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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쥐새끼가 자리에서 무너진다. 병사가 사라진 것으로 전의를 상실한 모양이다. 나는 왕에게 다가가 친근하게 어깨를 두드린다.
“세상에서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는 거야. 이해하지? 수인들은 육감적이라며.”
육감적이다. 다른 말로 본능이 뛰어나다고도 하고, 무식하다고도 한다.
왕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싸움구경 하다 보면 좋은 자리를 찾을 수도 있고, 그러다 좋은 자리가 보이면 앉을 수도 있지. 안 그래?”
내가 왕좌에 앉은 건 왕좌가 편해 보여서다. 그것 말고 다른 이유는 없다. 왕에게 허락을 구했고, 나는 구국의 영웅까지 되었으니. 왕좌에 앉았던 것 가지고 쩨쩨하게 뭐라고 하지는 않을 테지.
자, 뒷수습 끝. 나는 왕과 원만한 외교적 관계를 수립하였다. 앞으로 긍정적 도움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완만하게 처리...... 되지는 않았고 아직 쥐새끼의 부하들이 남았구나.
“니들도 그냥 죽어라.”
“살려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역도의 잔당들이 폭발했다. 피와 내장이 알현실에 날린다. 알현실이 너무 넓다보니, 저놈들의 피로는 이곳을 덥히기에 부족하다. 흠, 시체는 발열 용품으로 쓰기에 부적절한가?
나는 알현실 중앙에서 상쾌하게 웃는다.
비로소 진짜 모든 것이 완만하게 처리되었다. 평화로운 해결이다. 모름지기 지성인이라면 싸움을 멀리하고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 평화 만세, 평화 최고.
“건틀렛 반환해야지.”
“네, 그래야죠. 여기 있습니다.”
내 말에 유상민이 손에 든 건틀렛을 공주에게 건네고 공주는 넋을 놓은 상태로 그걸 받는다.
역모를 진압한 직후다.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도 움직이는 사람 하나 없다. 쯧쯧. 저들의 게으름에 절로 혀가 차인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내 혀가 훨씬 부지런하다.
“역도는 죽었고, 역군도 정리되었지만, 남은 일이 산더미야. 안 그래, 친구들? 뒷수습해야지.”
뒷수습.
그 단어에 왕을 비롯한 신하들이 정신을 차리고,
짝! 마력을 담아 친 박수에 모두의 의식이 각성한다.
“일해야지, 일. 빨리 가서 일해!”
허겁지겁 달려가는 신하와 왕들. 덤으로 공주까지. 나는 달려서 알현실을 나가려는 공주를 붙든다.
“우리 쉴 곳은 안내해 줘야지? 이왕이면 편한 곳으로 부탁해?”
일을 하니 피곤하나, 몸을 좀 쉬고 싶다. 아아, 피곤해.
***
뒷수습은 거창하지도 않았다. 종교계가 반역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담담히 밝히고, 그 명분을 제시한다. 그리고 성녀가 민중들 앞에서 신성력을 사용했다. 손에 뇌인의 건틀렛을 차고.
그걸로 끝.
종교계가 제시한 두 가지 명분이 한 번에 공중분해 되었다. 신성력이 사라진 것은 모든 사람이 아는 사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신성력을 가진 공주는 성녀로 추앙받기까지 했다.
나리도 성녀고, 내 실험실에서 발광 중일 인어도 성녀고, 수인 왕국의 공주도 성녀다.
여기도 성녀, 저기도 성녀, 지천에 성녀가 풍년이다. 지랄도 풍년이고.
종교계는 완전 분해되어 풍비박산 났다. 관련 있는 자 없는 자를 가리지 않고 숙청.
주력이 다 죽고 도망가는 찌끄러기 수준의 잔당은 군을 파견해 가볍게 제압, 고문 후에 처형이 기다리고 있다.
고문으로 캐내며 알아낸 것이 있는데, 어디서 알았는지 이놈들은 공주가 세종에 죄인으로 잡힌 것을 알고 있었다. 반역의 결정적 이유는 이놈들이 어디서 공주가 세종에서 죄인으로 잡힌 걸 알았던 다음부터다.
죄인, 까고 보면 그 취급은 노예. 노예인 공주. 왕과 왕가의 굴욕이다.
공주의 무능, 공주를 제대로 교육하니 못한 왕의 무능. 무능한 왕가와 실추된 수인의 명예. 그러니 왕은 왕의 자격이 없다. 이렇게 이어지는 프로파간다 작전 개요가 놈들의 아지트에서 나왔다.
왕을 몰아내고 정당성을 얻기 위한 준비까지 끝내 놨다. 왕을 몰아내지 못했더라도, 저대로 프로파간다를 실시했다면 민중의 상당수는 왕가에게 등 돌릴 것이다.
여러 경우의 수를 대비한 작전 계획서였지만,
계획의 마지막은 항상 숨겨뒀던 성자를 등장시키면서 마무리다.
