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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언어로는 표현 불가능한 소리와 함께 초고온의 열풍이 모든 것을 녹이고 날려버린다. 뒤이어 쫓아오는 것은 핵폭발의 상징과 같은 그것이다.
“휘유.”
피어오르는 버섯구름을 보며 휘파람을 분다. 여러 각도에서 구경했지만, 핵폭발은 위에서, 대각선 위에서 보는 풍경이 최고다.
도시가, 문명이 증발하는 모습과 그 상징인 버섯구름을 한눈에 관람할 수 있다.
위력을 낮춘 것도 있고, 결계에 한 번 막혔던 것도 있어 그렇게 강하진 않아 도시가 반 정도 날아간 것으로 그쳤다.
목적은 이뤘다. 길드의 머리를 모두 잘랐고, 그들의 보좌도 몽땅 지웠다. 남은 건 어중이떠중이랑, 오늘 여기 오지 않았던 놈들 몇. 그놈들 가지고는 아무것도 안 된다.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싸우다 말아먹는 그림이 눈에 선하다. 밝혀진 비리가 너무 많아서 꼬리를 자르려 해도 자를 꼬리가 수십 개는 필요한 상황이거든.
꼬리를 잘라야 하는데, 꼬리가 수십 개가 안 된다. 잘릴 꼬리도, 꼬리를 자를 가위도, 모두 핵폭발과 함께 날아갔다.
남은 놈들은 살기 위해 책임을 서로 떠넘겨야겠지.
떨어진 장소에서 다시 폭발이 들린다. 공장지구 쪽이다. 저기도 성공한 모양이다.
빛과 그림자는 표리일체. 밝은 곳의 정치가 흔들리면 어두운 곳의 정치도 흔들린다. 밝은 놈들이 하기 힘든 일을 해주며 빌붙어 사는 놈들이 어두운 곳에 사는 놈들이니까.
태양이 넘어가면 그림자가 올라오듯, 빛이 변하는데 그림자가 가만있을 수는 없다.
반역자는 뒷세계에서도 거물이다. 반역자가 손을 써 여기처럼 거물들을 모았고, 거기서 또 빵!
도시 앞뒤의 무력과 권력이 사라졌고, 정치와 거래가 마비되었다.
음, 이거 사실 도시 기능 상실 아니야? 세종도 망하려나? 대한 길드에서 알아서 하라지. 이거 때문에 내 부탁에 차질이 생기지 않으면 좋겠는데. 그건 무리려나?
일의 시작부터 정리까지. 딱 6일 걸렸다. 반역자도 준비는 순조롭다고 한다. 내일은 던전으로 출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던전이라, 듣기로는 들었다. 나는 개미굴 같은 형태를 생각했는데, 그런 장소도 있고, 아예 천장이 없이 하늘이 보이고 해가 뜨는 던전도 있다고 한다.
던전은 정해진 입구로밖에 들어갈 수 없으며, 그 주변을 파헤쳐 봤자 던전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마치 던전만이 다른 차원과 분리된 것처럼 보인다. 그건 튜토리얼도 마찬가지. 2차, 3차 튜토리얼도 던전에서 진행되지만, 간섭할 수는 없다. 포인트 상점도 튜토리얼 전용 기능이었다.
쩝, 못 쓰고 온 포인트가 아깝다. 상점은 튜토리얼에서만 통하는 기능이라던데.
튜토리얼과 던전은 여러 가지가 비슷하다. 내 생각에 이것도 신이라는 놈들이 관계된 것 같다. 죽이다 보면, 한 마리는 입을 열겠지. 신에게도 고문이 통하면 좋겠다.
생각을 마친 나는 놀이방으로 돌아온다. 납치한 두 아이는 사흘 정도 데리고 있으며 여러 일을 동시에 진행할 생각이었는데, 두 놈 모두 상태가 영 아니라서 빨리 끝나버렸다.
이 놀이방은 나랑 라팔이 전용이 되어 있다. 사랑이는 게임에 별 흥미가 없어서.
라팔이랑 2인용 RPG를 한다. 둘 다 레벨은 40대. 난이도는 나이트메어. 우리 둘 다 방어구는 끼고 있지 않다. 떨어지는 돌 조각에 스쳐도 죽는다. 이 정도 난이도는 돼야, 우리 같은 초인들이 게임을 할 수 있다.
각성자를 위한 게임이 만들어지면 좋겠지만, 콘솔도 타이틀도 전부 지구에 있던 걸 주워서 쓸 뿐. 새로 만들 기술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미국은 반도체 생산 설비까지 있다던데. 언제 한 번 가봐야겠다.
