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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꼬맹이의 안내를 받아 걷는다. 꼬맹이는 말없이 정면만을 보고 있다. 쯧. 우리가 이렇게 서먹한 사이였냐? 그냥 내가 먼저 주제를 꺼낸다.
“그래서, 원하는 건 그년을 치우는 거지?”
“조용히, 아주 조용해지길 원합니다. 성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두 명의 성녀를 내세우는 것도 괜찮겠지만. 그 사람은 그걸 기대하기 힘든 년이라서요.”
대충 이해된다. 제정신인 년이라면 자길 성녀로 추켜세우라며 대한 길드에 오지 않는다. 나라면 사람이 많은 곳에서 무료 봉사라도 하며 서서히 명성을 높이고, 세종 쪽에서 접촉해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얌전한 이미지를 각인시키며 권력에 스며든다. 자살하든 남창을 불러 부대끼든 다른 건 그 후의 일이다. 힘이 있고, 권력이 있으면 웬만한 일은 무마할 수 있으니까.
대부분의 나쁜 놈들도 그렇게 생겨난다.
“얘, 꼬마야. 성녀의 역할을 나한테 넘겨주고, 너는 그냥 고아원으로 돌아가면 안 될까?”
우리가 그년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고, 나리를 발견한 그년이 우리와 인사를 하기도 전에 한 말이다.
얼굴은, 제법 반반하다. 얼굴마담이 추녀면 보기 안 좋다. 얼굴마담의 조건은 대충 갖추고 있는 셈이다.
꼬맹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자칭 성녀는 다가와 쪼그려 앉아 나리와 눈을 맞춘다.
“응, 그러지 않을래?”
미약한 살기. 살면서 처음 겪는 살기에 나리가 몸을 떨지만, 몸에서 나온 성스러운 기운이 바로 나리를 진정시킨다.
신성력을 스스로도 조절할 수 있는 나리지만, 대부분 저렇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신성력을 사용한다. 그 몸가짐과 마음가짐은 진짜 성녀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
결정적으로 어리다. 어리면 동정을 얻기 쉽다. 저만한 얼굴마담은 구하기 어렵지.
반면 저년은 어떠한가. 생초면인 얘한테 살기를 흘리며 협박까지 한다.
저런 걸 성녀로 내세웠다간, 나중에 대한 길드의 이미지가 땅에 떨어지겠다. 저년에게 권력을 쥐여주면 무슨 짓을 할지가 벌써 눈에 선하다.
있는 대로 비리를 저지르다, 뒷정리도 제대로 못 해서 들킨 다음, 탈탈 털려 교수형.
놀랍게도 중앙도시에서 봤던 단두대는 진짜 사용하는 단두대였다. 주로 극악범들을 처형할 때 쓴다. 저년은 십중팔구 단두대의 이슬이 될 것이다.
나리가 겁먹었다. 슬슬 나서야지. 내가 안 나서면 제자가 나서 저년을 갈아버릴 눈치고.
나리와 눈을 맞추고 살벌하게 웃으며 협박하는 년의 머리카락을 잡는다.
“이봐 창녀. 듣자 하니 과거에 물에 빠져 죽었다며?”
어디서 이런 정보까지 얻어오는지. 대한 길드의 정보력은 정말 무시무시하다.
내 정보를 되도록 숨긴다는 선택은 신의 한 수였다. 어설프게 누출했다면, 이놈들이 진짜 내 정체를 캐냈을지도 모른다.
4년차 소환자 진휘가 아닌, 두 번 소환된 남자 진휘의 정체를. 나의 이 세계 자체에 대한 의심은 여전하다.
두 번 소환된, 귀환자가 아닌 사람이 있다는 것이 알려졌을 때의 파장을 겪긴 싫다. 날 해부하려고 온갖 미친놈들이 다 달려들겠지.
허공에 어항을 만들어낸다. 순순한 마력을 물질로 변화하는 연금술은 무식한 마력을 소모하지만, 나에겐 알 바 없는 일이다.
그렇게 만든 어항에 자칭 성녀의 머리를 처넣는다.
어푸어푸어푸! 자칭 성녀가 벗어나려 몸부림치지만, 아무리 힘써도 내 힘을 넘어서진 못한다. 기절하기 직전까지 넣어다 뺀 자칭 성녀의 상태가 이상하다.
아무것도 없는 장소를 바라보며 발작하더니 구석으로 숨어 웅크린다. 내가 건드리자 간이 떨어질 정도로 놀라는 모습을 보인다.
진짜는 시작도 안 했는데, 고작 세수 한 번 시켜준 걸로 이런 반응이다.
“스승님,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죽었던 물건이나 물질에 트라우마를 보입니다.”
“그러냐? 난 잘 모르겠는데.”
죽음이 그렇게 무서운 건가? 난 잘 모르겠다. 모르모트 시절 하루에서 수십 번씩 산 채로 몸이 해부당하고 했는데도, 정작 내가 즐겨 쓰는 무기는 검이다.
