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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공주는 앙칼진 눈으로 우리 모두를 노려본다. 상당한 적개심이다. 공격해오지 않은 것은 칭찬해줄 만하다. 그랬으면, 즉시 머리를 날려버렸을 거거든.
“안심하십시오. 대한 길드에서 당신을 구하러 온 사람입니다.”
꼬맹이가 사람 좋게 나서서, 노예의 상징인 족쇄를 풀어준다. 공주는 족쇄 자국이 선명한 팔목을 쓰다듬으며 묻는다.
“어느 직책의 사람이지?”
“대한 길드의 팀장 중 하나인 최연호라고 합니다. 이래 보여도 나이는 마흔 가까이 되죠.”
나이가 마흔이라는 말에 공주가 살짝 놀란다.
“인간 중에는 나이와 겉모습이 맞지 않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는데, 당신같은 사람은 처음이다. 정말 마흔인가?”
“안타깝게도.......”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꼬맹이. 그 익살스러움은 확실히 아저씨의 그것이다. 면전에 대고 말하면 꼬맹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런데 공주님, 어쩌다 그런 꼴이 되셨는지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공주님이 죄인이 되신 덕분에 이쪽은 외교적으로 상당히 곤란해졌습니다.”
“무슨 소리, 먼저 무고한 수인을 잡아 노예로 부린 것은 너희들이지 않으냐!”
“무고? 기준을 잘 모르겠군요. 죄인 신분이 된 수인은 많지만, 그들은 모두 재판을 받아 죄를 인정한 자들밖에 없습니다.”
듣는 입장에서는 웃음이 나오는 대화다. 삼권분립이 무너지고 삼권일치라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등장했던 것이 숙청 전의 세종이다. 재판을 받아도 그게 정당한 재판은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꼬맹이도 봐라, 교묘하게 말을 돌렸다. 그들은 모두 재판을 받았다. ‘정당한’이라는 단어는 쏙 빼서 목구멍에 삼켜버렸다.
“나는 우리 수인들을 구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러다 갑자기 신성력이 사라지는 바람에....... 그래서 잡힌 것이다.”
분한 듯 공주가 주먹을 말아 쥔다.
“공주의 죄목은, 투기장에서의 난동이었다는데요. 노예 검투사 부리듯 죄인 검투사도 있거든요.”
옆에서 유상민이 첨언한다. 동족을 구하기 위해 적지에 침투했다가 되레 노예가 된 공주. 정의의 용사가 구해주었다면 로맨스 한 편 완성이다. 그런데 공주를 구한 건 미친놈과 정치가다.
공주의 앞날이 벌써 깜깜하다.
“그래서, 그 신성력은 다시 돌아오셨나?”
내가 말한다.
“물론이다, 신께선 나에게 큰일을 기대하고 계신다. 그렇기에 더 큰 힘이 돌아왔다.”
공주의 몸에서 은은한 신성력이 피어오른다. 그야 더 크겠지. 신이 힘을 빌려준 것이 아니라, 신의 영혼을 꿀꺽했으니까.
“조금만 더 신성력이 빠르게 돌아왔다면 자력으로 탈출할 수도 있었다.”
아, 그러세요. 그건 결과론이고 결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무식하게 개돌하다 노예가 된 결과.
공주 인생 망쳤네. 노예가 됐던 공주를 어디에 시집보내? 한순간의 만용으로 아주 인생을 말아 드셨다.
“아, 싱크, 싱크는 어디 있느냐?”
“그 보좌관 말입니까? 찾고는 있지만, 소식이 없군요.”
“그런가.”
공주는 풀이 죽은 얼굴이 된다. 자기 때문에 보좌관이 어쨌다며 자책이라고 하고 있겠지.
“일단 대한 길드로 돌아갑시다. 공주님이 구출됐다고 하면 보좌관은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음, 그러지.”
공주와 함께 대한 길드로 돌아왔다. 꼬맹이는 일이 있다며 돌아갔고, 나머지가 한 방에 밀어 넣어졌다.
“대략적인 사정은 저놈이 설명할 겁니다.”
꼬맹이는 나가며 그런 말을 남겼다. 즉, 공주를 잘 꼬드겨보라는 말이겠지. 내가 원하는 건 신에 관한 정보고, 수인의 신이 죽었다고 그 필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수인들의 자료를 볼 수 있다면 보는 게 좋다.
“당신을 구한 건 길드의 의지고, 개인의 입장으로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뭐냐?”
공주가 살짝 뾰족하게 대답한다. 한 시간 전까지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는 노예 신세였으니 그 태도는 이해한다만, 저건 너무 가볍군.
공주라는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공주님이다.
노예를 구하기 위한답시고 직접 뛰어든 것부터가 그렇다. 투기장, 싸움을 위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홀몸으로 가다니. 동화책의 공주님도 그것보다 낭만적이지는 않겠다.
머리에 뇌 대신 꽃이 들어차서 머리 쓰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 틀림없다.
정식 탄원서 한 장이면 수백 명이 풀려났을 것이다. 이런 희생 없이, 이 지랄 없이. 이 난리 없이.
