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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하, 이것들 진짜 미쳤네.”
“왜요?”
“자, 여기 봐라.”
보고 있던 종이를 사랑에게 넘겨준다. 길마, 마현이 부탁한 청부 목록이다. 마현이라는 이름은 종이에 적힌 사인으로 알았다. 종이에 적힌 명단을 본 사랑도 나와 같은 반응을 한다.
“이건.......”
“나도 볼래.”
마지막으로 종이를 본 라팔이 말한다.
“대청소?”
“그 말이 딱 맞네.”
발락, 화랑, 일곱 개의 보석. 명단에는 이런 이름들도 있다.
발락은 사법부, 화랑은 입법부, 일곱 개의 보석은 행정부의 업무를 대한 길드에서 위탁받아 행하고 있는 길드들이다.
이걸 싹 다 치우겠단다. 작정을 한 걸로 보인다.
일이 늘어서 나만 귀찮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고민하고 받을걸. 그래도 받았을 거 같긴 하다.
이 넓은 세계 다 돌면서 신을 찾아 죽이려면 그전에 내가 먼저 죽겠다. 지쳐 죽거나, 미쳐 돌거나.
미쳐 돌아 날뛰면 그건 이미 내가 아니니 죽은 것과 같다.
대한 길드에서 협력해주면 그 시간이 비교할 수 없이 줄어들겠지. 그러면 내 생존 확률도 높아지는 거고.
귀찮아도 살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자.
“가자.”
“어딜요?”
사랑이 묻는다.
“오크 잡으러.”
여기까지 한 달이 넘게 걸렸다. 드디어 강신술을 쓸 수 있는 오크를 찾았다. 찾았으니 안 만나볼 이유가 없다. 이왕이면, 강신술을 쓰게 한 다음 죽여 버리자.
그걸로 신을 죽일 수 있다면 최고고, 아니면 그냥 내 화풀이다. 강신술을 쓴다는 것만으로 죽이는 것은 조금 너무한가? 너무하긴 개뿔이.
한 다발 받은 종이에는 그 오크에 대한 정보도 있다. 철혈 클랜을 운영하고 있으며, 공업지구에서 불법 무기 생산, 매매가 주 수입원이란다.
당연히 본거지도 공업지구고.
목록이 많아서 귀찮다. 바로 처리해버리자.
***
공업지구는 지구의 공단과 흡사하다. 가건물이라고 해야 하나? 철판 떼기로 세운 건물이 많고, 연기가 올라오는 굴뚝도 있다.
오크의 거처는 안쪽에 있으므로 조금 구경하며 걷는다. 신기한 것들이 많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 실려 가는 몬스터 시체라니.
오크의 저택에 도착한다. 고급 저택인지 초인종까지 딸려 있다.
딩동, 초인종이 누른다.
-누구십니까?
“신을 죽이러 왔다고 전해.”
강신술을 할 수 있다면 아마 신과도 관계가 있을 거다. 독실한 신자라거나,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사제라거나 하겠지. 신성모독은 직빵일 거다.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두근두근 하는 차에, 저택 안에서 사람이 나온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고양이 귀를 단 수인 남자가 우릴 안내한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여기 사람들은 머리색이 참 다양하다. 앞에 남자도 금색과 갈색의 얼룩무늬다. 머리칼이 저러면 아래쪽에 나는 털은 무슨 색이 되는 거지?
아래쪽도 얼룩덜룩? 그걸 벗겨가면서까지 확인할 마음은 없으니 호기심은 호기심으로 놔두자. 남자 걸 봐서 뭐해. 벗길 거면 여자를 벗겨야지. 나중에 수인 여자를 벗길 기회가 있으면 그때 보자.
계속 남자를 따라간다. 평범한 손님 대접처럼 보인다. 함정일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겠다.
“라프랄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라프랄은 표적인 오크의 이름이다. 사제가 신성모독을 듣고 기다리고 있다고? 강신술만 사용할 줄 알고, 신을 모시지는 않는 건가?
모두 만나보면 알 일이다.
“어서 오십시오.”
정장을 차려입은 오크가 날 반긴다. 전형적인 모습의 오크가 저러고 있으니 괜히 멋있잖아. 특히 2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구에 떡대도 좋으니 그림이 산다. 싸우기도 전에 진 기분이다. 쳇, 나도 정장이나 맞출까.
내 감에 의하면 저건 가식이 아니라 진심이다. 저놈은 진심으로 우릴 환영하고 있다. 이건 무슨 경우지?
“앉으시죠. 차는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앉자, 오크가 직접 주전자에서 차를 따른다. 이미 따라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에 가산점을 주고 싶다.
