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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저녁까지는 시간이 좀 남는다. 남은 시간은 투기장에서 보내기로 했다. 아갈리의 유물이 나오며 좀 옆으로 새긴 했어도, 원래 목적은 그거였다.
싸움은 좆밥 싸움이 재미있다고 투기장은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창칼 들고, 무기에 의존해서 싸웠을 때가 언제였나...... 하고 과거를 떠올리게 해준다. 내 심장에 있는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된 후부터 무기에 의존해본 적이 없다.
666번 우라늄 소드랑 전백귀후십귀는 그냥 취미 삼아 만들어 들고 다니는 거지 내 무기로 생각하고 들고 다니는 건 아니다.
싸움은 대체로 무기를 떨어뜨린 쪽, 또는 팔 하나가 잘린 쪽이 항복하며 끝났다. 간혹 사람이 죽는 그림도 나온다. 불의의 일격에 기습을 당하거나, 그냥 실력 차이가 너무 심하거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지성인? 피가 튀고 사람이 쓰러질 때마다 환성이 울린다. 오크나 수인뿐 아니라, 인간들도 확실히 열광한다.
지성인? 어디가? 유상민이 잘못 말한 게 아니라면 지성이라는 뜻이 내가 모르는 사이 변질된 것이 분명하다.
나야 뭐 원래부터 야만적인 인간이었다. 무력만능주의를 내세우는 사람한테 뭘 바라.
경기는 쉬지 않고 이어진다. 아까 배팅장에서 일정표를 봤는데, 24시간 전부 일정이 잡혀 있었다. 투기장이 장사는 잘되는 모양이다.
투기장을 나와 택시를 잡는다. 지구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디자인이라 중간계의 정체성에 조금 혼란이 온다. 판타지에서 만들 거면 판타지적 특색을 조금은 살려라.
세종은 하늘에서 봤을 때도 상당이 넓었으니 교통수단이 있는 것도 이해는 된다. 지구인이 만들었으니 지구의 교통수단과 닮는 것도. 잘 보니 오토바이도 다닌다. 모두 엔진은 마력이다. 차체 안에서 마력의 흐름이 느껴진다.
“서울에서는 이런 거 못 봤는데.”
“이런 것도 관리가 까다로워서요. 세종 정도 되니까 쓰지. 전투 중에 부서지기 쉬우니 사냥 갈 때도 잘 못 쓰고.”
모든 대답은 서울이 촌구석이라는 것으로 귀결되는 듯하다. 촌구석이라 사람도 없고 발전도 없고 심지어 교통도 부족하다. 서울이 촌 동네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택시를 타고 이동해 도시 중심으로 들어간다. 중앙도시(세종 중앙에 있는 가장 큰 도시를 이렇게 부른다. 다른 말로 세종을 칭하면 여길 칭하는 것이기도 하다.)로 들어가 중앙도시에서도 안쪽으로 향한다.
여긴 완전히 지구의 도심이다. 높은 건물. 반짝이는 네온사인에 놀고 있는 청춘들까지. 살짝 놀랐다. 아갈리에서 이고깽 놀이하던 나니까 알 수 있다. 이 정도 문명을 이룩하는 데 얼마만큼의 노력이 필요한지.
반대로 문명을 부수는 건 엄청 쉽다는 것도 배웠지만.
택시가 멈춘 곳은 빌딩이다. 셈도 치르지 않고 유상민이 내린다. 택시 기사가 말한다.
“돌아왔다 싶더니. 거물을 모셔왔구나.”
“거물요?”
유상민이 날 본다. 택시 기사가 고개를 젓는다. 그리곤 라팔을 눈짓한다.
“누군지도 모르고 데려온 거냐?”
“그런데요?”
떠올려보니 유상민은 택시 기사한테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다. 기사가 그냥 출발해서 여기까지 온 거다. 둘이 아는 사이였군.
“모르면 그것도 재밌겠지.”
우리가 내리자 택시가 떠난다. 나는 라팔에게 묻는다.
“아는 사람이냐?”
“기억 안 나.”
빌딩으로 들어온다.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 역시 현대적인 느낌이 물씬 난다. 엄청난 재현율이다.
계단을 통해 빌딩을 오르지 않고 지하로 들어간다.
“왜 지하냐?”
“낭만이라던데, 전 잘 모르겠는데요.”
지하 비밀기지라. 낭만이긴 한데 언제적 낭만이야. 요즘 10살짜리도 그거보다는 현실적이겠다.
복잡한 지하 통로를 거쳐 한 방으로 들어간다. 복도에 함정이 많다. 이 복잡함은 침입자 방지 대책도 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철통 보안이지만, 나한테는 깡통 보안이다. 발로 차면 찌그러질 정도로 약해.
