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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천지를 불사르는 열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왼팔을 포함한 상반신 일부가 사라진 나와, 심장을 포함한 왼쪽 가슴과 어깨 부분이 사라진 오크의 모습이 나타난다.
사라진 내 왼쪽 상반신이 빠르게 복구된다.
오크는 표정을 찡그리기만 할 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모습이 아니다. 상처는, 나와 같이 아물 듯이 재생되어 곧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역시, 일격은 무리였나. 여신 때는 일이 쉬웠다. 여신은 완전히 방심하고 있어 몸을 지키는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한 일은 무방비한 여신을 덮쳐 그 몸을 날려버린 것뿐이다.
저 오크는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의문을 가졌다. 의문은 경계로 이어지고, 경계하는 적을 공격하는 것과 방심하고 있는 적을 공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법이다.
여신 때와 다르게 뇌리에 꽂히는 손맛이 없었다. 대신 타격은 있다.
찡그린 표정, 빠르게 나아가는 상처. 일련의 반응으로 볼 때 내 공격이 아예 먹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데미지를 줄 수 있다. 그러면 죽일 수 있다.
나는 웃는다. 싸우면서, 특히 위험한 싸움에서 웃는 건 언제부턴가 몸에 익은 습관이다. 웃으면 상대가 꺼려 한다. 뭔가 숨겨진 한 수가 있을 거라 착각한다. 그리고 가끔, 정말로 나 자신이 즐거워지기도 한다.
“인간 어떻게 여기에 왔지? 아니, 그보다.......”
오크가 미간을 찌푸린다.
“넌 누구냐?”
그리고 처음으로 지성체다운 반응을 보인다. 날 바라보는 시선에는 혼란이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던 그런 느낌은 사라졌다.
죽일 놈과 섞을 말은 없다. 나는 바로 다음 공격으로 넘어간다. 핵폭발은 통한다. 그럼 일단 그걸로 밀어붙여야지.
수십 개의 핵탄두가 움직인다. 같은 탄두라도 분자 가속 속도에 따라 폭발할 때의 위력이 다르다. 저건 모두 압축 가능할 만큼 마력을 압축해놓은 상태다.
터져라.
소리는 없다. 망막이 타버릴 정도의 열기가 망막을 때린다.
아직이다. 그 폭발을 뚫고 오크가 내 앞까지 당도한다. 신 주제에 박투냐. 초월적인 그런 것을 기대했는데 조금은 실망이다, 라고 생각하니 그게 아니었다.
피하고자 뒤로 발을 빼는데, 땅을 딛기 전에 발이 구겨진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발이 뒤틀려버렸다. 그 사이 오크의 손이 내 복부를 헤집는다. 더럽게 아프다. 마력을 뿜어 오크를 뿌리치고 뒤로 물러난다.
뒤틀린 발은 순식간에 복구된다. 쯧. 전투를 시작하고 두 합을 나눠. 재생을 두 번 사용했다. 몸을 혹사할 느낌이 팍팍 든다.
그래도 싸울 수 있다는 사실에서 희망을 얻는다. 희망하곤 조금 다른가?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이면 만족한다. 누가 죽든 여기서 내 생명을 불태우리.
심장이 맥동한다. 펌프질에서 피와 마력이 뿜어진다.
“네 영혼은 너무 순수하다. 너는 대체 누구지? 또 어떻게 이곳에 들어온 거지?”
오크는 더욱 험해진 얼굴로 내게 묻는다.
오크의 말로 세 가지를 알았다.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전능하다면 여신이 나에게 죽었을 리가 없고, 전지하다면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를 리가 없다.
영혼이 순수하다. 그것은 다른 영혼과 섞이지 않았음을 뜻하겠지. 나는 영혼의 흡수를 최대한 꺼려왔다.
죽인 생명의 영혼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 죽인 놈들의 영혼과 그 밖에 내 부주의 때문에 몇몇 영혼을 흡수하긴 했지만, 그건 크게 내 영혼을 오염시키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영혼이 순수한 것이 저놈에게는 독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내 영혼이 순수하다는 것을 말로 언급할 필요가 없다.
