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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계
“왜 이런 짓을 해?”
실망이와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라팔이 나에게 묻는다.
“그건 추궁이냐?”
라팔이 고개를 흔든다. 금빛 머리카락이 살랑인다.
“아니, 호기심. 이런 일 귀찮잖아.”
그럼 그렇지. 얘가 나에게 인간적인 무언가를 기대할 리가 없다. 일단 본인부터가 비인간적이다. 비인간적인 게 아니라 비인간이다. 인형이지.
“글쎄. 생각해본 적 없는데. 왤까?”
나도 궁금하다. 왤까? 중간계에 와서 유독 심해진 느낌이란 말이지.
“재미있어서?”
아니지. 재미는 당연히 있는 거고. 더 근본적인 이유인가. 이런 게 왜 재미있어졌더라. 꽤 예전부터 이런 걸 좋아했던 느낌이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모르모트 시절, 날 가지고 실험하던 마법사들을 이간질한 적도 있다.
마지막에 들켜서 실험 강도가 배로 높아졌지. 그때는 진짜 죽는 줄 알았다. 내가 희귀 표본이 아니었다면 죽어도 백번은 죽었을 거야.
결국, 그 무렵에는 벌써 싹이 보였다는 소리다. 미친놈의 싹이. 이걸 즐기기 시작한 건 아마 모르모트를 탈출하고, 본격적으로 아갈리에서 활동하기 시작하고 나서일 거다.
더 예전으로 생각하기에는 학창 시절은 너무 평범했다.
그런가. 여기에도 괴리감 관여하고 있나.
아갈리 사람과 나는 다르다는 근본적인 감각. 느낌. 생각. 사상.
거기서 나오는 괴리감.
아무리 노력해도 내 사고의 근원은 지구의 지식과 경험이다. 그게 모르모트 시절을 지내며 한 번 일그러졌고, 아갈리에서 생활하며 돌이킬 수 없어졌다.
나와 아갈리의 인간은 같아질 수 없다.
난 확인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갈리의 인간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그 확증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지만.’
과정이 어떠하든. 과거의 나는 사라지고 현재의 나만이 남았다. 이런 행위를 즐기는, 다른 뜻 없이 순전히 즐거워하는 나만이 존재한다.
내가 나쁜 놈이라는 게 변하는 건 아니다. 그냥 내가 이렇게 되먹었다. 나는 나쁜 놈이고, 미친놈일 뿐이다.
그렇다면 라팔이의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이렇게 되겠다.
“나란 인간이 이런 인간이니까.”
재미도 흥미도 떠난 더 근본적인 것. 내 자신이 이러니 어쩔 도리가 없다. 불만 있으면 날 죽이거나 봉인해라. 날 봉인하려면 전설의 용사가 필요할 거다.
라팔에게는 그거면 된 것 같다. 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울고 있는 실망이를 본다.
“난 뭘까?”
라팔이 문득 말한다. 나는 미쳤고, 얘는 미친 데다 기억상실까지 걸렸던가. 그래서 어울리지 않는 자아 성찰이나 하고 있나.
뻔한 걸 묻고 있어.
“미친년. 그리고 내 좆집이지. 성능 끝내주는 좆집. 더 필요하냐?”
“아니. 그거면 돼.”
라팔은 내 대답에 만족한 것 같다. 입이 작게 웃는다.
혜지가 정신을 차렸다. 혜지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일단 당황한다. 그리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배신자를 발견한다. 혜지는 울지 않는다. 그냥 배신자의 시체를 빤히 바라본다.
“시끄럽게 뭐 해요?”
뒤쪽에서 유상민이 나타난다. 미친놈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시체와 혜지를 바라본다.
또 미친놈이 한 건 할 것 같다. 그리고 진짜 했다.
“죽은 거 안 치워요? 안 치워도 괜찮긴 한데, 내일 아침 출발은 똑같으니까 알아서들 해요.”
한 여자가 발끈해 소리친다.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사람이 죽었다고요! 그리고 또.......”
여자가 혜지를 곁눈질한다. 강간 피해자 앞에서 강간당했다는 말을 꺼낼 수는 없나 보다. 유상민의 반응은 변함없다.
“그래서요? 안 치워요?”
나는 작게 소리 내 웃는다. 저런 걸 사이코패스라고 하던가. 그중에서도 저놈은 최고다. 최고의 상또라이야.
“뭐, 알아서들 하세요. 난 분명 말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아침 출발 시간은 똑같아요. 늦으면 저 혼자 가요.”
