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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나에게는 지금 내 인생도 희극처럼 보인다.
우린 왕성 내부를 걷고 있다. 차례차례 병사들이 우릴 공격한다.
그때마다 복도를 장식한 장식이 하나씩 늘어난다. 붉고 질척이는 장식은 따뜻하여 따스하다. 따스한 온기가 차가운 복도마다 스며든다.
한 몸 바쳐 싸늘함을 감싸는 이들이 있으니, 오늘부터 이 왕성에는 따듯하고 인자함이 넘쳐흐를 것이다. 왕은 성군이 되어 백성을 두루 살피겠지.
그리고 공주는 꽃길을 걷는다. 마디마디 온기가 스며들고 붉은 장식을 더한 복도는 꽃길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붉은 꽃길을 걷는 공주의 표현이 복잡하다.
공포? 혐오? 그 이상은 모르겠다. 내가 알 바도 아니다.
난 부탁받은 일을 하는 것이고, 공격해오는 쪽이 멍청하다. 명백한, 압도적인 전력 차이. 그런데도 덤벼온다.
나를 죽여주오, 이렇게 외치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우선 무릎을 꿇고, 사정을 설명한 뒤, 협상을 하거나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다.
싸움이란 쌍방이 엇비슷할 경우 성립하는 것. 승리도 패배도 싸움에만 있는 것이다.
학살 앞에 승리도 패배도 없으며 남는 것은 피와 살점, 그리고 약간의 광기?
그러므로 그걸 알고도 덤벼오는 수인 병사들은 참으로 무지하고 멍청하다 하겠다. 내가 경험해봐서 아는데, 멍청함은 맞아야 낫는다. 아니면 죽어서 다시 태어나거나.
“어디로 가는 거야?”
앞서가는 공주에게 묻는다.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알현실. 왕좌가 있는 곳으로 간다.”
성의 정문부터 왕이 있는 알현실까지 꽃길이 길게 펼쳐진다. 방금 피어 따스한 꽃도 있고, 싸늘히 저물어가는 꽃도 있다. 저마다 다르지만 그것들은 모두 꽃이며, 붉음을 가지고 있다.
내가 가는 길마다 피와 살이 꽃이 되어 점점이 피어난다.
죽기 전에는 모두 다른, 저마다의 삶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죽은 후에는 모두 같은 붉음일 뿐이다. 저 붉음들은 지금은 서로 같은 붉음이나 이전에는 서로 다른 붉음이었다.
서로 다르던 것이 섞여 하나 되어 구분이 없으니, 이것이 진정한 화합이다.
알현실 문이 보인다. 알현실에 오기까지는 공격을 받았는데, 역설적으로 알현실에 앞에는 아무것도 없다.
대신, 안쪽에서 강렬한 기파가 느껴진다. 강렬하다는 건 일반적인 기준이고, 내가 봤을 땐 그냥 미풍이다. 여름밤에 미풍으로 틀어둔 선풍기마냥 미적지근하다.
기파를 느낀 공주가 알현실 앞에서 발을 멈춘다. 보좌관은 왕성에 들어왔을 때부터 날카로운 눈으로 침묵하고 있다. 그러면서 주위를 살피길 게을리하지 않는다. 호쾌한 놈이라 일 처리도 호쾌할 줄 알았는데, 일처리는 진중하다.
저놈이 왕자였으면 죄인이 될 것도 없이 완만하게 일을 해결했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안 열어?”
망설이는 공주를 제치고, 내가 문을 연다. 알현실 안에선 두 패로 갈린 수인들이 서로 살기를 뿜고 있다.
왕관을 쓰고 입가에 피를 흘리는 저쪽이 왕이겠고, 다른 쪽은 모르겠다. 흰색 옷이 사제복과 비슷한데, 수인들의 사제복이 인간의 그것과 같으리라는 법은 없다.
딱 보니 반역이네.
끼어든 이방인을 향해 시선이 몰린다. 왕과 그 일당이 놀라고, 흰색 옷은 잠깐 찡그렸다, 미미하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내 눈은 그 모든 것을 놓치지 않는다.
잠깐 사이 공주의 등장과 거기에 맞춘 시나리오를 세웠다는 뜻이다.
아, 저놈은 내가 싫어하는 부류다. 느낌이 팍 왔다.
두 패는 왕좌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다. 나는 태연하게 왕좌로 걸어가 앉는다. 라팔과 사랑이 내 좌우에 선다.
나는 다리를 꼬고 등받이에 등을 기댄다. 좋은 가죽을 썼는지 아주 푹신푹신하다. 마지막으로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다.
저건 뭔가, 하는 시선으로 모두가 날 본다.
왕좌는 높은 자리에 있으므로, 나는 자연히 저들을 내려다보는 위치가 된다. 내가 말한다.
“하던 거 계속해봐.”
무슨 노름인지 구경해줄 테니, 계속 놀아봐라.