반역자가 왔다. 저놈은 볼 때마다 정장이다. 그런 주제에 옆구리의 칼은 엄청난 그레이트 소드. 말도 반으로 가를 수 있겠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럼 갈까.”
엄밀히 말해, 난 대한 길드의 의뢰를 완전히 처리하지 않았다. 수뇌는 죽었어도 그들의 원념은 길드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발락 길드, 일곱 개의 보석 길드, 화랑 길드. 이들을 필두로 다양한 길드가 이합집산,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머리를 잃고 이념을 잃고 명분을 잃은 원념들의 정쟁이다. 원념으로 싸우며 잔념으로 스러져갈 것이다. 여기에 내가 관여할 요소는 전혀 없다.
내가 손댈 필요도 없이 모두 으스러지리라.
그러니까 제자야. 잘 주워 먹어야 한다.
우리는 던전으로 향한다.
***
차재현은 눈앞에 산적한 과제를 보며 속이 쓰라렸다. 사령왕의 육체는 너무 고성능이라 먹고 싸는 것까지 된다.
이것만큼은 보통 사람과 비슷하게 지내라는 스승의 배려였지만, 그럴 거면 섹스도 하게 해주던가. 매일 아침 서지 않는 아랫도리를 보는 심정은 참담하다. 심지어 성욕도 없다. 조만간 몸을 바꾸던지 해야지.
“오빠, 뭐해?”
“응, 스승님이 숙제를 내줬거든.”
“또?”
나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차재현은 나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리는 귀엽다. 그래서 항상 고아원의 사랑을 독차지했었다. 그만큼, 밖에서 노리는 소아성애자를 비롯한 변질자들도 많았고.
“가서 해골들이랑 놀고 있어.”
“응.”
아쉬운 얼굴을 하면서도 나리는 고아원 뒤쪽에 있는 운동장으로 갔다. 집 몇 채를 밀고 아이들이 놀기 좋은 크기로 개조한 운동장에는 해골들과 아이들이 어울려 뛰어놀고 있었다.
힘이 있다면 돈을 벌기는 그 무엇보다 쉽다. 이 세계는 그렇게 되어 있다. 차재현은 얼마간의 돈을 벌어 이 주변 토지를 전부 매수했다.
투기장 근처, 거친 사람들이 많은 장소인 데다 얼마 전 투기장이 망해버리는 바람에 땅값이 폭락해 싸게 샀다.
자잘한 작업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상위 언데드 하나로 모두 처리했다. 죽기 전의 지식도 있고, 스스로 사고도 가능하므로 이런 일에는 제격이었다.
앞으로도 할 일이 많다. 신흥 강자의 등장, 그 강자를 회유하려는 움직임과 일찌감치 치워두려는 움직임에 모두 대응해야 했다.
기껏해야 열넷, 신체나이로 치면 여덟 살에 불과한 차재현에게는 벅찬 일이었다.
그러나 차재현에게는 자신 있었다.
스승에게 배운 극의는, 그런 것이었다. 경험과 나이의 차이는 간단히 뛰어넘을 기술.
더 귀찮은 것은 따로 있었다. 어제 일어난 두 개의 대폭발, 사법 도시를 날려버린 그것과 공장지구 하나를 없애버린 그것.
거대 길드의 간부가 전부 죽었다.
뒷세계를 책임지는 거물들이 전부 죽었다.
후자의 소식은 뒷세계에 발을 걸치고 있는 사람들만이 아는 일이었다. 불과 얼마 전부터 발을 걸치기 시작한 차재현도 당연히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스승에게서 온 새로운 숙제도 귀에 들어왔다.
-뒷세계를 먹어라.
간단하게 말하는데, 어디 그게 쉬운 말입니까. 차재현은 알고 있다. 현재 자신의 수준이 낮지 않음을. 4급 각성자는 그만큼 희귀한 존재였다. 그렇다고 그게 한 도시의 뒷세계를 장악하는 일이 쉽다는 건 절대 아니었다.
수준과 실력은 다른 것이었고, 차재현의 경험은 일천했다.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도련님,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유환성, 일곱 개의 보석 길드의 이인자였던 유능한 부하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폭발에 가루가 된 것을 스승이 반납한답시고 가져와 고치는데 애 좀 먹었다.
그건 둘째 치고, 차재현 자신도 이 공백이 찬스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기능, 예리한 직감이 가르쳐주는 정보였다.
