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소환된 남자-61화 (6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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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던전은 또 다른 이세계다. 나는 라팔에게 묻는다. 라팔은 내가 이 세계 사정에 어둡다는 것을 안다. 뭘 물을 때는 얘가 제일 편하다.

“라팔아.”

“응.”

“던전 안에서 인간이나 이종족, 그러니까 오크나 이런 놈들 말고 다른 지성체가 발견된 적 있냐?”

“없어. 대신 유물이 발견돼.”

역시 라팔이. 내가 뭘 묻는지 정확하게 알고 대답을 돌려준다. 내가 물은 건 이 안에 문명이 있냐는 말이었고, 라팔이는 멸망한 문명의 잔재가 있다고 한다.

그걸 유물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했다. 유물을 만든 지성체가 살아 있다면 그건 유물이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유물?”

“유물, 그리고 유적.”

“던전 안에는 가끔 사람의 손이 닿은 구조물과 그들이 만든 물건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사람이라는 말은 지성체를 총칭하는 단어이다. 지구 사람을 지칭만을 지칭할 때는 주로 인류나 인간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것들은 완전한 미지의 문명인데, 운이 좋으면 새로운 기술의 단서나 특이한 아티팩트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반역자가 보충 설명한다. 정장을 입은. 지성적인. 오크.

내 안에서의 오크에 대한 이미지가 붕괴하려 한다. 반역자가 너무 유능해.

“유적에서 발굴된 아티팩트는 우리가 쓰는 기술과 형식이 전혀 달라. 그래서 귀중해. 비싸.”

라팔의 말까지 듣고, 내 안에서 하나의 가능성이 싹튼다. 이미 확신이라 해도 좋다.

튜토리얼이 있었던 자리에 던전이 생긴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짐작했어야 했거늘, 내 대가리가 빡대가리임을 인정해야겠다.

신이란 것들, 이 새끼들이 인류를 똥통에 처박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놈들이 인간과 똑같을 수는 없으니 인류라는 말은 틀렸구나.

그냥 인류와 비슷한, 문명을 이룩할 정도의 지성체라고 하자.

신 새끼들이 다른 차원의 지성체를 강간한 것은 과거에도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모조리 멸망시켰다. 그놈들을 데려다가 잘 키웠다면 던전에서 유물, 유적이 나올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 지성체가 있는 문명이 발견되어야 한다.

여태 발견되는 건 유물과 유적뿐이다.

짚이는 게 있다. 난 놈이 그러길. 자기가 죽기 전에 인류는 멸종 위기라고 했었다.

“라팔아.”

“응?”

“인류는 왜 망했냐?”

“소환 30년차. 인류의 생산 시설이 대부분 중간계로 소환돼. 그리고 지구의 기술을 재현할 정도로 기술도 발전. 공산품 대량 생산 설비 완성.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력. 무한의 에너지원.”

지구에서 소환된 공장들, 퇴보했던 기술의 되돌림. 그리고 마력.

마력, 모든 곳에 퍼져 있는, 천지 만물에 깃든 에너지. 마력은 써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형체가 변할 뿐이다.

그야말로 무한하다. 항상 자원 부족에 허덕이던 인간이 마력을 손에 얻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쉬이 상상이 가능하다.

“인류의 지나치게 빠른 발전 속도에 위기를 느낀 다른 종족들이 인류를 총공격했어. 아비규환의 대전쟁.”

“그래서 인류가 졌다고? 그 무기를 가지고? 핵은? 전투기는?”

“저쪽도 마력을 쓰는 대량 학살 병기는 있어. 결정적으로 드래곤이나 반신급의 숫자는 저쪽이 압도적으로 우위. 그놈들은 죽여도 안 죽어. 질긴 놈들.”

“그런 거라면야.”

총화기가 있고, 마력이 있다고 해도 그걸 뛰어넘는 괴물이 있으면 밀릴 수도 있지. 무기를 강화한다고 해도 새길 수 있는 마법진에는 한계가 있다.

무한한 에너지를 버티는 물질도 드물 거고. 왜 그렇게 잘 아냐고? 아갈리에서도 전쟁은 비슷했으니까. 오죽하면 최상급 아티팩트 하나 만들 시간에 재능 있는 아이를 기사로 키우는 게 빠르겠다는 말도 있었다.

인류가 망한 건 인류가 지나치게 수준 높은 문명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멸망에 신들은 끼어들지 않았다고 봐도 되나? 속단은 이르다. 뒤쪽에서 신이라는 것들이 손을 썼을지도 모른다.

유적, 유물에서 뭐가 나올지도 모르고. 던전이 이세계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으로 만족하자.

던전에 들어온 우리의 장비는 단출하다.

나, 맨몸.

라팔, 맨몸.

진짜 알몸으로 간다는 건 아니고, 짐 없이 몸만 달란 간다는 의미다. 그야 필요한 물건은 전부 아공간에 있으니 짐이 필요가 없다. 특히 내 아공간 쪽은 대단하다.