그밖에 독이나 포션의 실험 대상도 많이 됐는데, 난 포션도 잘 마신다.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사냥을 접고 은거한 고수들도 상당하다는 것 같은데, 내 입장에서 보면 고작 트라우마 하나 가지고 뭘 그렇게 호들갑이냐고 말해주고 싶다.
내 인생의 삼분의 일은 트라우마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눈 뜨고 자기 심장이 뽑히는 걸 본 적 있어? 없으면 말을 마.
저 멍청한 성녀를 데리고 나리에게 세상살이를 조금 알려주려고 했는데, 다 틀어졌다. 나리는 제자 품에 안겨서 날 두려워하고 있다.
저럼 안 되지. 그 안의 영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상 나리랑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나는 구석에 있는 자칭 성녀를 강제로 끌어내 나리 앞에 앉힌다. 항아리를 들어 자칭 성녀의 볼에 비빈다. 어항 안의 물이 성녀의 눈가를 오간다.
“성녀 씨. 성녀 씨. 우리 자칭 성녀 씨.”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만약 성녀 대접을 못 받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요오?”
항아리를 자칭 성녀의 얼굴에 비비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항아리의 물을 손에 찍어, 자칭 성녀의 볼에 발라준다.
도망가려는 몸을 힘을 써 꽉 붙든다. 필사적으로 움직이려는 팔다리를 힘으로 고정한 상태다.
“으응? 어떻게 하려고 했어?”
이번에는 항아리의 물 얼마간을 그녀의 머리에 끼얹는다. 자칭 성녀는 팔로 몸을 감싼다. 새파란 입술이 벌어지고 이빨이 딱딱 부딪힌다. 마치 추운 사람처럼.
“나쁜 짓은 하지 않아요. 대답만 똑바로 하면 돼요. 대답만.”
“요, 용병을 고용해서.......”
“고용해서?”
찰박찰박. 난 손으로 어항에 있는 물의 표면을 건드린다. 자칭 성녀의 반응이 더욱 격해진다. 나는 그런 그녀가 가여워, 물에 젖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긴 머리카락을 길게 쓸어내리고, 축축이 젖은 손이 자칭 성녀의 등에 닿는다.
“고용해서?”
내가 다시 묻는다.
“고, 고아원을 불태워버리려고....... 근처에 있는 네크로맨서 꼬맹이를 척살 대상으로 만들어 죽이고.......”
그 밖에도 고아원의 여아들을 창녀로 팔아넘긴다, 저택의 물건을 압수해 자기 사치에 쓰겠다, 등의 개소리가 이어진다. 제자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고, 나리도 무표정한 눈으로 자칭 성녀를 내려다보고 있다.
배움이 없는 아이라 해도, 주워들은 것들은 있겠지.
자칭 성녀의 계획은 내가 봤을 때는 전부 약한 것들이었지만, 그래도 세간에서는 충분히 잔인하다고 일컬을 법한 것들이었다.
자신의 낡아 빠진 구시대적 계획을 모두 들은 나는 잘했다는 의미로 어항의 물을 자칭 성녀에게 끼얹는다. 자칭 성녀가 몸을 흔들어 물을 털어내려고 하지만, 개나 고양이도 아니고 그런 행동으로 물기가 가실 리가 없다.
급기야 자칭 성녀를 발작하더니, 거품 물고 졸도한다.
“어떠냐 제자야. 왕이 둘 있으면, 특히 그중 하나가 무식하고 독한 년이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
싸늘하게 제자가 긍정한다. 나리의 천진난만하던 얼굴이 감정 없이 평탄하여 무시무시하다.
“문제 있는 년인 건 확실히 알았으니, 이제 처우 문제인데. 애초에 우리에게 넘길 생각이었지?”
꼬맹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한다. 대한 길드에서 자체적으로 처리할 거라면, 이쪽에 통보하지도 않고 이년을 실종자로 만들어버리면 된다.
사람 하나를 지우는 것 정도는 간단하다. 그게 권력이란 놈이다.
“이쪽에서 가지고 있어도 큰 의미는 없으니까요.”
“거짓말.”
내가 말을 끊는다. 꼬맹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범인은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로 아주 찰나의 순간 그러했고, 곧바로 원래의 웃는 얼굴로 돌아온다.
내 눈에는 너무 큰 동요다.
“의미가 없어? 이 좋은 실험체를 가지고? 그건 아니지.”
자칭 성녀는 성녀는 아니지만, 써먹을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왜 이년하고 나리만이 신성력을 쓸 수 있는가? 나는 알지만 다른 사람은 모른다. 실험체로 써먹는 것이 기본. 쟁여뒀다가, 정치적 카드로 써먹어도 효과 직빵이다.
신성력이 사라진 지금 신성력의 수요는 엄청나다. 성녀가 둘이 아니라 백이 되어도 백 개의 파벌이 생길 정도. 이런 좋은 카드를 나한테 준다고? 권력놀음 좀 해본 놈들이?
