알이다. 곧장 상처는 재생된다. 이런 것도 할 수 있군. 그러나 나에겐 무의미하다.
총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나에게 중화기를 퍼붓는다. 아군이 말려들어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내 일격에 쓰러지는 병사가 수백. 포탄에 말려드는 아군은 끽해야 수십.
산술적으로는 잘못되지 않았다. 잘못되지 않았다만, 포탄도 내 몸을 상처 주기에는 역부족이다. 무려 신과 일주일 동안 누가 더 불사신인지를 겨루고도 살아남은 몸이다. 그깟 병기는 너무 약하다.
병사를 유린하는 내 앞을 거대한 그림자가 가로막는다. 공주의 보좌관, 코끼리의 수인보다도 더 크다. 4미터는 될 것 같다. 이거 사람 맞아? 인간이나 수인의 분류가 아닌 것 같은데?
오우거가 사람 탈을 썼나.
“제멋대로 잘도 날뛰어주는군.”
“내가 날뛰는 건 내 맘이고. 넌 누구냐?”
“내가 바로 뮤텐의 왕이다.”
적군에 적의 왕이 껴있네 마네 했었지. 진짜로 있었나?
잘 감춰뒀던 마력이 뿜어진다. 내 경험에 따르면 4급 각성자 보다는 강하다. 그럼 5급. 반신이 될지도 모르는 놈인가.
뛰어올라, 검을 휘두른다.
“뒈져.”
전백귀후십귀에서 초록색 빛이 뿜어진다. 방사능 검으로 뮤텐의 왕을 베어낸다. 막으려 해봤자 헛수고. 막으려 들이댄 팔뚝도, 입고 있던 갑옷도 통째로 잘린다.
떼구르르. 왕의 목이 땅을 구른다. 떼구르르, 구르는 목을 따라 병사들의 눈도 구른다.
침묵이 굴러와 전장을 가라앉힌다.
나는 당황해 전백귀후십귀와 잘린 목을 번갈아 본다.
야, 그래도 원킬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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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백귀후십귀 +1
설명 : 웬 미친놈과 제정신이 의심되는 장인이 만든 광검. 스스로 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