내 영혼의 순수가 저놈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생각을 해보자. 생물을 죽이면, 그 생물의 영혼 일부를 흡수한다.
그 영혼들을 관리하는 신이 있다. 누군가 신을 죽이기 위해 그 앞에 섰을 때. 그 용자의 몸에 오크의 영혼이 있고, 엘프의 영혼이 있고, 수인의 영혼이 있다면?
어찌 됐든, 용자에게 좋은 상황은 아닐 것이다. 자기 안의 영혼에 신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대답할 생각이 없나? 됐다. 죽이고 알아낼 뿐.”
요약하면, 나는 신의 천적과 같은 존재다. 아주 잘된 일이다.
“한탕 신나게 설쳐볼까!”
오크가 날 덮친다. 동시에 내 머리를 우그러뜨리려는 압력이 느껴진다. 두 번은 안 당해준다.
압력을 마력으로 날려버리고, 오크의 주먹을 나도 주먹으로 응수한다.
뿌직. 내 주먹이 찌그러지며 살이 뭉개지고 뼈가 튀어나온다. 그러나 나는 버틴다. 무한한 마력이 끝없이 내 몸을 치료하고 강화한다.
불로불사의 육체에 육탄전은 무의미하다.
싸움은 이제 막 시작했다. 남아 있는 탄환을 놀려두면 탄환이 슬퍼한다.
수십 개의 핵탄두를 내 주변으로 불러들인다. 마력으로 내 몸을 보호하며, 그것들을 터뜨린다. 다시 열풍이 몰아치며 공기를 불태운다. 오크의 몸이 불에 타고 재생되길 반복한다. 그러다, 오크의 피부 위로 작은 막이 생겨 폭발을 막는다.
‘좋아. 좋아. 좋아.’
여신도 죽인 핵폭발이다. 영향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 그리고 오크가 몸에 두른 저것은 마력. 오크도 마력을 다룬다.
마력을 다루는 놈이 상대라면 난 지지 않는다.
계속 가볼까. 이번에는 방사능이다.
내 앞에 나타난 검은 공간에 손을 집어넣고, 다시 뽑는다. 내 손에는 전백귀후십귀가 들려 있다. 광검은 나오자마자 초록빛을 뿜으며 진동한다. 흙먼지 자욱한 황야에 전백귀후십귀가 광원이 된다.
“네 상대가 저기 있다. 날뛰어봐라.”
광검에서 방사능이 뿜어진다. 나를 공격하려던 오크의 손이 방사능에 사라진다. 오크는 당황한 표정으로 물러서 손을 재생시킨다.
또 하나를 알았다. 저 오크는 과학적 지식 또한 많지 않다. 신이라 전지전능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걸 기대했는데, 이렇게 되면 그냥 많이 강한 놈에 불과하다.
“다시 묻지. 너는 누구냐.”
거 참, 대답 안 할 거 알면서 또 묻냐. 그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대답해주마.
“다른 세계에서 날아온 너희들을 쳐죽일 처단자시다.”
“다른 세계. 그래, 그랬군.”
오크는 무언가 깨달은 얼굴로 혼자 주억인다. 내 말에서 무언가를 찾은 것 같다.
직후, 황야가 사라졌다. 아무것도 없는 검은 공간이 된다. 오크에게서 느껴지는 압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아까까지는 그냥 장난이었다는 거냐?
이거 진짜 죽을지도 모르겠다.
죽음이 세 발짝 앞까지 다가온 상황. 하지만 나는 웃는다. 죽을 각오는 이미 예전에 끝났다. 고통에도 익숙하다. 죽음은 이미 나와 친숙하니, 죽음이 나에게 오는 것이 내가 떨 이유는 되지 않는다.
오랜 친구가 찾아오는 것처럼 죽음을 조용히, 반갑게 맞이할 것이다.
싸움 뒤에 찾아오는 것은 친구처럼 편안한 죽음. 겁먹을 필요는 어디에도 없음이라.