“이쪽에 성녀가 있으니 다른 성녀도 넘긴다? 그것도 앞뒤 문맥이 안 맞아. 혼란이야 되겠지만, 그쪽에서 처리하고 이쪽에 사후 통보만 해줘도 충분한 사안이거든.”
사람의 호의에 이유가 없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호의가 정치와 관련되는 순간 그건 이유가 없을 수가 없다. 정치인에게 호의로 주는 선물은 뭐다?
뇌물이다.
그럼 중요한 건 이놈들이 왜 이걸 나한테 주냐는 거다. 크게 생각할 것도 없지.
내 능력. 개사기라는 말밖에 안 나오는 내 능력.
성녀를 대한 길드에서 죽였다고 해도 내가 그걸 믿을 리 없고, 성녀를 숨긴다는 것은 잠재적으로 나리와 적대할 의사가 있다는 잠재적인 표현이 된다.
이 자칭 성녀는, 대한 길드에서 나한테 주는 선물, 뇌물 같은 거다.
“그러니까, 뇌물 잘 받았다고 마현한테 전해줘라, 꼬맹아.”
“알겠습니다.”
꼬맹이와 내 대화에 따라오는 것은 라팔이 정도다. 나머지는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인지는 숙제다, 제자야.”
나는 자칭 성녀의 머리카락을 끌고 방을 나간다. 의식이 없는 자칭 성녀가 시체처럼 끌려온다.
***
성녀를 끌고 제자의 저택에 도착한 나는 바로 지하실로 들어간다. 저택 지하에는 몇 층이나 되는 지하 시설이 있다. 반역자가 만들어둔 것도 있고, 제자가 저택을 차지한 다음 증축한 부분도 있다.
그 증축한 부분은 대부분 제자의 실험실로 쓰인다. 네크로맨서만큼 실험실을 많이 쓰는 마법사도 없다. 사용하는 마법 대부분이 시체나 독을 사용하니, 그걸 보관한 장소부터 시작해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
대충 다듬어 굳힌 돌로 된 통로를 걷는다. 내 손 한쪽에는 여전히 자칭 성녀의 머리카락을 잡고 있다. 중간에 한 번 깨어나서 꽥꽥 시끄러웠기에 다시 기절시켰다.
그 뒤를 제자가 따라온다. 나머지는 위에 남겨 놨다. 제자와의 일 대 일 특별 교습이다.
“그런데 스승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뭐?”
“약초에 관해서입니다. 제 지식 속에 있는 약초와 재료들. 아무리 찾아도 시중에 그런 이름을 한 약초는 없었습니다.”
“응. 없어.”
“네에?”
제자의 머리에 때려 박은 것은 아갈리 네크로맨서의 마법서다. 나는 중간계의 마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다. 하물며 아갈리의 약초와 독초가 여기 있을 턱이 없다. 못 구하는 게 당연하다.
“못 구해. 약초에 관한 건 니가 직접 연구해라.”
내가 해줄 말은 그걸로 끝이다. 나도 못 구하는 판에 제자 놈 구해줄 게 어디 있어. 그리고 나는 크게 약초가 필요한 경지도 아니다. 약초가 필요한 이유는 약초의 성분이 필요하기 때문인데, 나는 그냥 연금술로 조합하면 된다.
제자의 연구실에 도착한다.
“스승님이 쓰실 일도 있을 것 같아서. 이 방은 그냥 스승님용으로 만들었습니다.”
잘했다는 의미에서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연구실을 둘러본다. 있을 건 다 있다. 특히, 구석에 있는 해부대가 마음에 든다.
곧장 해부대로가 자칭 성녀를 눕히고 팔다리를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한다.
“해부는 해봤냐?”
제자는 고개를 흔들어 부정한다.
“보통은 마취 후에 하지만, 피험체에게 반응을 얻을 때는 마취 없이 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 잘 봐둬라. 너도 앞으로 할 일이 많을 거니까.”
실험할 때도 많이 할 거고, 고문할 때도 많을 거다. 고문과 실험은 얼핏 비슷하다.
살다 보면 고문이 필요한 일이 정말 많다. 마음 같아서는 그만 좀 나오라고 하고 싶은데, 그래도 고문을 자원하는 사람이 좀 많아야지.
세상에 또라이 정말 많다.
자칭 성녀의 옷을 벗긴다. 알몸을 보고도 나는 냉정하다. 이건 실험용 샘플이다. 거룩한 지혜의 요람에 성욕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것들을 메모해라.”
내 엄숙한 말에 제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성녀의 영혼에 관한 실험, 1번. 샘플의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출혈이 생겼을 때 신성력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관한 실험.”
나는 메스를 들고 자칭 성녀의 배를 찢는다. 목 바로 아래서부터 배꼽 아래까지 일직선으로.
메스가 매끄럽게 지나가고 피가 철철 가죽이 벗겨진다. 피가 흐르며 안쪽의 장기가 드러난다.
고통에 자칭 성녀가 눈을 뜬다. 걱정 마라, 멘탈 케어 마법으로 쇼크사는 안 할 테니.
나는 주저 없이. 샘플의 심장에 메스를 꽂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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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초 후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