-신이 우릴 버린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신은 아직 우리 곁에 계신다!
GG. GOOD GAME. 게임 끝이다.
버렸던 신이 우릴 선택했다. 신이 실존하는 사회에서 이것보다 큰 설득력을 가지는 요소는 없을 것이다.
치열하게 준비했을 참모들의 정성이 갸륵하다. 그 갸륵한 정성은 모두 공주가 성녀가 되면서 쓰레기가 되었지.
근데 이 일련의 흐름에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공주에게 부탁해 작전 개요서를 받아봤는데, 위화감은 강해지기만 할 뿐 이렇다 할 형체가 되지는 않았다.
“뭐, 됐나.”
알지 못하는 건 알지 못하는 것으로 남기면 된다. 때가 되면 모두 알겠지. 그때는 이미 늦었을 때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아니다.
늦은 것들을 되돌려 바로 잡을 힘이 있다.
수십 개로 분할 된 사고 영역 중 하나에 위화감을 할당한다. 내 머리 한구석에는 끝없는 위화감이 차지하게 되었다.
형체 없는 위화감이 머리 한구석을 헤집고 다니는 것은 간지러우면서도 썩 유쾌하지 않다.
위화감과 불쾌감을 안고, 나는 일상으로 복귀한다. 나에게 일상이란 신을 죽이기 위해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조사는 아직이야?”
“종교서적은 대부분 고서다. 이제 막 학자들이 도착해 조사를 시작한 참이니. 걸려도 한참이 걸릴 거다.”
“고어는 대충 익혔으니,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건데요.”
유상민과 공주, 두 사람의 의견이 판이하다. 이게 무슨 뜻이냐는 의미를 담아, 공주를 소아보아 주었다. 공주는 주춤주춤 물러나며 변명한다.
“저, 저 남자가 이상한 것이다! 사흘 만에 언어 하나를, 고명한 학자들도 애먹는 고어를 완벽하게 익히다니!”
“학자들이 머리가 참 나쁜가 봐요. 이 쉬운 것도 해석하지 못하고.”
평생을 학문에 바친 학자들이 들었다면 혈압 올라 뇌혈관이 터져버릴 발언을 태연하게 한다.
“어디 나도 좀 보자.”
“핫, 너 같은 무뢰배는 무엇이 글자인지도 모를 것이다.”
공주가 들고 있던 책 한 권을 던져준다. 저 철부지도 사제라는 직함을 달고는 있어서 도서관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내가 봤을 때는 공주의 무능을 아는 왕이 일부러 도서관에 박아둔 것으로밖에 안 보인다.
솔직히 저 프로파간다가 성공했다면 왕가가 바뀌는 것은 확정적이었다. 그런 죄를 지은 공주를 벌하지 않는 것만 봐도 왕의 자비로움을 알 수 있다.
아니면 그냥 무른 것이던가. 정치판에서 무르다는 것은 병신이라는 말과 상통한다.
가족이라고 싸고 들면 부하에게 신임을 잃는다.
누구는 실수해서 나라를 말아먹을 뻔했는데도 멀쩡히 돌아다니고, 자기가 실수했는데 좌천되거나 감옥가면 억울해서라도 칼을 뽑겠다.
잡생각은 치우고, 글자에 집중한다. 유상민을 불러 책 몇 줄을 읽게 시킨다.
-신에게 항상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의문도 낳는다. 왜 경건해야 할까. 왜 신을 섬겨야 할까.
이단으로 지정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내용이다. 유상민이 읽는 책의 내용에 귀를 기울이며, 분할 사고와 사고 가속을 실시한다.
몇 분 사이, 내 머릿속에서는 십여 일의 시간이 흐른다. 됐다. 익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이라는 체계에 관해서 좀 더”
유상민의 말꼬리를 물고, 따라잡는다.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알아볼 필요가 있다.”
나와 유상민의 목소리가 겹친다. 유상민이 보내는 흥미의 시선이 날 향한다. 유상민이 말을 멈춘다.
나는 계속해서 말한다.
“푸스 라다는 말했다. 신께선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그러면 신께선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비극을, 그 끔찍함을 보고만 계신다는 것일까? 신성력을 쓸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면 우리는 모두 비극 앞에 숙연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신성력과 마력으로 무장한 용맹한 전사들조차도 때론 비극의 무대에 오른 배우가 된다.”
고어로 된 책을 술술 읽어 내려간다. 공주가 경악한다.
“뭐, 뭐냐! 어떻게 한 것이냐!”
“그냥, 익혔지.”
“몇 분, 고작 몇 분이다! 그 사이에 언어 하나를 익혔다고?!”
내 체감시간으로는 13일 정도 되었다. 유상민 저놈은 이걸 사흘 만에 익혔다고? 내가 봤을 땐 저놈이 진짜 괴물이다.
대한 길드의 1급 조사관은 전부 저 정도는 하는 건가.
