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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이틀 후, 반역자를 포함한 우리는 대한 길드를 향하고 있다. 반역자는 이틀 전과 달리 싫어하는 기색이 없다.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냐?”
“조금은 있었습니다.”
반역자는 담담히 웃으며 말한다. 그 웃음에는 새로운 생에 대한 애정이 가득하다.
이틀 내내 홈시어터가 마련된 방에서 영화만 봤는데? 생각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았지, 참.
가보면 알 일이다. 대한 길드에 도착하고, 우리와 마현, 꼬맹이가 있는 마현의 방에서 반역자가 처음 꺼낸 말이 이거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습니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내가 반역자를 보자 다른 사람의 심경도 비슷한 모양으로, 모두 반역자를 보고 있다. 오직 라팔만이 응응 고개를 끄덕인다. 묘하게 뿌듯해 보이는 것이 이건 네가 꾸민 짓이렷다.
“영화감독?”
마현이 묻는다.
“켈리포니아에는 어설프지만 헐리우드가 재건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오크가 켈리포니아에 가서 정착하려면 필요한 게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쪽은 우리에게 뭘 줄 거지?”
“지금 상황을 따져보면, 필요한 것은 무기 아닙니까? 공장지구가 거의 전멸했으니.”
마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터뜨린 것이 하나. 제자가 터뜨린 것이 하나. 확실히 지금 공장지구는 생산 정지 상태다. 도시의 생산 능력을 날려버리다니. 나도 큰일 했다.
“켈리포니아까지의 텔레포트, 그리고 신분 확인증서. 그거면 제가 모아왔던 무기를 모두 넘기겠습니다.”
이 말에 마현은 물론 꼬맹이도 놀란다. 마현이 되묻는다.
“그걸?”
“명공 하회탈이 만든, 지구의 전설을 흉내 내 만든 세 가지 검. 엑스칼리버, 쿠사나기의 검. 듀랜달.”
나중에 알아보니, 저 세 가지 모두 반신을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평가받는 검이라더라. 역시 반역자가 인생을 걸고 모은 무기는 그 급이 다르다.
반역자와 마현의 이야기가 끝나고, 내 차례가 된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제자의 영역을 인정해줄 테니, 공장지구를 다시 돌릴 수 있게 해 달라.
제자의 영역은 데스 필드 때문에 사람이 접근하지 못할 뿐이라 그것만 해결하면 바로 재가동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리, 성녀의 처우. 현재 발견된 유일한 신성력 사용자니 세종의 얼굴마담으로 세우고 싶단다.
난 거기에 조건을 딱 하나 내걸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선 네가 나리의 보디가드가 될 것.”
나리는 내 입장에서도 희귀한 샘플이다. 어쨌거나 내가 죽인 여신의 영혼을 가졌다. 나리가 죽으면 그 영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신의 말살이 목적인 나는 되도록 영혼의 처리법을 알 때까지 놔두고 싶다. 그렇게 보면 영혼을 다루는 법도 익혀야 하는군. 그 영혼을 어떻게든 해야할 거니까. 하아. 할 일이 계속 늘어.
협의를 마치고 대한 길드를 나선다.
“영화감독?”
“취미의 끝은 그 취미를 직업으로 갖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 질문에 반역자가 씨익 웃으며 답한다.
“글쎄. 취미가 직업이 되면 지옥이라던데.”
“그건 사람에 따라 다르겠죠.”
시답잖은 잡담을 하며 저택으로 돌아온다. 아직 봐야 할 영화를 보지 못했다.
***
나리가 성녀의 힘으로 공장지구를 덮고 있는 데스 필드를 정화하고, 공장지구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신성력이 사라진 지금 발견된 유일한 신성력 사용자. 8살 꼬마 숙녀는 성녀가 되어 추앙받기에 이른다.
공장지구를 포함한, 뒷세계의 떠오르는 거물 차재현, 나이 8살. 소속, 햇님 고아원.
