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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불길에 쓰레기장의 쓰레기가 모두 타거나 녹아내린다. 그리고 남은 것은 우리와 제자, 그리고 납치범 중 하나다.
정신을 반쯤 놓은 납치범을 두드려 깨운다.
“너, 투기장 사람 맞지?”
“네, 네네.”
납치범은 눈이 풀려 있다.
“누가 시켰어?”
“오연진 간부 대리가.......”
“오연진 간부 대리?”
처음 듣는 이름이다. 대리라는 걸 보면 돼지의 부하인가? 누구든 상관없다. 투기장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만 보여주면 된다.
“너도 투기장 사람이지?”
“투기장의 암부.......”
“정식 명칭은 없고?”
“지문열 간부 직속.......”
그거면 됐다. 녹은 철과 땅의 흙으로 수레를 하나 만든다. 제자의 시체를 그 위에 싣고 납치범에게 명령한다.
“끌어. 사랑이 너도 옷 입고.”
납치범이 수레 손잡이를 잡고, 사랑은 아공간에서 옷을 꺼내 입는다. 아공간은 귀한 물건이라던데, 사랑이도 가지고 있다.
쓰레기장의 경계에는 얼음이 녹아 물이 흥건하다. 작열하는 운석은 빙벽조차 녹여버렸다.
“투기장으로 간다.”
납치범은 묵묵히 수레를 끈다. 아이를 시체를 싣고 나아가는 수레가 관심을 끌어 사람이 모인다.
투기장으로 들어가려니, 입구를 지키던 경비원이 막는다.
“그런 수레를 끌고 들어오실 수는 없습니다.”
내가 납치범에게 말한다.
“알아서 해.”
납치범이 무언가를 제시하자 경비원이 비켜선다. 수레는 그대로 나아간다.
“그 간부 대리라는 놈한테 안내해.”
수레꾼이 묵묵히 방향을 바꾼다. 놈은 이미 만사를 포기한 얼굴이다. 내 엄숙함에 사람들은 다가오지 않는다.
간부 대리라는 놈의 방을 박차고 들어간다. 말쑥한 남자 하나가 놀란 얼굴을 한다. 놈의 거시기를 찬다. 손맛이 있다. 둘 다 터졌다.
“투사들을 감시한 자료 다 있지? 어디 있어?”
거시기를 부여잡고 구르는 놈에게는 말이 없다. 등을 밟아 척추를 박살 낸다. 자근자근 밟고 마력을 섞어 치료할 수도 없도록 만든다. 이 일이 끝나면 어차피 죽을 놈이다. 이건 내 단순한 화풀이.
“어디 있냐고?”
나는 묻지만, 돌아오는 건 고통이다. 입은 언어가 아니라 고통을 말한다.
“말을 해 새끼야, 말을.”
등을 보이는 놈을 뒤집어 가슴을 퍽퍽 걷어찬다. 고작 이런 고통도 못 참아? 내 제자는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고 몸이 칼에 난도질되는 고통도 참았다. 참으며 내 질문에 대답까지 했다.
고통 경감 마법을 걸어주고 나서야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해졌다.
“선수들 도촬한 정보 어디 있어?”
“저, 저기.”
놈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날 본다. 자주 보는 장면이지만, 이런 장면을 볼 때마다 신기하다. 남에게 이런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놈이. 왜 막상 자기가 그런 처지가 되면 이런 표정을 할까.
나 같으면 나랑 동류를 만났다며 좋아하겠다. 취미 맞는 사람을 찾는 게 얼마나 힘든데.
놈이 지정한 금고에서 서류를 한가득 빼낸다. 선수들의 기술을 분석한 서류에 약점을 잡아 협박했던 기록도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찾자.
여기 있네, 감시 카메라. 금고 구석에 고이 모셔놨다.
“다시 가자. 이번엔 경기장이다.”
납치범이 끄는 수레가 다시 움직인다.
새벽에도 투기장에는 싸움이 계속된다. 관중들의 열기와 투사들의 정열을 뚫고 차가운 수레가 나타난다.
수레가 실은 시체도 차갑고, 내 표정도 차갑다.
관객들은 이것이 무슨 이벤트인줄 알았다가. 이 차가움에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누구의 경기냐?”
내가 묻는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심판에게 직접 묻는다.
“심판, 이 경기는 누구의 경기지?”
“벽력부와 섬전창의 경기... 인데요?”
금고에서 빼낸 종이를, 관객들의 앞에서 노골적으로 넘긴다. 벽력부와 섬전창, 둘 모두 기록이 있다.
“벽력부, 번개의 기운을 담은 일격이 특기군. 몸에 번개를 감고 돌진하는 기술을 숨기고 있어. 일주일에 한 번 자위를 하고, 보통 사흘 정도는 창녀를 데려와서 노나.”
커다란 도끼를 든 거한의 얼굴이 붉어진다. 안심해라. 너만 하는 게 아니니까.
“섬전창......”
