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소환된 남자-57화 (57/128)

0057 / 0128 ----------------------------------------------

세종

음, 조용해졌다. 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애새끼가 고분고분해지기까지 불과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세상 물정 잘 아는 애새끼에게 새로운 복음을 전해주었다.

한순간의 먼지밖에 되지 않는 인간의 무상함과 자기 애새끼의 분수에 맞는 처세술과 내 위대함을.

한 사람의 인생 계도에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나 좀 쩌는 듯.

애새끼는 하얗다 못해 검은 안색으로 벌벌 떨고 있다.

“왜 그렇게 심각해?”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용서해주세요.”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빈다.

난 그냥 물은 건데, 처방이 조금 과했나? 그래도 애새끼는 이거면 됐다. 여태 도취된 자아를 가지고 살았으니, 앞으로 소심하게 살면 균형이 딱 맞다.

뭐든지 균형이 중요한 법이다. 인생에서도 그래.

“방에 들어가면 니 친구가 하나 있을 거야. 친하게 지내야 한다?”

애새끼가 고개를 끄덕인다. 얼굴이 검은 것은....... 썬탠 좀 했다고 하자.

“아, 그리고. 우리 라팔이한테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지껄이면 알지?”

난 그냥 질문한 건데, 왜 그렇게 겁을 먹니. 대답만 하면 안 잡아먹는단다. 내가 원하는 대답이 나올 경우에만.

“대답 안 하냐?”

“네, 네네. 네네네. 안 건드릴게요. 절대 안 건드릴게요.”

“같이 놀아야 하는데 안 건드리면 안 되지. 개소리 짓거리지 말라고.”

“개소리 안 할게요. 절대로 안 할게요.”

“좋아, 들어가서 놀아.”

애새끼를 놀이방에 보내고 나는 다시 중앙 도시로 돌아온다. 무릇, 유괴를 했으면 성명서를 보내야 한다. 몸값을 필요하면 몸값이 얼마냐, 원하는 게 있으면 원하는 게 무어냐. 이걸 확실히 해둬야 의사소통에 혼선이 생기지 않는다.

난 순수하게 돈이 필요할 뿐인데, 저쪽에서 군대를 끌고 오면 안 되잖아. 그게 바로 소통의 부재요, 불행이다. 주로 날 공격한 놈들의 불행이었고.

아갈리에서는 소통이 안 돼서 정말 곤란했다. 귀족 자리를 버리고 몰래 빼돌린 재산만 토해내면 두 손 두 발 멀쩡히 살려서 여생을 마치게 해주겠다고 했는데, 다음날 군을 징집해 출병하더라.

그놈들은 모조리 세상 하직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건드리지만 않으면 얌전한 사람이다. 안전한 애완동물 같은 존재라고. 그런데 누가 자꾸 날 건드려.

내가 먼저 나서는 건 중간계에서 이게 처음인가? 그래도 넓게 보면 이것도 선빵은 아니다. 비리와 부정부패로 해먹은 놈들이 죗값을 치르는 의식에 가깝다. 해 먹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죽어도 가책이 안 느껴져. 원래 안 느꼈지만.

손을 더럽히다, 라는 표현은 선량한 사람을 죽였을 때나 맞는 표현이니, 피는 묻되, 내 손은 여전히 깨끗하다. 더러운 피로 칠해진 깨끗한 손이 된다.

나만 착한 놈인 척하는 것 같군. 나는 착한 놈도 나쁜 놈도 아닌데, 분류하자면 미친놈이지.

착한 것과 나쁜 것과 미친 것은 엄밀히 구분해야 한다. 몇 번이나 말했듯 언어는 의사소통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니까 나는 착한 놈도, 나쁜 놈도 아닌 미친놈이다. 그거면 돼.

도련님의 집에 도착했다.

도련님의 집은 혼란에 빠져있다. 어수선하고 부산하다. 자갈자갈 잡음이 많다. 담장을 검은 옷 입은 인간들이 쫘악 둘러싸고 있다.

나는 검은 옷 하나에게 편지를 전달한다.

“이걸 저 사람이 전해주라고 하던데요?”

걸어가던 사람을 아무나 가리킨다. 검은 옷의 인상이 대번에 험악해진다.

“표적이 나타난 것 같다. 당장 쫓겠다!”

거칠게 나에게서 편지를 빼앗은 검은 옷이 내가 지목한 행인을 향해 달려간다. 근처 다른 검은 옷들도 달린다. 다짜고짜 검은 옷들이 쫓아오자 행인은 도망간다. 그야 보통은 도망가지.

검은 옷인데, 검은 옷이니까.

난 유유히 현장을 벗어난다. 훈련이 덜 된 놈들이다. 날 먼저 증인으로 확보했어야지. 괜히 휘말린 행인에게는 명복을 빌어주자. 일단 편지에 그놈은 미끼라고 써놓긴 했다.