신성력이 사라진 지금,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성녀 나리. 8살. 소속, 햇님 고아원.
프로필만 보면 웃기다 못해 황당할 지경이다. 무슨 고아원에 세종에서도 조심히 다뤄야 할 거물이 둘씩이나 있다.
그건 그거고. 나는 지금 세종 상공을 날고 있다. 저 멀리에는 몰려오는 몬스터의 대군이 보인다.
몬스터 웨이브라고, 마치 디펜스 게임처럼 명명한 이번 대군의 첫 번째 공격이다. 나는 제자의 부탁을 받고 여기 나와 있다.
-시범을 좀 보여주십시오.
내가 주입해준 지식으로 혼자서 꽤 높은 경지까지 오른 제자지만, 아무래도 벽에 막힌 듯하다. 예상했던 일이기도 하다. 제자의 경우 몸에 담은 마력도, 그 지식도, 모두 내가 반강제적으로 주입한 것이다.
적응만으로도 벅차할 놈이 세종의 정치에도 한 끗발 걸칠 정도로 실력을 키웠다는 것이 대단하다.
그런고로, 나는 제자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여기 나와 있다. 나중에 부려먹을 거니 지금은 잘해줘야지.
첫 번째 웨이브를 나 혼자 막겠다.
앞으로 올 공격을 대비해 최대한 피해를 줄이고 싶은 세종에서도, 대한 길드에서도 허락했다. 허락하지 않았어도 내 멋대로 했을 거지만.
“그러니까, 제자야. 잘 봐둬라.”
“네, 스승님.”
수만의 몬스터는 벌써 산을 타고 내려와 세종까지 돌진하고 있다. 세 시간 정도 후면 가까운 위성도시에 도착할 것이다.
나는 도시와 몬스터 사이에 사뿐히 착지한다.
마력 수준은 제자랑 비슷하게 맞출까. 그래야 제자가 보고 배우지.
마력을 제한한다고 내가 약할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무한한 마력이 내 가장 큰 무기이기도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극의에 달한 마법사.
그것도 모든 종류의 마법의 극의에 달한 마법사이며, 극한의 마력 제어 능력과 마법 발현 능력도 가지고 있다.
“네크로맨서의 재미는 수 싸움이지.”
시작은 미약하리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네크로맨서를 가장 잘 나타낸 말이 아닌가 싶다.
나도 그 말을 그대로 따를 생각이다.
암흑의 창 수십 발이 몬스터를 쓰러뜨린다. 창은 그대로 몬스터에게 스며들어, 죽은 몬스터를 언데드로 부활시킨다.
언데드가 된 몬스터는 주위 몬스터를 물어뜯고, 물어뜯긴 몬스터는 다시 언데드가 된다. 흡사 좀비 영화와 같다.
숫자는 빠르게 늘지만, 하급 언데드는 너무 약하다. 재생력도 약하고, 무엇보다 저런 대군에 휩쓸려서야 짓눌려 쥐포가 된다.
그럼 그 전에 써먹으면 될 뿐이다.
언데드 연쇄 폭발.
퍼퍼펑!
언데드가 폭발하고, 시체가 품고 있던 독이 전방을 뒤덮는다. 좀비의 부패는 아주 빠르고, 그 독은 은근히 강력하다. 보랏빛 연기가 자욱하지만, 몬스터의 대군이 멈출 기미는 없다.
무얼, 아직 시작도 안 한 것을.
암흑의 창을 계속해서 날리며 언데드가 된 놈들을 자폭시킨다. 감염은 서서히 퍼지고, 조금씩 몬스터 무리 내부에서 언데드의 비율이 높아진다.
원래부터 그럴듯한 대열이 없는 몬스터 무리였지만, 그 없던 대열마저 완전히 무너지고 몬스터가 제들끼리 뒤엉킨다.