“우릴 버리겠단 말인가요?”
누군가 당황해 묻는다.
“아뇨. 그쪽이 저를 버린 거죠.”
저건 무슨 지랄 같은 논리야. 라는 표정의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유상민은 진짜 캠프로 돌아간다.
“저, 일단 치워야겠죠?”
“치웁시다. 잠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불길하게 저게 뭐야.”
사람들이 합심해 시체를 끌어내린다.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시체를 태운다. 배신자의 시체가 활활 타 사라진다.
“너도 이제 가라.”
“언제 와?”
“내일 아침.”
합류 계획도 이미 다 짜놨다.
라팔이 돌아가고, 다른 사람들도 캠프로 돌아간다. 혜지와 실망이 그리고 같은 파티 소속의 둘은 남는다.
알아서 돌아가겠지. 나는 나뭇가지 위에 몸을 눕힌다. 잠깐 눈 좀 붙이자.
***
깨어나니 벌써 아침이다. 일행은 이미 출발했을 시간이다. 예상시간보다 조금 늦다. 탐지 마법으로 어디 있는지를 알아낸다.
막 출발했는지 멀리 가진 않았다.
나는 일행을 뒤에서 따라잡는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을 건다.
“여기 다른 두 명 안 왔냐?”
대답 대신 전부 화들짝 놀라며 무기를 뽑는다. 그리고 내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한다.
“무슨 일 있어? 왜 그렇게 놀라.”
나는 태연하게 묻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아니 당연히 태연하다.
“왜 혼자죠?”
어제도 유상민에게 따졌던 여자가 나에게도 따진다. 말투가 썩 곱지 않다. 사정을 아는 나니까 봐주는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대가리 갈아버렸다.
“왜, 내가 혼자면 안 돼?”
“두 사람과 같이 있어야 하잖아요. 왜 혼자 있어요?”
“그 누구지. 다리 다친 걔는 뒤졌어. 다른 하나는 도망갔고. 그래서 쫓아왔지. 내가 추적은 잘 못 해서 시간이 좀 걸리네.”
털썩. 혜지가 쓰러졌다. 실망이도 정신을 반쯤 놓았다. 다른 사람들도 충격받긴 매한가지다.
“어째서... 충분히 막을 수 있었지 않습니까?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실망이가 힘없이 말한다. 나라고 핑계를 준비해두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게 변명하기 어려운 질문도 아니고.
“잠깐 주변을 살펴보고 오니까 벌써 끝나 있더라. 내가 없는 곳에서 일어난 일인데 나라고 별 수 있겠어?”
실망이는 뭐라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문다. 이야기 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겠지.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지나간 일을 가지고 뭐라 해봤자 서로 피곤하기만 하니.
“상혁이, 상혁이의 시체는 어쨌나요?”
파티의 다른 남자가 말한다.
“태웠어. 시체의 상태도 알려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걸레가 돼 있더라. 그렇게 심하게 찢겨 죽은 시체는 나도 처음 봤지.”
처음 본 건 아니다. 보기는 많이 봤다. 나한테 죽은 사람들의 시체는 대게 그런 형태다. 딱히 고문하려던 것은 아니고, 힘이 너무 넘치다 보니 그렇게 된다.
남자는 그걸 끝으로 침묵한다.
“해후는 끝났으면 이제 가요. 몬스터가 다가와요.”
유상민이 앞장서고 다시 일행은 다시 움직인다. 쓰러진 혜지는 실망이가 업고 간다. 내가 봤을 땐 실망이도 누가 업고 가야 할 것 같다. 그 정도로 안색이 나쁘다. 옆에서 말려도 실망이는 혜지를 내려놓지 않는다.
리더는 고생이 참 많아.
나는 요리사에게 다가간다.
“아침은 먹었냐?”
“네. 먹었습니다.”
그런데 독은 안 탔단 말이지. 명령을 내린 사람이 죽었으니 따를 필요도 없나. 배신자가 자살하는 건 나도 예상외였다.
“분위기를 보니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뭔 일이야?”
“명수가 자살했어요. 혜지 씨를 강간하고.”
“명수? 아는 사인가 봐?”
“조금 알던 사이입니다.”
과연, 그래서 배신도 쉽게 했구나. 알던 사이면 의기투합도 쉬웠겠지. 다 죽고 남은 건 이놈인데, 이걸 어떻게 처리할까.