이야, 이건 말하기 망설여지는데, 자위하는 거랑 창녀랑 노는 것 정도는 남자니까 이해할 만한데, 얘는 좀 심각하다. 이거 말하면 섬전창이 자살창이 될지도?
그래도 말할래. 자살창이든 후장창이든 알게 뭐야.
“한 합에 열두 번 찌르는 공격이 비기지만, 사실 스무 번까지 찌를 수 있군. 가끔 애인을 방에 데리고 와서 놀고 말이야. 그런데 그 애인이 남자네? 심지어 박히는 쪽이야.”
섬전창이 허망하게 주저앉는다. 비밀이 까발려지면 화내는 사람도 있고 포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얘는 포기하는 쪽이었나 보다.
갑자기 난입한 미친놈에게 관중은 반응하지 않는다. 반응하지 못한다, 가 맞는 말이겠지.
“내가 이 정보를 어디서 얻었을까? 궁금하지?”
벽력부가 고개를 끄덕인다. 한껏 흥분해서도 나에게 덤벼들지 않는다. 신중한 성격으로는 안 보이는데, 나와의 실력 차이를 깨달을 정도로 감이 좋은 건가?
준비해둔 감시 카메라, 그리고 모아왔던 종이를 뿌린다. 벽력부와 섬전창에게는 친히 그들의 사진이 담긴 종이를 건네준다. 각각 창녀와 노는 사진, 애인에게 박히는 사진이다.
고화질에 컬러 인쇄까지 되어 있어서 아주 적나라하다. 저런 게 뿌려지면 자살하고 싶어질 것 같다.
두 사람 모두 그렇게 머리가 나쁜 건 아닌지 사진이 어디서 어떻게 찍힌 건지 바로 깨닫는다.
그 구도, 어떻게 봐도 몰카다.
“판단은 알아서들 하라고.”
분란의 씨앗을 잔뜩 뿌리고 나는 쏙 빠진다. 아직 할 일이 많다. 수레를 끄는 납치범에게 명령한다.
“가자. 간부들 방 한 번씩 싹 돌아.”
제자의 시체를 실은 수레가 전진한다. 뒤쪽에서 분노에 찬 함성이 들려온다.
승부 조작이 있다는 소문은 나도 들었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소문. 진실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제 소문이 진실이 되었다. 남은 일은 하나뿐이다.
폭동.
맥동하기 시작한 폭동을 뒤로하고 나는 콧노래를 부른다.
날 건드려? 내 약점을 잡아? 심지어 내 제자를 죽여? 나는 딱 받은 만큼만 돌려줄 생각이다. 투기장만 죽으면 깔끔하게 정리된다.
하나 죽었으니 하나를 죽인다. 얼마나 깔끔해? 내 깔끔함을 함무라비도 찬탄할 거다.
간부들의 방을 차례차례 들린다.
“살려주오.”
“시끄러.”
욕심 많은 노인의 배를 가르고.
“돈을 원하나? 얼마든 주겠다.”
“나 돈 많아.”
돈 좋아하는 돈벌레의 두개골을 열고 금화를 한가득 부어주었다. 머리가 금화로 가득 차서 좋으시겠어.
“내,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주제 파악 못 하는 돼지 새끼.”
내 제자를 건드린 주범, 돼지 새끼도 처리했다. 꼼꼼히 손봐주느라 시간이 조금 지체됐다.
투기장 간부라는 것들을 정리한다. 자기 집무실에 없는 것들도 있었지만, 새벽이지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어차피 내일이면 다 죽을 거다.
간혹 날 방해하러, 또는 간부를 보호하러 오는 인간이 있지만, 숫자는 몇 없다. 바깥에 폭동이 한창이라 그렇겠지.
마지막은 투기장 주인의 방이다. 투기장이 누구 거랬지? 투견 길드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들었다.
여기도 길드, 저기도 길드, 이름만 길드고 하는 일은 기업이다. 이익 추구 집단이라는 점에서 둘 다 똑같구나.
길드 마스터의 방은 텅 비어 있다. 대신 방구석에 내가 원했던 물건, 시간을 감는 태엽이 있다.
태엽을 보관하던 유리 상자를 깨뜨리니 경보가 울린다. 나는 개의치 않는다. 경보가 울려도 올 사람이 없다.
“마스터는 지금 어디 있냐?”
“투기장 옆에 있는 집에, 아마도 있을 겁니다.”
멍한 얼굴로 수레꾼이 대답한다.
“거기로 가자.”
수레가 움직인다. 투기장을 나오니 불타는 투기장이 보인다. 거대한 불길이 투기장을 휘감고 있다. 투기장은 반쯤 불에 감싸여 있다.
때아닌 불장난에 사람들이 소란스럽다. 그중에서도 차가운 수레는 유독 눈에 띈다. 뜨거운 열기 속에 싸늘히 식은 제자의 온기는 차다.
수레가 투견의 두목을 찾는다. 개의 집치고는 지나치게 큰 저택이 날 기다리고 있다.
투기장의 소란을 이미 감지했는지. 저택의 경비는 삼엄하다.
“누구냐! 다치고 싶지 않으면 그 이상 접근하지 마라!”