핵탄두를 모두 집어넣는다. 좋은 무기라도, 너무 남발하는 것은 옳지 않다. 통하긴 하되, 결정적인 상처를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안 이상 핵의 사용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내 마력은 무한하지만 준비된 탄두는 무한하지 않다.
“여신은 네가 죽였나?”
“심장과 대가리를 한 번에 날려줬지.”
나는 낄낄 웃는다. 오크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지며, 동시에 날 경계한다. 그럴수록 내 자신감은 더욱 차오른다.
개미 한 마리는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 그러니 개미 한 마리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없다. 경계하는 사람도 없다. 오크가 경계한다는 것은 내가 오크를 죽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승산 없는 싸움이 아니다. 나는 끝임없이 저놈과 나 사이의 간격을 보고 있다. 죽일 수 있는가. 승산이 있는가.
첫 신과의 싸움이다. 아무리 조심하고 아무리 걱정해도 과하지 않다.
전황은 긍정적이다. 저놈과 나 사이의 간격은 멀지만 닿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고, 나와 죽음 사이의 간격만큼 저놈도 죽음과의 간격을 느끼고 있을 터.
결정적으로,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놈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이 나에게 다가와도 나는 태연하지만, 죽음이 저놈에게 다가가면 저놈은 두려워하고 당황하리라.
거기에 승기가 있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내 승리도 가까워진다.
***
죽음은 저 멀리 있었다. 싸우다 보니 그것은 다가왔다. 내가 다가간 건지, 죽음이 다가온 건지는 모르겠다. 어떤 때는 내가 다가갔고, 가끔 저쪽에서 다가왔다.
나는 죽음과 절묘하게 밀고 당겼다.
내 몸은 이미 하나의 마력이 되어 있었다. 마력으로 된 몸으로 오크의 공격을 막아낸다. 오크가 사용하는 무기는 크게 세 가지.
자신의 몸.
마력.
그리고 알지 못할 힘.
몸은 내가 봤던 그 어떤 물질보다 단단하다.
다루는 마력의 양은 내가 죽인 고룡, 포루시안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저 정도의 마력이면 마법을 쓸 필요도 없이 마력 자체가 하나의 치명적인 비수다.
알지 못하는 힘의 경우, 주로 공간에 간섭했다. 전투 중 수십 번. 어쩌면 수백 번이나 몸 일부가 잘리고, 짜부라지고, 사라졌다.
진명과 비슷한 힘. 마력으로는 감지되지 않는 힘으로 생각된다. 라팔이에게 진명 사용자 대응책을 들어둔 것이 다행이었다.
-현상만 보고 능력을 파악한 후에. 그 능력을 공략할 것.
공간이 날 죄이면, 마력으로 그걸 풀어버렸다. 적어도 저항은 가능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라팔이에게 안 들어뒀다면 큰일 날 뻔했다.
진명과 비슷한 힘은 공간조작 말고도 다양하게 활용되었는데, 나에게 공간 조작이 가장 유용하다는 것을 안 이후에는 거의 그것만 사용하고 있다.
내 주위 공간이 전부 소멸한다. 내 몸은 공간 사이에 던져진다. 사라진 공간을 딛고 오크가 도약한다.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공간 자체가 없다. 뒤틀린 좌표를 바로잡아 텔레포트를 쓰기 전에, 오크의 공격이 내 가슴을 때린다.
공격은 충격을 주는 것으로 그치지만, 대신 가슴이 아리다. 내 심장에 무언가가 있음을 눈치챈 후부터, 저놈은 내 심장만 주구장창 노리고 있다.
가슴에 대한 보답으로 전백귀후십귀로 오크의 다리 하나를 가져왔다. 저 망할 오크는 방사능에도 반응이 없다. 보통 생물은 죽어도 골백번을 죽었을 건데.
오크가 주먹으로 내 머리통을 찌그러뜨리고, 난 오크의 눈알을 깊이 찌른다.
한 차례 공방을 나누고 우리는 서로 물러난다. 깡통처럼 찌그러진 내 머리가 복구되고, 오크의 눈도 되돌아온다.