“여기에요.”
유상민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식사가 이미 차려진 식탁이 보인다. 꿀꺽. 침이 넘어간다.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한 지 꽤 되었다. 서울을 떠나기 전 오지랖 아줌마 가게에서 먹은 게 마지막이었다.
전문 요리사들의 요리를 먹다가 다른 걸 먹으니 아무래도 뭐가 부족했단 말이야. 식탁을 보니 오늘 저녁은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겠다.
“왔으면 누군지 소개부터 해야지.”
목소리의 주인은 꼬마다. 식탁에 한자리 차지하고 있던 꼬마. 기껏해야 12살은 되었으려나. 꼬마라기엔 조금 클지도 모르지만, 사춘기도 안 온 나이로 보인다.
그러니까, 저 꼬마가 소개시켜준다던 사람? 살짝 놀랐지만, 회귀를 생각하면 이상하진 않다. 저 외모에 속은 40대 일지도 모른다.
“그러게요. 누구세요?”
유상민은 아직 내 이름도 모른다. 투기장 등록명이 휘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밖에 다른 것은 전무하다. 내 태도로 날 판단한 것 정도가 전부고 내 입에서 뭘 들려준 적은 없다.
“그러게, 누굴까.”
내가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런 거 나도 모른다. 이름을 말해? 진휘 말고도 내 이름 많다. 가명으로 쓰던 이름이 한 바구니나 있다. 투기장 등록도 휘라는 이름으로 했다. 그걸 빼고라도 난 내가 나인지 모르겠다.
지구에 있던 진휘와 아갈리에 있던 진휘는 같은 사람인가? 아갈리에 있던 진휘와 여기 있는 진휘는 같은 사람인가? 글쎄. 내가 고딩 시절의 내 앞에 서면 고딩 시절의 나는 날 못 알아본다.
어디 눈매 사나운 양아치가 있는 줄 알고 땅만 보고 걸어갈 거다. 고딩 시절 난 찐따였다.
그것뿐인가. 난 이 빌어먹을 시스템에게 지성체 취급도 못 받고 왕따 당하고 있다.
미친놈이란 걸 빼면,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누가 좀 시원하게 알려줬으면 싶다. 아, 그래도 미친놈이란 건 확실하구나.
“미친놈일걸. 아마도?”
“재미있는 대답이군요. 나는 대한 길드 총괄 조사 팀장. 최연호라고 합니다. 라팔님과는 구면이군요.”
어린 몸으로 근엄한 태도를 하는데도, 제법 몸에 잘 맞는다. 크게 어색하지가 않다. 저게 관록이라는 건가.
“응. 오랜만.”
라팔과 꼬마는 구면인 것 같다. 저 꼬마가 누군지 미리 말해주는 센스를 라팔에게 기대하면 과한 걸까.
“앉으시죠. 빨리 안 먹으면 식습니다.”
“이거, 요리 더 있냐?”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식탁에는 요리가 가득 올라와 있다. 가짓수가 많다고 양이 적지도 않다. 다양한 요리가 많이 있다. 푸짐하게 차린 한 상이다. 그래도 나한테는 부족하다.
“이거의 10배.”
그 정도는 먹어야 배가 찰 것 같다. 정확히는 내 식욕이 찰 것 같다. 너무 먹지 못해 욕구불만에 걸릴 지경이다.
“대식가시군요. 요리가 모자라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정 안 되면 내일 재료까지 쓰라고 하죠.”
“그거면 됐어.”
요리에 손을 가져간다. 전부 맛있어 보이긴 하는데, 내가 요리 재료엔 문외한이라는 점도 있고 해서 요리만 봐서는 재료가 짐작이 안 간다.
맛있어 보이니 먹는다. 이 이상의 이유는 필요 없다.
통 삽겹살 닮은 고기부터 한 입. 짭짤한 간장 맛이 입안에 번진다. 간장은 짜기만 한 것이 아니다. 향기롭다. 꽃향기인가? 한약재 향도 조금 난다. 달고 짜고 시다.
짠맛 후에는 바로 고기 본연의 맛이 온다. 고소한 지방의 맛과 진한 고기 자체의 맛. 지방이 조금 과할 정도로 많다. 그만큼 입 안이 풍성해진다. 과해질 수도 있는 느끼한 맛을 간장이 잡는다.
짠맛을 즐기면 밥반찬으로. 그렇지 않으면 그냥 먹어도 좋겠다. 밥도 준비되어 있으므로 난 밥과 함께 먹는다.
다음은 뭘 먹어볼까. 생선이 있다. 한중이가 해줬던 조기 양념구이와 비슷하다. 중식인가? 젓가락으로 찔러보니 그것도 아니다. 부드럽고, 안쪽은 노랗다. 노란 속살에 붉은 양념이 스며든다.