“겨우 이 정도로 왜 그래? 누구나 다 이 정도는 하는 거 아니었어?”
“말도 안 된다! 이건 사기다!”
“결국, 신은 이 모든 비극을 방관하기만 하는 방관자라는 사실이다. 그도 아니면 비극을 보고 즐기는 자일지도 모른다. 실제 신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던, 세상에 비극이 넘쳐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책을 계속 읽자 공주는 결국 입을 다문다.
저항하고 싶겠지. 인정하기 싫겠지. 힘들어 익힌 언어를 몇 분 만에 뚝딱 익혀버리는 존재가 있다면.
그 감각 잘 안다. 나도 원래는 인간이었으며, 이 몸을 제대로 다루기 전에는 범인, 잘 쳐줘야 수재였다. 그런 놈이 전장을 구르고, 괴물이라 불리는 인간을 봤고, 천재들을 마주하기도 했다.
천재를 보고 느끼는 절망은 나에게 낯설지 않은 감정이다.
그래서 더 즐겁다. 상대를 절망에 빠뜨리는 것이.
그 절망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낄낄 웃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공주는 방을 나간다. 나에게서 책을 받지도 않고, 시종일관 땅을 보고 있었다.
다음에 만나는 공주는 어떤 모습일까. 계속 절망한 채라면 예상대로고, 그게 아니라면 상이라도 줄까.
그 절망이 어떤 것인지 아는 만큼, 그걸 극복했다면 찬사해줄 마음도 있다.
“그래서, 얼마나 걸릴 것 같냐?”
“고서가 서재를 이루고 있어서 다 보려면, 한 달에서 두 달 정도요?”
“잠깐 세종에 다녀올 시간은 된다는 말이네.”
“네.”
여기서 지내며 공주나 골려주고 싶다만, 반역자가 떠나기로 한 날이 다 되어간다. 함께 신을 죽인 동지니, 송별회 정도는 가줘야지.
***
던전에서 돌아온 날부터, 반역자는 꾸준히 자산을 정리했다. 대한 길드에 뇌물로 바친 것 말고도 반역자가 가진 자산은 많았다. 그걸 모두 정리해 현물화하고, 대한 길드에게 신분보증서를 받는 것으로 반역자는 여행 준비를 끝마쳤다.
그리고 나는, 떠나려는 반역자에게 또 짐을 한 아름 떠넘기고 있다.
“이거랑, 이거랑. 이것도 가져가. 효과는 여기 적어놨으니 나중에 확인하고. 음, 만약을 대비해 포션도 필요하겠지.”
검을 비롯한 무기 몇 개. 그리고 장신구 잔뜩. 포션도 한 다스.
모두 몸을 지키기 위한 물건이다. 장신구 중에는 내가 만든 것도 섞여 있다. 성능은 탁월하다.
포션도 엘릭서를 비롯해 아갈리에서는 보물로 불리는 것들이다. 결정적으로, 내 피를 정제한 포션도 몇 병 주었다. 제자 때처럼 독약에 가까운 그런 것이 아니라, 제대로 정제한 포션이다.
내 피라고 전부 영약인 것은 아니다. 안 그러면 나는 피도 마음대로 못 흘린다. 내가 영약이라고 인식하고 마력을 발휘하는 것만 영약의 효능을 한다.
반역자에게 준 것들은 특히 신경 써서 피를 뽑아 만든 포션이다.
효과는 엘릭서의 몇 배. 죽은 사람도 5분 이내라면 살려낸다. 5분이 지나면 영혼이 몸을 떠나서 무리다. 그 후에는 네크로맨시만이 답이다.
감시 겸 마중을 나온 꼬맹이가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의 물건들, 그것들을 떠안은 반역자도 어리둥절하다.
“왜 이런 걸 저에게 주시는 겁니까? 특히 이 무기들, 이것들은 하회탈의 검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내가 준 무기를 보는 오크의 눈가가 떨린다.
“거, 미국 가면 인종차별부터 시작해서 살기 힘들 거 아냐. 너 죽지 말라고.”
나는 되도록 반역자가 죽지 않고 오래 살길 바란다. 오크의 평균 수명은 30년, 저놈은 4급 각성자이기도 하니 100살 이상도 가능하다고 한다.
“살아서, 되도록 영화를 많이 만들어. 나는 보고 싶거든. 니가 만든 영화.”
반역자가 되도록 오래 살아주었으면 한다. 나는 반역자가 만든 영화를 보고 싶다. 이건 진심이다.
평범한 오크는 신에게 선택받았다. 동시에 신에게 구속받았다. 그래서 오크는 그래서 자유를 원했다.
자유를 원하여, 몸을 던져 자유를 구하고, 끝끝내 자유를 쟁취한 한 마리 오크.
그놈이 만드는 영화. 만들어갈 영화.
어떤 영화일지 상상만 해도 기대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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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만 써도 어지간한 블록버스터 뺨칠 영화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