침묵이 알현실을 쓸고 간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 시체가 쌓인 바깥은 피와 살의 온기로 따스하거늘, 여기는 산 사람이 있는데도 차갑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발열이라는 기능만 두고 봤을 때는 시체보다 사람이 쓸모없다. 시체가 더 뛰어나다.
“이건 무슨 경우인거냐!”
침묵을 깬 것은 공주다. 공주가 나에게 거칠게 소리친다.
“귀 따갑게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싸움이 났으면 구경한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리잖아? 나는 그 생리를 실천하고 있는데? 어때, 지극히 인간적이지?”
단두대에서 사람 머리가 떨어지는 것도 오락이라고 즐기는 것이 사람이다. 패싸움을 즐기는 것 정도는, 얌전한 취미다. 왕좌는 마침 좋은 자리가 비어 있어서 앉은 거고.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나!”
“응, 그래서 도와줬잖아.”
“아직 일이 안 끝났잖아요!”
저건 또 무슨 개소리야? 저 공주님은 내가 영웅처럼 나서서 모든 걸 해결해주길 빈 건가? 그러면 그 착각을 정정해줄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맺은 계약은 그렇게 엄청난 내용이 아니었다.
“길을 뚫어 달라 했다. 그래서 길을 뚫어줬다. 그러면 내 일은 끝 아니야?”
공주의 내용은 길을 뚫어달라는 것이었고, 나는 충실하게 부탁을 들어줬다. 공주는 길을 뚫을 동안 생겨나는 피의 값을 자기가 감당하겠다고 했지.
우리의 계약 관계는 알현실에 들어오는 순간 끝났다. 아주 성공적으로 종료된 좋은 계약이었다.
“원하는 자료가 있던 거 아니었나?”
“맞아, 난 자료만 얻으면 돼. 누가 이기든 상관없어. 거기, 흰색 옷. 내가 필요한 자료가 있어서 그런데, 저기 공주를 죽인다면 넘겨줄 수 있어?”
“왕의 비밀 서재라도 몽땅 넘겨주겠소.”
“봐, 그렇다는데? 내가 너에게 붙을 이유가 완전히 사라졌잖아. 나는 이기는 쪽에 붙으면 그만이라는 말씀.”
나는 의자에 더욱 편안하게 몸을 묻는다. 이것만 떼어가서 내 전용 의자로 삼고 싶다. 그 정도의 편안함이다.
뿌드득. 공주가 이를 간다. 갈린 이빨을 퉤하고 뱉어낸다. 말 그대로 이가 갈릴 정도로 이를 갈고 있다.
이를 가나 칼을 가나 달라지는 것은 없다. 가는 것만으로 화가 풀린다면 마음껏 갈아라. 나한테 겨눌 거라면 목숨을 걸고.
“우선, 무슨 일인지 들어볼까?”
느긋하게, 내가 입을 뗀다. 난 아쉬울 것 하나 없다. 이 자리에 도착한 이상, 입을 열게 할 수단과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후환? 내가 언제 그런 거 신경 썼다고. 뭣하면 수도를 폭파하고 몸을 숨기면 된다. 마침 내가 이곳에 왔다는 걸 증명할 증인도 모두 여기 있다. 여길 날려버리면 증거 인멸 완료.
완전 범죄가 이뤄진다.
“얼마 전, 사제들의 신성력이 모두 사라졌소. 이건 신이 왕국을 버렸다는 뜻이 틀림없소. 왕을 끌어내리고, 올바른 왕을 내세운다면 신께선 분명 신성력을 돌려주실 것이오.”
“헛소리. 다른 왕국, 심지어 수인뿐만 아니라 인간들도 신성력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다. 그럴 억지가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왕으로 보이는 수인이 일갈한다. 이미 수화한 상태인 왕의 머리카락이 갈기처럼 일렁인다.
“인류도, 수인도 모두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 바로 우리의 임무!”
흰옷 아저씨는 광기에 차 있다. 정확히 말하면, 광기에 찬 연기를 하고 있다. 연기를 해도 진짜 미친놈 눈은 못 속이지.
현명한 선택이다. 저러는 편이 광신도를 모으기 쉬웠을 것이다. 실제로 저 아저씨를 제외한 다른 흰옷들의 눈이 매섭다. 광기를 꾹꾹 눌러 담았다.
“애초에, 왕의 증표인 뇌인의 건틀렛조차 잃어버린 왕이 정당성을 논할 자격이 있는가!”
오, 흰옷 아저씨가 정치적 공격을 시작했다. 이건 뼈아프다. 정치 공격에 팩트 폭격을 섞었어. 치명타다.
그러나, 여기엔 내가 인정한 미친놈이 있었고, 미친놈은 내 기대 이상을 해주었다.
“아, 그거. 여기 있는데요?”
유상민이, 이 미친놈이 태연하게 아공간에서 건틀렛 하나를 꺼낸다. 건틀렛을 본 수인들의 눈이 달라진다.
“뇌, 뇌인의 건틀렛!”
“저게 어떻게!”