배신자 둘을 한 번에 묶어서 처리했으면 이런 걱정도 안 하는데, 하나가 자살해버리니 다른 하나를 묶을 명분이 없다. 요리사는 내가 누군지, 뭘 했는지도 모르니 놔두는 것도 가능하다. 그래도 그건 내가 싫다. 정했다. 강원에 도착하면 죽이자.
요리사와 떨어지니 그 자리를 라팔이 대신한다. 이제 이게 자연스럽다. 강원까지 라팔이랑 장난이나 쳐야지.
***
강원은 역사책에 나오는 요새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다. 산속에 거대한 성이 있다. 예상했던 대로 강원에는 사람이 북적인다. 대부분 신서울 사람으로 보인다.
“우린 간다.”
“안녕.”
처음 말했던 대로, 이들과는 강원에서 헤어진다. 실망이가 떠드는 걸 듣고 알아야 할 건 대충 알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볼일 끝났다.
“이대로 같이 신세종까지 갈 수는 없습니까?”
“없어.”
실망이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동정을 바라도 나에게는 어림없다. 유상민도 여기서 헤어지기로 했다. 저들은 여기서 사람을 다시 모아 세종으로 향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아예 강원에 말뚝 박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다.
강원에도 도착했겠다. 하려던 일을 마저 해야지. 보이지 않는 화살을 날린다. 화살은 심장을 관통하고, 요리사는 즉사한다.
갑작스러운 살인에 거리가 시끄러워진다. 성문 근처라 그런지 경비병도 부르고 큰 소란이다.
나와 라팔은 그 소란에 섞여 거리로 들어간다.
“이제 어디 가?”
“강원에 며칠 있다가 세종으로 가야지. 여기도 재미있는 일이 있다니까, 일단 거기 한 발 걸치자.”
유상민이 분명 그랬다. 강원이 습격받고 있다고.
***
강원으로 돌아온 유상민은 바로 강원 청사를 찾았다. 강원 청사 안쪽에 있는 방에는 전화기가 있다.
전화실의 문을 굳게 잠겨 있었다. 지구에서, 특히 인터넷이나 전화 문화권에서 소환된 사람들이 가장 극심하게 느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정보 전달 속도에 대한 것이다.
정보가 무기가 된다는 것을, 빠른 정보 전달이 가지는 이점을, 대부분이 중간계에 오기 전에는 깨닫지 못한다. 통신 시설이 잘되어 있는 한국에서 왔기에 더더욱 그렇다.
전화와 인터넷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지는지 모두가 중간계에 오고 나서야 진정으로 깨달았다.
대한 길드에서 전화는 군사 무기 못지않은 중요도를 가지고 취급되고 있었다.
사중 잠금을 열자 작은 방이 드러났다. 방 안에 있는 것은 탁자에 올려진 전화기가 전부였다. 디자인은 지구에서 보던 집 전화와 흡사했다.
유상민은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걸었다. 건너편에서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다하고 웬일이야? 찾던 건 찾았어?
“아닌데요.”
-그럼 왜?
“몬스터 대규모 이동이 시작됐어요.”
-언제부터?
남자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나흘 전? 일주일까진 안 됐어요.”
-원인으로 짐작 가는 건 있고?
“없는데요.”
짚이는 게 없진 않았다. 그 남자. 도저히 알 수 없는 그 남자가 이번 일과 관계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유상민은 그걸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불확실한 정보이기도 하거니와 약간의 불안도 있었다. 말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죽음이 무섭지는 않지만 그도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특이한 사람을 만났어요.”
-네가 특이하다고 하는 걸 보면 보통 사람은 아니겠구나.
“그래요?”
-네가 괜찮다고 판단하면 한 번 데려와라. 식사나 한번 하자.
“그럴게요.”
-그래, 빨리 돌아와라.
“아, 그리고.”
유상민이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신서울이 무너졌어요.”
-뭐? 신서울이 무너져? 그게 무슨 소리야! 야! 유상민!
전화를 끊은 유상민은 방을 나와 다시 문에 네 개의 잠금장치를 채웠다. 복도를 걸으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데려오라고요?’
유상민에게 남자는 은인, 은사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가 말을 듣게 하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데려오라고 한 거면 유상민에게는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볼 일이다.
유상민은 그가 한 일을 대충 짐작하고 있다.
무리를 분열시키고, 사람을 가지고 노는 인간.
일단 위험한 것 같지는 않다. 유상민의 기준에서는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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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위험하지 않아요! 건드리면 물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