저런 공주를 꼬드기려면 아주 귀찮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유상민이 꺼낸 말에 나는 편해졌다.
“당신들 나라의 상징, 뇌인의 건틀렛을 찾아드릴게요. 대신 그쪽에 있는 성서를 비롯한 신들에 관한 자료를 열람할 수 있게 해줘요.”
“뇌, 뇌인의 건틀렛을?!”
뇌인의 건틀렛, 뭔진 몰라도 대단한 물건인가보다.
“최근 신학을 연구하고 있어서요. 그런데 인류가 가진 자료로는 한계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도움을 달란 거예요. 대가로 제가 뇌인의 건틀렛을 찾아줄게요.”
“아니, 왕국의 건틀렛을 사라졌다는 건 어떻게...... 그보다 고작 그런 것으로 건틀렛을 찾아주겠다고?”
어지간히 대단한 물건인지 공주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도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눈을 굴리며 팔이 갈 곳 없이 허공을 휘휘 헤엄친다. 당황한 모습이다.
싱긋 웃으며, 유상민이 쐐기를 박는다.
“찾을 수 있어요, 확실히.”
와, 저 미친놈이 남자다운 미소도 지을 줄 아네. 그래도 내 눈에는 이렇게 보인다.
사기꾼의 미소.
***
대한 길드가 찾아서 데려온 보좌관이라는 놈은 나하고 구면이었다. 투기장에서 나한테 한 방에 깨진 놈 중 하나였다. 공주를 구하기 위해 신입 리그에 참여했다가, 나라는 횡액을 만나 변을 당하고 만 것이다.
코끼리의 수인이라고 했던가? 부처님과도 자웅을 겨룰 수 있어 보이는 큰 귀가 양쪽에 팔랑거리고 있다. 코끼리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게, 덩치도 크다. 키도 3미터는 된다.
코가 길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그건 이미 인간의 영역이 아니야.
“강자는 인정한다. 그대같이 강한 자가 건틀렛을 찾아준다고 했다면 틀림없겠지!”
와하하 웃는 보좌관.
보좌관은 만나자마자 쿨하게 나를 인정했다. 한 방에 깨졌으니 앙심이라도 품을 줄 알았는데, 대인배다.
“텔레포트의 준비는 어떻게 됐냐?”
보좌관과 함께 들어온 꼬맹이에게 묻는다. 보조관을 찾으면, 우리는 텔레포트를 이용해 철부지 하나가 공주로 있는 모랄쉰 왕국으로 이동하기로 되어 있다.
“공주가 실종되고 모랄쉰의 정국이 급격히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그저께, 모랄쉰으로 직접 이어진 텔레포트 마법진이 정지되었습니다.”
“뭐라고?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것이냐!”
공주가 벌떡 일어난다. 철부지인 주제에, 애국심은 나름 있나 보다. 음, 왕족이니 애국심이라기보다는 애가심(愛家心). 집안을 걱정하는 마음이라 해야겠다.
“불온해지기 시작했다는 것도 텔레포트 마법진이 정지하고 급하게 알아낸 것입니다. 일단 진정하시죠.”
공주는 앉지 않고 사방팔방 서성인다.
“방법, 다른 방법은 없느냐?”
“안타깝게도, 모랄쉰 수도로 이어지는 공간 좌표는 가지고 있지 않아서요. 모랄쉰의 옆도시, 말로로 가게 될 겁니다. 텔레포트 마법진은 두 시간 후면 준비됩니다.”
우수한 정치인답게, 꼬맹이는 화를 피하는 법을 알았다. 해야 하는 말만 하고 깔끔하게 퇴장해버렸다.
그리고 남은 것은 급격히 기분이 나빠진 공주가 바닥을 차기 시작한다.
두 시간 정도 저 짓을 보고 있어야 하는 건가. 심심풀이는 되겠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공주가 저러는 것도 나에게는 한낱 희극에 불과하다.
이 말을 한 것이 셰익스피어였던가? 역시, 대문호는 다르다. 인생의 밑바닥을 긁어 문학으로 토해냈어.
“라팔아 이리 온.”
라팔이 도도도 다가와 품에 안긴다. 흰색 프릴 달린 옷만 입던 얘가 요즘은 패션을 배웠는지 입는 옷도 다양해지고 있다. 오늘은 원피스차림이다. 여기에도 프릴이 달린 건 그냥 얘 취향인가?
라팔이를 안고 쓰다듬는다. 사랑을 불러 의자로 사용한다. 그런 나를 공주와 보좌관이 기막히다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서로 좋잖아. 그럼 땡 아냐?”
“그래도 어떻게 사람을 의자로......!”
“사랑아, 싫냐?”
“아니요, 좋아요. 좋습니다.”
본인이 좋다는데 어찌하리. 공주는 복잡한 시선을 사랑에게 보낸다. 그런다고 끄떡할 변태가 아니다. 사랑의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덤으로 음부도 조금씩 젖고 있다.
옷 너머로 꽃잎을 쓰다듬는다.
“히앙!”
터져 나오는 신음. 얘는 때와 장소를 가릴 줄 모른다. 그러니 변태다.