오크의 몸에는 재생하지 않은 자잘한 상처가 남아 있다. 그럴 여유가 없는 거겠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내 마력은 무한하다. 그러나 그걸 다루는 내 정신력은 무한하지 않다. 마력의 조작도, 마법의 행사도, 신체의 재생도 모두 정신적 피로를 동반한다.
싸움이 시작된 지 며칠이나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내 정신이 한계에 달했다.
오크의 우세로 시작한 싸움은 아직도 오크의 우세. 마력량은 내가 압도적이라 그걸 무기로 싸우고 있긴 한데, 단 한 번도 내가 우세를 점한 적이 없다.
이야, 이거 솔직히 포기하고 싶다.
똑같이 불사 속성에 싸움도 한쪽이 압도하지 못하면 결국 정신력 싸움인데, 정신력도 저놈이 더 강해 보여.
재생이 끝나고 싸움이 계속된다. 내 예상은 그대로 맞았다.
내 몸에서 상처가 늘고, 오크의 몸에도 상처가 는다.
치명상만을 치료하고, 자잘한 상처에선 피가 계속 흐른다. 오크의 몸에서도 녹색 피가 흘러 떨어진다.
사지는 멀쩡하지만, 몸에는 힘이 없다. 시야는 흐릿하다. 빌어먹을.
몇 번의 공방이 더 오간다. 옆으로 딛던 발에 힘이 풀리고 내가 쓰러진다. 오크의 주먹이 옆구리를 관통한다. 희미한 통증이 올라온다.
오크는 내 앞에 당당히 선다. 힘겨워하는 모습이지만, 아직 여유가 있어 보인다.
“너는 누구지? 어떻게 그런 힘을 얻었지?”
이세계로 소환되어 늙은이들 장난감으로 수천만 번 몸이 조각나는 통증을 맛보며 얻었다, 이 새끼야.
나는 그런 정직한 대답 대신. 오크의 얼굴에 침을 퉤 뱉어주었다.
“신이 혓바닥이 참 길어? 자기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그렇게 무섭냐?”
흠칫, 오크의 몸이 떨린다. 싸우면서 알아낸 것이다. 이놈의 공격은 너무 직선적이다.
빡대가리는 아닌 것 같지만, 그런 것치고는 대화할 때의 반응도 순진하다. 하는 말에도 조심성이 없고, 몸의 반응도 정직하다. 사회 경험이 없다.
이 검은 공간에서 홀로, 얼마인지 모를 시간 동안 다른 인격체와 부대끼지 않았다고 한다면 무리도 아니다.
“정보를 얻어 보려고? 지랄 마. 니깟 놈들에게 줄 정보는 내 똥이 굵다는 정보뿐이다.”
오크는 얼굴이 녹색으로 변해 흥분하더니, 바로 흥분을 가라앉히고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연다.
“그런가? 그러면 죽어라.”
공간의 비틀림이 느껴진다. 내 머리를 중심으로 한다. 흠, 이거. 내 머리를 통째로 소멸시키려는 생각이구먼.
“잘 가라.”
나는 씩 웃으며 오크에게 말한다. 내 웃음을 뭐라 해석했는지. 오크도 씩 웃는다.
공간이 비틀리며 내 머리를 잡아먹는다. 뇌를 포함한 내 머리가 소멸한다. 검게 물드는 사고의 끄트머리로 나는 광소한다.
나와 너는 선의의 대결을 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서로 라이벌인 것도 아니다. 나에게 오크는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죽여야 하는 불구대천의 원수다. 그런데 내가 왜 너 따위에게 선의의 웃음을 지어주겠니?
그 웃음은 라이벌끼리의 투쟁에서 나오는 만족의 미소 따위가 아니다. 좋은 싸움을 벌인 상대에 대한 선의의 미소는 더더욱 아니다.
내가 너에게 내리는, 사형 선고다.
말했잖아. 잘 가라고.
탕!
리볼버에서 날아간 총탄 한 방이 오크에게 꽂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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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거 꼭 써보고 싶었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날아가는 최후의 한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