더해서.

채사랑, 작은 가방 하나.

반역자, 가방 하나.

사랑이는 가지고 있는 아공간의 크기가 작아 중요한 것만 넣어두는 편이고, 반역자의 경우 저 작은 가방이 공간 확장 가방이라는 특수한 가방이다. 참고로 억 소리 나게 비싸다.

여기서도(중간계) 저기서도(아갈리) 조기서도(지구) 시공간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다 보다.

몸이 가벼우니 속도도 빠르다. 사랑이도 4급 각성자고, 반역자도 4급 각성자다. 라팔이는 5급, 내 경우는 측정 불능.

5급까지가 인간의 기준이고, 5급 각성자가 계속 강해지면 자신이 생물이 아님을, 생물을 뛰어넘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 사람은 자신을 반신이라 지칭한다.

반신이라고 막 신이고 그런 게 아니라, 반신은 그냥 생물을 뛰어넘은 생물이다.

난 이 세계에 시스템적으로 받아들여진 존재도 아니고, 내가 생물을 뛰어 넘었다고 자각한 적도 없는데 신을 죽이고 반신과 동급이라는 고룡도 죽인다.

그러니까 난 측정불능. 규격 외의 괴물 되시겠다.

괴물과 강자들이 달리니 정말 쾌속하다. 가장 느린 반역자도 아갈리에서 말도 많이 타본 내 체감으로 말해보자면, 말보다도 2배 정도 빠르다. 그 속도를 유지하며 몇 시간을 달린다.

그리고 던전의 꽃하면 몬스터가 있겠는데, 그 몬스터에 관해서는 이렇다.

-고블린 무리입니다.

-맛있냐?

-고블린은 저희 같은 이종족입니다...... 저희 오크는 식인도 가리지 않습니다만.......

-그럼 그냥 죽여.

-팡팡, 푸슉, 화르륵!

-저건 뭐야?

-디그록입니다. 먹을 수 있는 고기입니다.

-잡아.

-펑, 푸슉!

이런 식이다. 몬스터와의 조우는 던전의 꽃일 진데, 괴물들 앞에서 꽃이 시들어버렸다. 꽃이 시들어 말라버리니 낭만은 눈곱만치도 없다.

우리가 괴물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파티라도, 생물에서 벗어난 건 아니었다. 나랑 라팔이는 생물에서도 반쯤 벗어나 있다만, 사랑이와 반역자가 그렇지 않았다.

밤이 오면 휴식이 필요하다. 모닥불 대신 반역자가 가져온 난로를 피우고, 그걸 표식삼아 텐트를 치고 캠프를 만든다.

“네 부족은 어디에 있는데?”

“저희 부족은 오크 중에서도 호전적이고 강인한 부족입니다. 3층어귀를 전전하고 있겠죠.”

우리가 던전하면 생각하는 이미지가 그렇듯, 중간계의 던전도 층층이 나뉘어 있다. 내려갈수록 몬스터가 강해지며 층마다 환경도 다르다.

던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노라면 아이들의 놀이가 떠오른다. 서로 달라 맞물리지 않는 것들을 억지로 이어 붙이고 통일성 없이 치덕치덕 색을 바르고 흙을 바르는 아이들의 놀이.

놀이 후에 남은 건 어른들의 한숨과 잔소리, 한 줌의 쓰레기들. 쓰레기가 있으면 치우는 누군가 치우긴 치워야 할 것인즉, 여태 그런 놈들이 없었기에 세상이 이 모양이렷다.

나는 지금, 여기에 운명을 느낀다. 싸놓고 치우지 않은 똥이 가득하고, 똥 싼 놈들은 꼭꼭 숨어 사람들은 이 똥이 누구 똥인지도 모르고 이게 똥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그런 똥통에 내가 강림하리니 똥과 똥이 아닌 것을 명확히 구분지으사 똥은 똥통에 되돌리고 똥을 싸재낀 똥쟁이들에게 합당한 벌을 주리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쓰레기나 치우고 살어리랏다.

그게 이 각설이의 운명이렷다.

나는 방금 세계에게 당위성을 부여받았다. 신이라는 새끼들을 쳐죽여도 좋다는 당위성을. 그 당위성의 권위는 나에게서 나왔지만, 내가 곧 세계니 신경 쓸 일이 못 된다.

사람의 시간은 바로가고 사람의 생각은 쌓아가는 것인데, 어째 내 신앙은 뒤로 가기만 한다. 자꾸 뒤로가 비어만 간다. 신앙이 비고 살의가 차오르니 내가 진정 이단이다.

밥을 먹고 잘 준비를 한다. 불침번은 필요 없고, 알람 마법도 필요 없다. 우리 모두 숙면하다가도 자그마한 기척에 일어나 전투태세를 갖출 수 있다. 그것도 1초 내외의 시간에.

내 경우 콤마 몇 초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보다 빠르다.

반역자의 자리에서 불빛이 새나온다.

“뭐냐?”