앞이 무너지고 뒤에서 달려오니 앞 놈들은 뒤 놈들의 발에 채여 곤죽이 된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수만의 무리 중 수백이 넘어지고, 그 수백이 또 수백을 넘어뜨리니 재들끼리 피한다고 피해지는 규모가 아니다.
뒤엉키고 뒤채이며 우스꽝스럽게 몬스터가 땅을 구른다. 한편 짓밟혀 피와 내장이 낭자하니 마냥 웃을 광경만도 아니다.
그러나 모두 나에게는 즐거움을 주는 광경이니, 나는 사악한 마법사처럼 웃으며 다음 마법을 준비한다.
이 땅에는 죽은 사람이 참 많다. 그 뼈들은 아직 전부 썩지 않고 땅 아래 고이 모셔져 있다. 그 뼈들이 네크로맨서가 가장 편하게 쓸 수 있는 무기이며, 병사이다.
발로 거세게 땅을 구른다. 거대한 충격과 함께 내 발에서 뿜어진 마력이 대지를 타고 흘러가 넋 없는 뼛조각에 스민다.
떨그럭.
놋그릇이 떨어지는 그런 작은 소리를 시작으로, 해골이 맞물려 움직이는 딸그락 소리가 땅속에서 연달아 들려왔고, 해골 병사들이 흙에서 몸을 일으킨다.
저것들은 의사도 가지지 않은 단순한 하급 언데드다. 행동 방침은 극히 단순. 근처에 있는 생명을 무차별적으로 노린다.
해골 병사가 달리는 몬스터에게 들러붙어, 할퀴고 물어뜯는다. 동족에게 밟혀 죽어가는 몬스터도 그 대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몬스터의 진군은 멈추었고, 그들은 혼란에 빠져 언데드와 드잡이질한다.
나는 뒤에서 편하게 암흑의 창이나 계속 날리고 있다. 창에 맞은 몬스터는 어김없이 언데드가 되어 죽음을 감염시키는 존재가 된다.
내 마력이 닿는 한 해골 병사는 부서져도 부활한다. 단순한 언데드라 큰 마력이 필요치도 않다.
해골 병사를 유지하는 쥐꼬리만 한 마력과 암흑의 창을 날리는 마력만으로 나는 몬스터의 대군을 상대로 우세를 점하고 있다.
내가 마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몬스터가 날 공격하기도 했지만, 그것들도 암흑의 창 몇 방이면 언데드로 변해 몬스터 무리를 향해 돌격했다.
크아아아!
쉽군, 쉬워. 학살의 현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무리 뒤쪽에서 거대한 함성이 들린다. 대지를 쿵쿵 울리며 달려오는 녀석은, 덩치가 산만 한 곰탱이였다. 가죽이 고슴도치처럼 뾰족이 솟아 있다.
곰탱이는 앞을 가로막는 몬스터를 말 그대로 짓밟으며 달린다. 저놈이 이번 웨이브의 보스인가? 디펜스 종류의 게임이 생각나는 전개군.
그런 생각을 하며 손을 앞으로 뻗는다.
사자가 뿜는 사기(邪氣)와 언데드의 독기가 몬스터가 뒹구는 대기에 내려앉아 있다.
죽음과 사자를 다루며 망자를 조종하는 네크로맨서도 무서운 법이지만, 쌓아온 망자들을 내던지는 네크로맨서 또한 무섭다.
나는 거기에 자그마한 불씨를 던진다.
흑마법사들의 마법은 대게 화려하다는 인식이 있는데, 내가 익힌 흑마법과 네크로맨시에 한해서는 그게 맞다. 흑마법을 연구한다고 하면 돌아오는 것은 이단 판정 또는 척살령이다.
나 같으면 한이 맺혀서라도 공격 마법을 연구한다. 그렇게 탄생한 마법 중에는 자폭 마법도 상당하다. 억울해서 혼자 죽기 싫은 놈들, 또 심성이 베베 꼬인 놈들이 만든 대규모 폭발 마법.
이것도 그중 하나다.
전장에 뿌려진 사기와 시독을 일거에 폭발시키는 중급 네크로맨시 마법.