야릇한 신음에 공주와 보좌관이 깜짝 놀란다. 나는 양식 있는 교양인이다. 때와 장소는 가릴 줄 안다.
만지작만지작.
“으아아. 흐아. 흐아앙!”
사랑이가 녹아내린다. 나는 그냥 의자를 쓰다듬고 있다. 이건 그냥 의자다. 나는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양식 있는 교양인이므로, 이 이상은 없다.
공주의 시선이 싸늘해지고, 보좌관은 흥분과 흥미를 담아 내 의자에 시선을 고정한다. 그렇게 봐도 안 줄 거다. 이 의자는 내 거야.
유상민은... 고작 이런 일에 놀라면 얘가 미친놈 타이틀도 안 달았다.
두 시간 뒤 우리는 텔레포트를 통해 말로라는 도시로 이동했고, 쉬지 않고 모랄쉰의 수도로 향했다.
공주와 보좌관은 수화라는 기능을 사용해 동물에 가깝게 변화해 달렸다. 공주의 모습은 사자로 보였다.
텔레포트를 써도 되지만, 초면인 놈들에게 그렇게까지 해줄 의리는 없다. 내 패를 왜 보여줘?
몇 시간을 달려 모랄쉰의 왕성에 도착했다. 말보다 빠른 속도다.
공주는 조금 지친 모습이지만, 나머지는 멀쩡하다.
왕성이 멀리 보인다.
“왜 경계 태세를 하고 있지?”
보좌관이 말한다. 왕성에 떠도는 기류는, 정확히 기운이 심상치 않다. 살기와 혈기. 피와 죽음이 느껴진다.
공주와 보좌관의 걸음이 급해지고, 우리가 따른다. 성문 앞에서 공주와 보좌관은 병사에게 제지당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절대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설령 공주님이라도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난 이 나라의 공주다. 어서 비키지 못할까!”
공주가 지랄발광해도 병사는 요지부동이다. 정말 모범적인 군인이다. 융통성 없음이야말로 군인이 가져야 할 덕목이라. 저 병사는 사지를 향해 돌격 명령을 내려도 군말 없이 잘 따르리.
굳건한 모습이 사지가 아니라 용암으로 뛰어들라 해도 기쁘게 뛰어들겠다.
공주가 강행돌파를 시도하자 병사가 몸으로 막는다. 보좌관까지 끼어들려는 찰나. 내가 묻는다.
“꽤 급해 보이는데 도와줘?”
“도와다.......”
“미리 말해두는데, 내가 나서면 다 죽을 거야.”
내가 끼어들면 저놈들도 나에게 칼을 겨눌 테고, 그건 목숨에 대한 위협이다. 어떤 의미로든, 어떤 식으로든, 난 나에게 칼을 들이민 상대를 살려줄 생각이 없다. 살려 줄 땐 주더라도, 그 이상의 대가를 받은 뒤다.
공주가 대답을 망설인다.
“피 냄새, 그리고 여러 잡소리가 만드는 부산스러움. 들리지?”
내가 성안을 가리키며 말한다. 내 말대로, 안에서는 여러 소음이 겹치고 있다. 평화에서 나오는 소음은 아니다. 다급하고, 높게 째지는 소음들. 분란과 전란의 소음이다.
“여길 뚫더라도, 비슷한 명령을 받은 병사가 얼마나 더 나올지 모르지. 제압해도 시간이 걸릴 거고, 싸워 이기기도 힘들 거야. 안 그래?”
나는 은근히, 공주에게 묻는다.
“선택해.”
공주는 손톱을 깨물고 고뇌한다. 잔뜩 찡그리고 시선을 땅에 박는다.
어디까지나 선택하는 것은 공주다. 도움을 청하는 것은 공주. 집행하는 것은 나. 나는 공주 때문에 내 신념을 무너뜨릴 생각이 없다. 미리 경고도 했다.
공주의 선택에 따라오는 죽음은.
모두 공주의 것이다.
자, 선택해라.
공주가 시선을 들어 날 본다. 공주와 두 번째 만났을 때, 죄인의 족쇄를 차고 있을 때 봤던 그 눈빛이다.
“이 악질.”
“난 신념을 지킬 뿐이야.”
난 코웃음 친다. 독기에 찬 눈빛으로 날 봐서 뭘 하려고? 철부지의 생떼처럼 우스운 것도 없다. 아이의 생떼를 들어주는 것은 부모 정도, 세상에 동정을 구하지 말지언데, 하물며 나에게야.
신념이라 표현해도 좋고 광기라 표현해도 좋다. 말은 달라도 그것은 모두 나를 표현하는 말이며, 내가 나임을 세상에 나타내는 방식이다.
피와 살과 땀과 광기가 어린 신념을 고작 어린애 생떼에 접을까보냐.
“좋다, 길을 뚫어 다오.”
공주가 선택을 내린다. 공주가 선택을 내렸다.
“좋아.”
말과 함께.
경비병이 사라진다. 지성을 담고 있던 피륙은 비료로 돌아갔다.
멍한 공주와 보좌관을 보며 내가 말한다.
“안 들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