모두 아연한 눈으로 유상민의 손에 들린 건틀렛을 응시한다.
그러게, 저게 왜 저놈 손에 들려 있냐. 저걸 찾아주는 조건으로 공주의 도움을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저놈은 저걸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 아주 날로 먹을 생각이었다. 사기꾼이다.
분위기 못 잃기로는 따라올 자가 없는 유상민은 친절하게 질문에 대답도 해준다.
“한번 조사해보고 싶어서 찾았는데요?”
조사해보고 싶어서 찾았다. 조사관이라는 본업에 충실한 아주 이상적이 대답이다. 그런데 듣는 입장에선 그렇지 않았나보다.
“그렇게 조사대를 파견했었는데.......”
왕이 망연자실한다. 조사대가 못 찾은 걸 저놈이 저렇게 쉽게 찾아 들고 있다는 것 때문일까. 아니면 이미 누가 주워간 물건을 찾기 위해 조사대까지 꾸렸다는 허무함 때문일까.
나는 배꼽 잡고 웃는다. 인생은 멀리서 봐도 희극이고 가까이서 봐도 희극이다.
무슨 콩트 찍나? 기막힌 우연에 이런 생각이 다 든다.
그림을 보면 이런 거다. 권력 욕심 많은 교회 아저씨 하나가 적당한 명분을 찾아 궐기했다.
끝.
이 이상 심플할 수가 없다. 공주와 연락이 끊어진 직후 정국이 불안해졌다고 했으니 준비는 전부터 해왔겠고.
안타깝게도.
흰옷 아저씨는 끝났다. 종교적 명분이야 다시 쓰면 된다.
종교인들의 신앙심이 부족하여 신께서 신성력을 거둬가셨다, 라고. 대규모 종교인 사냥이 일어나겠구만.
마침 좋은 반례도 있고. 신앙심의 여부는 둘째 치고, 공주는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다. 바꿀 명분과 함께 내세울 수 있는 최고의 카드다.
문제인 건틀렛도 유상민이 들고 있다.
종교 집단에게 퇴로는 없다. 흥미로울 뻔했는데, 에라이.
결과가 정해진 싸움이다.
그러니까, 승자 쪽을 조금 도와주자.
“야, 공주. 너 신성력 쓸 수 있잖아.”
“?”
공주가 고개를 갸웃한다. 아이고, 무식해도 저렇게 무식할 수가. 하긴, 공주란 직함 달고 직접 몸으로 뛸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고위직은 몸으로 뛰는 게 아니란다. 이 무식한 년아.
“잠깐.......”
빠르게도 내 말이 뜻하는 바를 깨달은 흰옷 아저씨가 급하게 나선다. 수화까지 하며 나를 덮치려는 걸. 그냥 마력으로 찍어 누른다.
쥐새끼는 짜져 있어. 비유가 아니라 저 아저씨 진짜 쥐새끼다. 쥐의 수인.
“저 흰옷 사이비가 뭐라고 했었냐? 신이 우릴 버렸기에 종교인인 우리가 바로 잡겠다? 근데 넌 신성력을 쓸 수 있네?”
공주를 내세우면, 저놈이 내세운 명분 중 하나가 뿌리부터 붕괴한다.
왕과 그 측근은 바로 깨달은 얼굴을 한다. 그래도 왕은 감각이 좀 있네. 이것도 못 깨달으면 왕 때려치워야지.
마력의 압력에 저항하며 쥐새끼가 새어나오듯 외친다.
“우, 우리에게도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자가 있다......!”
아, 그러세요?
“양쪽 모두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자가 있다. 그렇다면 신께선 아직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되는군. 뇌인의 건틀렛도 돌아왔다. 자네는 단순한 역도가 되었다.”
왕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준다.
“쥐새끼. 다른 명분은 없냐?”
“이천 명의 정예가 왕궁으로 향하고 있다. 어차피 날 죽여도, 너희는 모두 죽는다.”
이천? 탐지 마법을 사용하니, 멀리서 이곳을 향하는 군대가 있다. 알현실 한쪽 벽에 구멍을 뚫고, 쥐새끼를 끌고 가 어깨동무한다.
“저기, 저쪽에 쥐새끼들 보이지?”
쥐새끼들은 물론, 쥐새끼가 말한 병사들이다.
“나는 쥐새끼를 싫어해. 그놈들이 보급 물자 갉아먹은 거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려서.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알아?”
전장에서 전염병으로 죽기 싫으면 쥐새끼가 파먹은 식량창고에 있는 식량은 전부 버려야 한다. 그래서 존나게 배곯았던 경험. 너한테는 없겠지.
“그래서 나는 쥐새끼를 싫어해.”
내 손에서 작열하는 화염이 날아가 진군하고 있는 병사들을 모조리 지워버린다. 남은 한 명의 쥐새끼가 표정을 잃어버린다.
“이제 쥐새끼가 하나 남았네?”
쥐새끼의 발아래로 누런 액체가 흐른다. 쌌구나. 더러운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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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