이건 뭐지? 흥미진진하다.
한 입 먹으니, 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묵직하게 씹힌다. 완자? 무언가의 살을 다져서 만든 것 같다. 맛은 생선과 흡사하다. 그런데 생선보다 더 씹는 맛이 있다.
입에 착착 달라붙는 생선! 이건 신세계다. 양념도 절묘하게 맵다. 이건 무조건 밥이군.
딱 두 개 맛봤는데 벌써 행복해지려고 그런다. 이건 진짜다. 이런 요리를 매일 먹여준다고 하면, 나 대한 길드에 취직할래.
“잘 드시는군요.”
“말 걸지 마. 하나만 더 먹고 얘기하자.”
세 개. 세 개는 먹어줘야지. 이 진수성찬을 두고 그것도 안 하면 그건 음식에 대한 모독이다.
마지막...... 마지막은 아니지만 뭘 먹어볼까.
찌개를 한 번 먹어보자. 맑은 찌개가 아까부터 바글바글 끓고 있다. 찌개가 두 개고, 앞접시도 두 개다. 앞접시는 국그릇을 닮았다. 하나에 하나씩이란 말이군.
건더기와 함께 찌개를 퍼 담는다. 건더기에 고기가 많다. 마음에 들어. 난 고기가 좋더라.
뽀얗고 맑은 국물을 건더기와 함께 먹는다. 크게 특출 난 맛은 없다. 대신 시원하다. 입에 살짝 남아 있던 두 음식의 맛이 깨끗하게 씻겨나간다. 뒤에 은은하게 육수 맛이 남는다. 고기 육수 특유의 그 맛이.
“됐다. 이제 말 걸어도 돼. 왜 보자고 했어?”
“거창한 이유는 없습니다. 저놈이 당신보고 특이하다는 말을 해서요. 저놈 본인도 어지간히 특이하다 보니. 사람보고 특이하다고 하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저는 멀쩡한데요.”
유상민이 퉁명스럽게 말한다. 니가 멀쩡하면 정신과는 세상에 필요가 없다. 세상 모든 사람이 정상인이 돼.
저놈 말은 그냥 무시하자.
“원하는 게 있는 건 아니다?”
“그렇습니다. 있다면, 저놈을 좀 잘 봐달라는 것 정도군요. 호기심에 위험한 짓을 많이 하는 놈이라서요.”
“안전했다고요. 전부 안전했어요.”
또 유상민이 투덜댄다.
“안전? 성공률 10퍼센트의 함정을 준비도 없이 해체하는 게 안전?”
“그건 감이 왔다니까요. 무조건 성공하는 거였다니까.”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 아버지와 아들 같다. 어린놈이 아버지고, 늙은놈이 자식이다. 뭔가 잘못됐어.
“이런 놈이니 잘 좀 부탁한다는 겁니다.”
“내 앞에서 죽을 것 같으면 살려는 줄게.”
“그거면 충분합니다.”
나는 식사를 계속한다. 몇 숟갈 먹지도 않고 밥이 떨어진다.
“밥 더 없어?”
“지금 사람을 부르죠.”
급사가 밥을 가져온다. 내가 급사에게 말한다.
“이걸로 안 돼. 밥솥을 가져와.”
“밥솥을요?”
“모자라.”
당황한 급사가 꼬마를 본다. 꼬마가 허락하자 급사가 다시 나가 밥솥을 들고 온다. 이것도 작다. 세 솥은 먹어야 식욕이 차려나.
내가 다시 숟가락을 들자 급사가 그 속도를 보고 놀란다.
“거기 있게. 음식 나를 일이 많을 것 같으니까.”
꼬마가 말한다. 졸지에 급사는 내 먹방을 구경하게 되었다.
음식이 맛있으니 접시가 금방금방 빈다. 급사만 바쁘게 되었다. 중간에 급사가 요리사 한 명이 탈진했다는 소식을 전해왔지만, 그런 걸로 멈출 내가 아니다. 반대로 없던 승부욕이 타오른다.
요리사를 다 쓰러뜨려 주겠다는 승부욕.
먹자. 먹고 죽자.
식사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더는 음식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죽어라 먹었다. 마지막에는 꼬마도 유상민도 놀라 입을 못 다물더라.
최후의 한 접시까지 먹었지만, 그 한 접시에 나오는 요리까지. 요리는 모두 완벽했다. 재료가 떨어진 것 같다.
쳇, 무승부인가.
승부는 무승부지만 심정적으로는 진 기분이다. 결국 쓰러뜨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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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연참이 필요한 타이밍인데.... 쓰는데 시간이 오래걸리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