바로 다음 가자. 여긴 더 난리부르스다. 애새끼 아비가 주인으로 있는 아란 길드는 간단히 말해 조폭이다. 여긴 불법과 합법의 경계가 애매하다.

삼권 분립의 분립이 의미가 없고, 삼권이 합작해 땅따먹기에 바쁘다. 재판해도 사법부가 유죄 판결 안 내리면? 행정부가 장부를 조작하거나 숨기면?

불법도 합법이 되고, 합법도 불법이 된다. 마음껏 조폭놀음 해도 법적으로는 깨끗하다. 깨끗한 조폭이 탄생한다. 대단하군.

아란 길드는 조폭인데 사법부의 총애를 받는 조폭이다.

경찰도 아니고 조폭이 사법부와 결탁하다니 수완도 좋다. 경찰은 뭐하나 몰라, 그 경찰도 실은 행정부랑 짜고 치는 중이다. 사법부의 조폭 행정부의 경찰. 완벽한 포지션이다.

역시 조폭이라 그런가. 애새끼를 납치한 놀이터에는 문신한 형님들이 가득이다.

애새끼 집으로 찾아가야겠다. 놀이터 근처에 있는 애새끼 집은 빌딩이다. 빌딩 하나가 아란 길드 소유고, 꼭대기가 집이다. 꼭대기까지 가지는 귀찮으니까 그냥 빌딩 로비의 안내원에게 편지를 던져두고 나왔다.

빌딩 입구를 지켜보고 있으니 3분 정도 후에 빌딩 안에서 조폭 패거리가 우르르 뛰어나온다. 스마트한 빌딩에서 쌍팔년도 조폭이 나오고 있으니 해학 코미디를 보는 기분이다.

옆 동네 일곱 보석은 정장까지 빼 맞춰 입고 있던데, 얘들은 왜 이래? 돈이 없나?

반응을 보았으니 됐다.

다음 작업을 시작해볼까.

***

도련님과 라팔이는 즐겁게 놀고 있다. 오락기 화면에서는 도련님이 일반적으로 발리고 있지만, 그래도 즐거워 보이므로 내가 뭐라고 입을 뗄 일이 아니다.

애새끼는 혼자 우울하게 구석에 박혀 있다. 자업자득이기 그냥 놔둔다. 로봇 장난감 두 개 가지고 윙. 윙. 하고 있다. 정의의 로봇이 우울하게 서로 싸운다. 내부분열이군.

두 개의 정리가 갈라지면 진짜 정의는 누가 되나? 이긴 놈이 되고 문제고 진 놈이 돼도 문제다.

이긴 놈이 되면 이긴 놈이 정의라는 공식이 성립하고, 진 놈이 되면 정의라면 정의가 패배해버리는 결과가 된다. 어린이 만화에서 정의의 편은 모두 친하게 지내는 이유를 알겠다. 설령 싸워도 곧장 화해하고.

지들끼리 싸우면 정의가 분산되잖아. 정의가 여러 개인 어린이 만화. 얘들한테 보여줄 게 아니다. 어른들도 보면서 골머리 앓겠다.

라팔이 도련님에게 말을 건다. 계획 시작이다.

“네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

“응? 잘 몰라.”

“아이들을 잡아서 팔아.”

“인신매매?”

순수한 도련님이라도 그런 단어 정도는 알고 있나.

“마음에 안 드는 사람에게는 누명을 씌워서 재산을 강탈해. 법을 개정해서 돈을 뺏어.”

“우, 우리 아빠가?”

도련님이 입을 못 다문다. 애지중지 키우는 아들한테, 자기가 하는 더러운 짓을 말해주는 아버지가 어디 있어.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답이었다.

도련님은 자기 아빠가 어떤 인간인지 전혀 모른다.

그럼 이제, 요즘 세상이 어떤지 전혀 모르는 도련님에게 세상 물정을 알려주자.

내가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라팔의 말이 이어진다. 라팔의 시선은 화면에 고정되어 있다. 기계적으로 도련님의 캐릭터에게 콤보를 넣으며 무표정하고 덤덤하게 말한다.

“세금을 착복해. 내부고발자는 잔인하게 고문한 다음 죽여서 던전에 버려. 천 명의 사람을 살릴 수 있는데도, 돈이 든다는 이유로 버린 적도 있어.”

따지고 들면, 그렇게 심한 일들은 아니다. 비인간적이지만 효율에 따르고 있으며,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행동들이다.

일곱 개의 보석 길드의 비리 목록을 보면, 적어도 나처럼 미친 건 아니다. 효율적이고 욕심 많으며 의심 많으며 인정이 없고 신중할 뿐.

“아이들을 흑마법사의 실험 재료로 팔아. 또.......”

“저, 정말 우리 아빠가 그런 일을 해?”