예리한 직감, 과거 지금의 세종만큼 친절하지 않던 세상에서 어린아이가 6년이나 살아남게 해준 능력이었다.
움직이긴 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그러면 얼마나 힘들어질지 알기에 하기 싫을 뿐이었다.
‘하자, 해야지 어쩌겠어.’
힘 있는 자는 돈을 번다.
힘 있는 자는 안락한 생활을 누린다.
동시에.
힘 있는 자는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
대한 길드의 마스터, 마현은 집무실에서 한숨을 삼키고 있었다. 앞에선 각종 권한을 위탁해준 길드의 마스터들이 떠들고 있었다.
삼권 분립이라 해도 그 삼권이 행정, 사법, 입법만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그밖에 위성 도시의 행정과 던전 관리 등등. 위탁해준 것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 모인 사람도 많았다.
마현은 자기가 웃는지 어떤지도 몰랐다. 주제도 없이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니 마음 같아서는 모두 닥치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지 않는 것은 순전히 자기에게 독재는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로지 독재, 오로지 독선으로 운영하다 망한 것이 과거의 세종이다. 이번 생에서도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다.
앞에서 하는 독재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뒤로 숨어드는 것. 뒤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는 흑막이었다. 대한 길드도 그걸 위해 만들어졌다.
세종의 기틀을 잡고 10년 넘게 그렇게 생활해 왔지만, 가끔 과거의 욱하는 성격이 나올 때가 있다. 특히 요즘 같이 정신 사나울 때다. 그의 가장 큰 무기인 선구안이 요즘은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미친 선구안이 시도 때도 없이 미래를 보여준다. 마현의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세종이 망했다 생겨났다 한다. 그 모습도 모두 다른데, 흑마법에 먹혀 세종이 언데드 소굴이 되는가 하면 처음 봤던 버섯구름도 있고, 그냥 미친놈 하나가 세종을 썰어버리는 그림도 나온다.
험한 꼴을 많이 봐 이런 일로 미친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미칠 지경이긴 했다. 밤잠도 곧잘 설쳤다.
그를 가장 미치게 하는 것은 이 모든 변화의 중심이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 한 사람의 심경이 변할 때마다 변하는 현실이라는 것이었다.
공장지구 하나와 사법 도시가 날아갔다고 처음 들었을 때는 혹시나 했지만, 지금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겨우 그 정도로 끝났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가만히 놔뒀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최연호 총괄 조사 팀장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고, 마현은 뒤늦게 후회했다.
이 무능한 것들을 죽이지 않고 설득할 방법도 골치 아팠고, 시도 때도 없이 보이는 미래도 골치 아팠고, 아무튼 마현은 골이 아팠다.
***
“여기가 던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반역자가 가리킨 곳은, 도시 중앙에 뚫려 있는 구멍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구멍 하나가 도시 중앙에 뻥 뚫려 있다. 여기 말고도 주변에 구멍이 두 개 더 있다.
“이게 던전?”
어디 동굴로 들어가거나 그런 게 아니라? 집중해서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기하긴 하다. 검은 물질로 막아둔 것 같다.
“여기는 구멍 형태입니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반역자가 뛰어내리고, 이어서 사랑이, 라팔이, 나 순서로 뛰어내린다.
아무것도 없는 검은 구멍을 지나다 어떤 막을 통과하는 느낌과 감각이 변한다. 눈으로는 태양과 하늘이, 흘러가는 구름이 보인다. 아래로는 펼쳐진 숲과 평야와 산이.
이게 던전? 이건 하나의 세상이다. 결정적으로 바깥과 이곳은 마력이 다르다. 질감이 다르고 형체가 다르고 내 피부에 닿아 스치는 공기가 품은 청량함이 다르다.
아갈리에서 마력을 느꼈고, 지구를 거쳐 중간계에 온 나이기에. 세 세계의 마력을 몸으로 느껴본 나이기에 알 수 있다. 마력에 누구보다 민감한 나이기에 알 수 있다.
던전은 잘 만든 다른 세계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아니다.
누군가가, 아마 신들이. 내가 쳐 죽여야 할 복수의 대상이자 인류의 원수인 그놈들이 다른 세계의 일부분을 이 세계에 연결시켰다. 그걸 특수한 입구와 연결해두었다.
그걸 던전이라고 부른다.
던전이란 중간계에 붙어있는 특이한 구조물이 아니다.
던전은, 중간계에 안에 있는 또 다른 이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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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히, 떡밥 받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