“원하신다면 컵을 제 것과 바꿔드리겠습니다.”
가산점 1점 추가. 차는 물론이고, 찻잔에도 헛짓하지 않았다는 간접적인 어필이다. 반대로 진짜 독을 타고 저러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 경우에도 상대에게 독에 대한 경계심이 생긴다.
저 두 행동으로 상대는 무조건 독을 조심하게 되는 것이다.
내 감과 이 반응을 조합하면, 진짜 손님 대접을 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뭐 하자는 거야?
“신을 죽이러 오셨다고 하셨습니까?”
중후한, 지적이라고 느껴지는 목소리다. 얘 오크 맞아? 내가 생각하던 오크와는 너무 다르다. 서울에서 내가 쓸어버렸던 그 천 조각만 걸친 오크들과 같은 종족인지 의심이 든다. 진짜 오크 맞나?
“어, 그런데?”
얼떨떨하게 대답한다. 왜 기대하는 목소리인데, 너 강신술 쓸 줄 안다며.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 영어 공부 좀 열심히 해둘 걸.
“정말 신을 죽일 수 있습니까?”
그렇게 반짝거리는 눈으로 보지 마라. 사내새끼, 그것도 인간도 아닌 놈이 저러니 욕이 나오려 그런다.
이대로는 내가 말려들겠다. 화제를 바꾸자.
“너, 강신술 쓸 줄 안다며?”
“그렇습니다.”
“사제 아냐?”
“맞습니다.”
“그런데 신을 죽이고 싶다고?”
“죽이고 싶습니다.”
상상도 못 했던 대답이 나왔다. 함정을 준비한 것도, 사제가 아닌 것도 아니다. 신을 모시는 사제가 신을 죽이고 싶어 한다. 이거 하극상 맞지? 그것도 세계 최고의 하극상.
세상에, 신을 모시는 사제가 신을 죽이려 하고 있다.
“왜 신을 죽이려 하는데?”
“그 전에 묻겠습니다. 확실히 신을 죽일 수 있습니까?”
“그놈하고 만날 수만 있다면, 아마도?”
크게 고민하지 않았던 일이다. 내가 선빵을 쳤고, 큰 거로 한 방 먹여서 이뤄낸 일이지만, 일단 여신은 내가 죽였다. 그건 변치 않는 사실이다. 전례가 있으니 다른 신들도 싸우면 죽일 수 있을 거 같긴 하다. 질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다.
만약 지면? 내가 죽고 끝나는 일이다. 이건 복수전이다. 내 인생을 건 복수전. 내가 살면 이기는 거고 죽으면 끝이다. 그 이상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길 거라는 확신 또한 없다.
죽일 거라면 죽을 각오를 해라. 누구나 간단히 하는 말이지만 실천하는 사람은 잘 없지. 적어도 난 실천하고 있다.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말이지요?”
“대충 그렇지.”
“부탁드립니다. 저희 오크의 신을 죽여주십시오.”
오크가 나에게 고개를 숙인다. 좋아, 이놈을 반역자라고 부르자.
“고개 들어.”
반역자가 고개를 든다. 내가 반역자에게 손을 내민다.
“만날 수만 있다면, 내가 확실히 숨통을 끊어주지.”
“제 목숨을 걸고, 판을 마련하겠습니다.
반역자와 미친놈의 동맹이 성립했다. 반역자와 미친놈, 자신의 신을 죽이려는 반역자와 신을 죽이겠다는 미친놈. 재미있는 조합이다.
“신을 죽이는 건 내가 한다 치자. 그런데 넌 왜 신을 죽이려는 건데?”
분명 회귀자는 인간뿐이다. 이 반역자는 회귀도 하지 않았으면서 나사가 몇 개 빠져있다. 반역자를 처음 보고부터 동맹까지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건 이상하잖아?
“강신술이 뭔지 아십니까?”
“몰라.”
자기 몸에 신을 깃들이는 것. 이라는 설명 정도가 가능할 것 같은데, 그게 다라면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으니까 반역자가 반기를 든 거겠지.
“강신술은 스스로 할 수도 있지만,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무관하게?”
“신이 제 몸을 마음대로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제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싫습니다. 신이라는 미지의 존재가 제 몸을 마음대로 하게 둘 생각도 없습니다. 전 자유를 원합니다.”
반역자는 자유의 투사였다. 자기 신체의 자유를 찾아 투쟁하는 자유의 투사. 인권 운동이 활발하던 시대에 태어났다면 역사에 이름 남기는 오크가 되었을 텐데, 하필 사제로 태어나서 종족 반역자가 되었다.