“싫어.”
다짜고짜 공격이 날아온다. 검기를 막고 마력의 화살로 되돌려준다. 머리에 화살이 꽂힌 상대는 즉사한다. 바로 경비들의 공격이 이어진다.
경비라 해도 내 한 방을 버티는 사람도 없다. 게임으로 치명 평타인데 말이야. 왜 평타도 못 버티니.
“침입자가 누군가 했는데 상당히 쓸만.......”
“오래 살았으니 미련은 없지? 이제 뒤져.”
무언가 있어 보이는 노인네도 한방이다. 죽고 죽이는 싸움에서 한가하게 대화나 나누고 있다니. 마음씨 좋은 노인네거나 그냥 병신이다.
그밖에도 나타나는 잡몹을 해치우며 똥개들의 두목의 방에 도착했다.
아저씨 하나가 방 안의 물건을 챙기고 있다. 아저씨와 눈이 마주친다.
우선 선빵부터 날리자. 얼음의 창이 아저씨의 뺨을 꿰뚫는다. 이어서 손과 발을 관통하고, 무릎과 팔꿈치를 고정한다.
나는 아저씨에게 다가가 손을 흔든다.
“안녕? 우리 초면이다, 그렇지?”
“그, 그래. 초면이군.”
투견이라는 길드의 주인이긴 한지. 그래도 아프다고 날뛴다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적어도 똥개는 아니군.
“초면은 개뿔 새끼야. 너는 구면이잖아.”
뺨을 꿰고 있던 창을 비틀어 뽑는다. 사실, 창이 아니라 조금 두꺼운 못에 가깝다.
뽑은 창을 아저씨의 목구멍에 쑤신다. 신경을 다치지 않게 조심해서, 연약한 입안 살만을 도려낸다.
“관음증 취미 가진 변태 새끼가. 화면 너머로 많이 봤을 거 아냐? 초면은 무슨 초면이야.”
“구, 규건.......”
뺨의 상처 때문에 말이 날 안 나오나보다.
“난 친절한 사람이니까 적어도 니가 왜 죽는지는 알려 줄게. 사람을 건드릴 거면 상대를 봐가면서 건드려.”
나처럼 미친놈을 건드리니까 천수도 못 누리고 죽는다. 부하들이 한 거라고? 부하를 잘 뽑던가.
깔끔하게 목을 날린다. 화풀이는 벌써 다했고, 이건 후환을 없애는 작업이다.
주인 없는 저택을 나온다. 마법으로 불을 붙이자, 저택이 활활 탄다.
마지막으로 하나가 남았다.
“마지막 증인이 하나 남았네.”
수레꾼이 벌벌 떨기 시작한다. 오줌도 지린다. 왜 그래, 내가 죽일 것처럼.
자상하게 수레꾼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수레 잘 끄네? 앞으로는 수레나 끌면서 살아. 알았지?”
고개가 끊어질 정도로 끄덕인다.
“그리고 오늘 내가 뭘 했는지 소문도 좀 내고. 니들이 먼저 내 제자를 죽였고, 내가 한 건 전부 정당방위다. 그렇지?”
“저, 정당방위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수레 한 번 끌어라. 얘가 지내는 고아원, 어딘지 알아?”
수레꾼이 고개를 끄덕인다. 고객이 원하는 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니. 진짜로 수레꾼의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판타지판 김첨지인가.
“그리로 가자.”
고아원은 꽤 먼 거리에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싸늘한 수레를 보고 무슨 사연이 있는지 궁금해한다. 내일이면 다 알 수 있을 거니까 안달하지 마라.
“음산해.”
고아원의 모습을 보고 라팔이 말한다. 낡은 건물은 아닌데도, 고아원은 폐가처럼 음산하다.
“넌 이제 가라.”
수레꾼이 수레를 놓고 도망간다. 나는 제자의 시체에게 다가간다.
“뭘 하시게요?”
사랑이가 내 옆으로 다가온다. 안쓰러운 얼굴이다.
“왜? 불쌍하냐?”
“그치만, 주인님이라면 충분히 구해주실 수 있었잖아요.”
“그랬지.”
손끝하나 다치지 않게 구출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지 않은 이유는 별거 아니다. 제자가 죽는 편이 더 극적이고, 무엇보다 제자도 동의했다.
존나 아프면서 빠르게 강해지는 게 더 좋다고.
“내가 언제 제자를 버린다고 했냐?”
사랑이 무얼 말하냐는 얼굴로 날 본다. 제자의 시체는 내 앞에 있다. 생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시체다.
“죽었으면, 살리면 되잖아?”
내 몸에서 검은 마력이 뿜어진다. 존나 아픈 대신 빠르게 힘을 얻는 방법이 있다.
나는 마법사인데, 네크로맨서도 겸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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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냥 다 때려부수고 하면 쓸 때는 편합니다. 그런데 그러면 찾아올 매너리즘 때문에 다 때려부수는 전개만 계속 하는 건 조금 망설여 지게 되네요...
기승전결 중에 기승 부분도 지루하지 않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