사기 폭파.
보라색 연기와 함께 폭발이 일어난다. 내부로 지향성을 가진 폭발이 그 안에 존재하던 몬스터와 언데드를 함께 날려버린다.
흩어지는 연기. 보라색 연기 안에서 상처 입은 곰탱이가 그르릉 운다. 맷집은 좋구나. 그러면 이건 어떠냐.
하늘로 손을 든다. 거대한 암흑의 창이 그 위에 출현한다.
네크로맨시 하급 마법. 암흑의 창. 사용 마력을 늘려 크기를 키운 것에 불과하다.
내가 창을 던지는 시늉을 하자. 창이 날아가 곰탱이 꿰고 땅에 박힌다. 곰탱이가 포효한다. 창을 몇 개 더 만들어 가죽 꼬치로 만드니, 침묵한다.
수만의 몬스터 대군이 30분 남짓 되는 시간에 피와 살이 분리되었다.
제자는 멍하니 내가 만든 참상을 바라보고 있다. 멍한 것은 제자만이 아니다. 몬스터의 대군에 맞서기 위해, 또는 수만의 몬스터에 혼자 맞서는 미친놈을 보기 위한 구경꾼도 몰려 있다. 얼핏 봐도 수만, 몬스터의 숫자보다 많다.
도시 쪽에서 환성이 터지고, 마법이 하늘로 쏘아진다. 펑펑펑. 폭죽이다.
이날 나는, 세종의 영웅이 되었다.
***
제자에게 스승된 도리로 시범을 한 번 보였다. 그리고 영웅이 되었다.
나보고 영웅이란다. 웃기고 자빠졌네. 내가 영웅이라고 불리는 세계라면 그 세계는 망하기 직전의 세계거나, 이미 망한 세계가 분명하다. 다른 착한 사람 자 제치고 나처럼 미친놈이 영웅노릇하는 세계라니. 상상만해도 끔찍하다.
나는 지금 반역자를 따라 반역자의 저택 지하에 와 있다. 내 좆집 둘, 그리고 꼬맹이와 마현도 함께다.
일전에 반역자가 말한 무기를 넘기기 위해서다. 무려 반신에게도 위협이 되는 무기라니 반신인 마현이 직접 왔다. 나는 그냥 따라왔다.
특수한 잠금장치가 걸려 있는 지하 2층은 무기고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장소이다.
“이거 모으는 데 몇 년 걸렸냐?”
“꼬박 10년 걸렸습니다.”
“대단한데요. 라프랄의 무기고, 소문만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감탄한 건 꼬맹이다. 내가 봐도 대단한 무기들이 벽에 걸려 있다. 내 수집품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것들이다. 내 수집품 대부분이 유서 깊은 왕가나 귀족가의 가보라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다.
그런 무기들 중에서도 특히 빛을 발하는 것이 세 개 있다.
반짝이는 황금의 검. 붉은 일본도. 검은 양손 대검.
모두 대단한 검이긴 한데, 내 눈에는 영 아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에겐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꼬맹이는 물론 마현까지 검에 눈을 빼앗긴다. 저것들은 검임에도 사람을 홀리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검사인 사랑이도 마찬가지. 라팔이는 늘 그렇듯 백치미 넘치는 모습으로 멍하니 계신다.
검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을 놔두고, 반역자가 나에게 묻는다.
“그러고 보니 무기는 쓰십니까? 쓰는 걸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
“나? 잘 안 쓰는데, 쓸 때는 이걸 쓰지.”
아공간에서 전백귀후십귀를 꺼낸다. 동시에 라팔을 제외한 모두가 나에게서 거리를 벌린다.
“뭐, 뭡니까. 그 검은!”
꼬맹이가 경악하고, 마현이 눈을 크게 뜬다.
“내 검.”
그렇게 대단한 물건은 아니다. 그냥 신을 토막 냈던, 아주 잘게 토막 냈던 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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