“불시에 누군가 제 몸으로 들어와, 제 몸으로 말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 그럴지도 모르고, 심지어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생활을 하고 싶으십니까?”
“아니.”
절대 아니다. 내가 그런 처지라면, 날 그렇게 만든 놈을 찾아가 내가 죽든 그놈이 죽든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운다. 지금도 그러고 있지.
“싫어.”
“저도, 그건 좀.......”
내 좆집 둘도 같은 의견이다.
“그러니까, 저는 신을 죽이고 자유를 쟁취하고 말 겁니다.”
자유에 대한 열망이 엄청난 오크다. 이런 걸 돌연변이라 하나? 오크를 많이 만난 적이 없으니 난 잘 모르겠다. 라팔과 사랑이 반역자를 보는 시선을 보니 이 오크가 이상한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 반역자께서는 이런 곳에서 뭘 하고 계시나? 또 초면인 날 뭘 보고 그렇게 입을 나불거려?”
“공장을 운영하며, 암거래로 신을 죽일 무기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초면인 당신을 믿은 건 제가 가진 강자색적이라는 기능 때문입니다.”
“자기와 상대의 수준차이를 알려주는 능력.”
친절하게 라팔이 부가 설명까지 해준다. 기능은 스킬이라고 했겠다? 색적 스킬로 내가 강한 걸 알고 숙이고 들어왔다는 거군.
게임 같아 참 편리해. 그 편리를 나는 전혀 못 누리고 있고 말이야. 그지 같은.
궁금한 건 대충 해결됐다. 보아하니 반역자를 죽일 필요도 없어 보이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신을 죽일 무기를 만들고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신을 만날 방법은 이미 있다는 소리냐?”
“있습니다.”
호오? 그거 희소식이다. 이렇게 빨리 신과 만날 방법이 마련될 줄은 나도 몰랐다. 사실, 신이라는 것들은 상당히 만나기 쉬운 건가? 그러면 좋겠는데.
“어떻게 하는데?”
“세종 던전의 심층부에 있는 저희 부족의 제단이 필요합니다.”
“던전 심층?”
던전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는데, 던전에 들어간 본적이 없다. 던전인가. 예기치 않게 던전에 가게 되었다.
“그건 얼마나 걸리는데?”
“모르겠습니다. 떠돌이 부족이라.......”
“바로 준비하면 출발까지 얼마나 걸려?”
잠시 생각하던 반역자가 입을 연다.
“일주일 후에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준비해 놔.”
일주일이라. 대한 길드에서 부탁받은 일을 처리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치울 놈들 전부 치우고, 가벼운 마음으로 던전에 다녀오면 되겠다.
“그런데 정말 신을 죽일 수 있습니까?”
반역자가 나에게 묻는다. 궁금해하는 것도 당연하다. 무려 신이니까. 자유의 투사이며 의심이 많은지 적은지 구분이 안 되는 반역자를 위해 자그마한 서비스나 해줄까.
무한한 마력을 방출한다. 그리고 동시에 압축한다. 내 주위로 공간이 일그러져 보일 정도의 마력이 응축된다.
심장이 약한 사람은, 보는 것만으로 즉사할 정도의 질량이다.
“이 정도면 신한테 칼빵 한 번은 놓아줄 수 있지 않겠어?”
반역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얼굴은 겁에 질려 있지만, 한편으로는 황홀해 하고 있다. 자유의 투사가 발견한 자유의 가능성이다. 매료될 만도 하다.
공장지구에서 대한 길드의 내 방으로 돌아왔다. 손님방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 완전히 내방이다.
꼬맹이의 서명이 되어 있는 종이 다발이 탁자 위에 올라와 있다. 신을 만나는 방법과 강신술을 사용하는 오크를 조사한 내용이다.
신에 대한 내용은 크게 볼 게 없다. 한 달 만에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한 것도 아니다.
강신술을 쓰는 오크 쪽은 소식이 있다. 대한 길드에서 파악한, 세종 내부에 있는 강신술을 쓰는 오크는 둘. 하나는 오늘 만난 반역자고, 하나는 세종 아래 던전에 있는 부족의 한 오크란다.
던전 안에 있는 부족의 오크? 반역자는 던전 안을 떠도는 자기 부족의 제단이 필요하다고 했지.
이런 일이 우연일 리가 있나. 하나를 찾으니 하나가 따라오게 생겼다.
라팔이가 이럴 때 뭐라고 했더라?
개이득. 그래, 개이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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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더! 연참 개이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