오락기 속의 캐릭터는 3라운드 중 2라운드를 빼앗긴 데다 라팔의 가차 없는 공격에 너덜너덜하다. 도련님의 손은 멈춰 캐릭터가 움직이지 않는다. 라팔은 가만히 있는 캐릭터를 무정하게 공중으로 띄운다. 공중 콤보가 완벽하게 들어간다.

체력 바가 줄어들고 도련님의 캐릭터가 죽는다.

게임이 끝나고. 동전을 충전한 라팔이 다시 게임을 시작한다. 도련님은 어기적어기적 캐릭터를 고른다.

“또. 네 엄마를 죽였어.”

덜컥, 도련님의 손이 멈춘다. 가드가 풀린 캐릭터를 라팔이 다시 공략한다. 순살. 한 라운드가 끝난다.

“네 엄마는 고급 창녀. 창녀가 뭔지는 알아?”

“응.......”

대답에 힘이 없다.

“네 아빠가 네 엄마 단골. 그러다 네가 태어났어. 네 아빠는 엄마를 죽이고 너만 키웠어.”

그놈이 어쩌다 자기 아이를 낳은 여자를 죽였는지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아빠가 엄마를 죽였다는 사실 하나.

하나도 왜곡하지 않은 확실한 진실이며, 사실이다.

사실로 사람을 입 다물게 한다. 진실된 말이, 진실이 이렇게 무섭다. 전에는 진언(眞言)이라 했었는데, 라팔이가 꼬맹이한테 더 좋은 단어를 배워왔다.

팩트 폭력. 단어가 입에 쫙쫙 감긴다.

다라락. 도련님의 손이 기기 기판을 훑으며 떨어지는 소리다.

도련님의 넋이 나가 묻는다.

“아빠는 엄마에 대해 아무리 물어도 가르쳐주지 않았어. 집 안 사람들도.”

그야 안 가르쳐 주겠지. 집밖에 내돌리지도 않고 애지중지 키우는 아들 앞에서 내가 이 에미를 죽였다! 라고 고백하겠어? 보스가 그러니 부하들이 대답해줄 리도 없고.

“왜? 왜 죽였는데?”

“몰라. 죽인 건 확실해.”

“요정이잖아. 요정님도 몰라?”

라팔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요정? 저 외모를 보면 그런 착각도 하겠다.

“네 아빠는 죗값을 치를 거야.”

“아, 안 돼!”

“엄마를 죽였는데?”

도련님이 망설인다.

나는 구석에서 소리죽여 웃는다. 어이쿠야, 좋은 사람인 줄 알았던 아빠가 희대의 개새끼네? 그걸로 모자라 엄마까지 죽였네? 나는 엄마 얼굴도 못 봤는데!

팩트로 아주 얘를 후려갈긴다. 멘탈을 가루로 만들고 있어.

“친구랑 놀지도 못하고, 맨날 혼자 방에서. 전부 아빠 때문.”

“아, 아냐!”

“진짜?”

난 그냥 라팔이를 시켜 부추기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예상보다 효과가 더 좋다.

바깥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손님 오셨다.

라팔에게 신호를 보내자, 라팔이 도련님에게 말한다.

“그러면 네 아빠가 널 사랑하는지 확인해보자. 넌 유괴된 인질이야. 알았지?”

도련님이 고개를 끄덕인다. 좀 더 꼬드겨야 할 줄 알았는데, 바로 승낙한다. 라팔이를 요정이라고 믿어서 그런가. 나한테는 좋은 일이다.

“꼬마야, 이걸 써라.”

내가 다가가 도련님에게 종이봉투를 내어준다. 도련님이 숨구멍만 뚫려 있는 봉투는 뒤집어쓴다.

“나가자.”

놀이방 바깥은 폐공장인 채로 방치되어 있다. 폐공장 2층 난간으로 올라가자 아래에 사람이 보인다. 무리지어 왔군.

“나는 혼자 오라고 했을 텐데?”

“사장님의 전언이다! 한심하게 인질이나 되는 자식 같은 건 필요 없다!”

거짓말이다. 폐공장은 이미 포위되어 있다. 이놈도 아갈리 귀족들과 똑같은 분류였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놈들. 난 말로 끝내고 싶었는데, 왜 항상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걸까.

슬프다, 슬프기 그지없다. 흑흑.

저놈들 생각이야 뻔하다. 앞에서 시선을 끌고, 사방에서 덮쳐 폐공장을 한 번에 제압하려는 거겠지.

나한테는 뻔한 속임수지만, 방금 라팔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던 도련님에게는 아니다. 진짜로 아빠에게 버림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도련님이 흠칫 반응한다.

아, 안심해라. 도련님아. 저건 네 아빠가 보낸 놈들이 아니야. 그 애새끼의 아빠란 놈이 보낸 조폭이거든.

니 아빠가 여기 오는 건 내일이란다.

물론, 도련님에겐 안 가르쳐줄 거다.

============================ 작품 후기 ============================

네 아빠가 네 아빠가 아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