“아, 이거. 영화입니다.”

“영화?”

반역자는 태블릿 피시로 영화를 보고 있었다. 나도 본 적 있는 영화다. 제목이 외부자들이었던가.

“영화는 참 멋집니다. 1시간 30분에서 2시간 남짓한 시간으로 많은 걸 표현하고 있으니까요.”

반역자는 사랑스럽다는 듯 흘러가는 영화를 쓰다듬는다.

“사랑, 용기, 희망. 전쟁의 참혹함, 인간의 고귀함. 영화에는 모두 들어 있습니다. 비슷한 이유로 책도 좋지만, 전 역시 영화가 더 좋네요. 아무래도 번역은 한계가 있어서요.”

“같이 봐도 되냐?”

“얼마든지요.”

반역자가 자리를 비켜주고, 나도 옆에 앉는다. 아주 옛날에, 친구라고 부를 놈들과 이러지 않았던가. 희미한 기억이 스치운다. 그때는 인간인 친구고 지금은 이종족, 괴물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오크가 내 옆에 있다.

현대의 기술과 문화를 괴물과 즐긴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진한 여운이 남는다. 이 여운 또한 오랜만이며, 희미하다. 당시의 여운과는 아무래도 다르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지만 멀다. 손으로 잡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누가 손을 뻗어 나를 되돌리려 한들. 지금의 나는 지금의 나로 남겠지. 그게 내 선택이고 긍지이다.

“다른 것도 있냐?”

“잔뜩 있습니다. 더 보시겠습니까?”

희희낙락, 반역자가 즐거워 보인다. 함께 취미를 즐길 동지를 찾아서인가.

반역자가 능숙하게 태블릿 피시를 조작한다. 폴더에 들어 있는 영화가 한두 개가 아니다. 수백 편이나 된다.

“이걸 전부 봤냐?”

“전부 봤습니다. 취미가 이것밖에 없어서 말입니다. 그래도, 영화는 몇 번을 봐도 즐겁습니다.”

순수하게 웃는 얼굴은 신을 죽여 달라고 나에게 부탁하던 그 비장함은 없다. 인간이 그렇듯이, 오크도 그렇겠지.

하고 싶은 게 있고.

살고 싶은 이유가 있고.

그런데 반역자는 신이라는 지랄 맞은 놈의 변덕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한부 인생을 부여받았다. 그리하여 신을 죽이려는 자유의 화신이 탄생했다.

한 편의 영화를 더 보고, 반역자는 다음 편을 재생시킨다. 3부작짜리 시리즈물이다. 아는 사람은 아는 무쌍 영화. 이건 친절하게 한국어 자막이다. 외부자들도 자막 없이 봤었지.

“한글도 아냐?”

“영어도 할 줄 압니다. 그 두 개면 영화를 보는 데 무리는 없더군요.”

1부는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의 망가진 일상을 그리더니. 2부부터는 그 망가진 놈이 양손에 기관총들고 적군을 다 쏴 죽이고 있다. 몸에 박힌 총알을 마취도 없이 빼내는 마초 가이다.

1부의 그 우울하던 주인공은 어디 갔냐.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리즈 영화 중 하나입니다.”

“나라가 내게 해준 게 뭐냐고 따지던 주인공이 갑자기 적군 다 쏴 죽이는 이게?”

“원래 이 영화는 속편 제작 계획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패배하고, 기타 여러 요인이 겹쳐 만들어진 것이. PTSD에 시달리던 주인공이 난데없이 무쌍을 찍게 되는 이 영화입니다. 다양한 상황이 겹쳐서 만들어지는 것이 영화. 전 그래서 영화가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반역자는 덧붙였다.

“2편이 너무 인기 있어 더 과격하게 제작한 3편은 대차게 망했습니다만.”

갑자기 현실적이 이야기 하지 마라.

“이 영화는 여기서 끊고 다른 걸 봅시다.”

시리즈를 2편까지 본 반역자가 다른 영화를 찾는다.

“밤을 샐 생각이냐?”

영화 세 편에 여섯 시간. 취침 시간을 넉넉하게 잡긴 했어도. 한 편 더 보면 잘 시간이 없어진다.

“저희는 하루 정도 안 자도 괜찮지 않습니까. 부락을 찾는 동안은 되도록 자지 않고 영화를 볼 겁니다.”

반역자가 웃었다. 많이 보던 웃음이다. 마지막 전장에 나가는 사람, 병마에 죽어가는 사람, 죽어가는 자들과 자기 죽음을 알던 사람들이 짓던 웃음이다. 먼 곳에 있어 편하여 나른한 웃음.

“신을 죽일 수 있으면 최상. 실패하면, 확실히 죽지 않겠습니까? 그 전에,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영화는 실컷 보고 싶습니다.”

그랬다. 이번 일은 나도 그렇고 반역자에게도 그렇고.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 작품 후기 ============================

무식한 오크는 가라! 이제 오크도 지성이다!

p.s 반역자가 말한 영화는 람보 시리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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