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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소환된 남자-36화 (36/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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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계

실망이가 미친놈에게 말한다.

“그냥 같이 가면 안 되겠습니까?”

“남을 사람 남는 게 훨씬 안전하다니까요. 4급 이상 나오면 여기 있는 사람끼리 대처할 수 있어요? 전 도망갈 건데. 아니면 오크나 고블린 무리를 만나면요? 뒤처지는 사람은 누가 업고 와요?”

실망이의 얼굴이 굳는다. 몬스터를 분류하는 기준은 등급제다. 10등급으로 나눠서 숫자가 높을수록 강하다. 4급이면...... 4급이 어떤지 나도 몰라. 상대해 봤어야 알지.

미친놈의 말투는 중독되는 맛이 있다.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는데 따박따박 치고 들어온다. 나도 한 번 써먹어 볼까.

“그만해. 내가 남으면 되지, 뭐. 저분도 남아주신다고 하고.”

상혁이가 날 눈짓한다. 나는 손을 한 번 흔들어준다. 상혁이가 씁쓸하게 웃는다.

“남을 사람 남고 빨리 움직여요. 사실, 여기도 그렇게 안전하진 않아서. 밤새 오크 무리 하나가 이동하고 있어요.”

오크 무리라는 말에 사람들이 굳은 얼굴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상혁이가 절룩거리며 나에게 걸어온다. 옆에 실망이도 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 같이 살자고 하는 건데, 뭘.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가서 짐이나 싸.”

어려운 일이 아닌 건 맞지만, 다 같이 살자고 하는 일은 아니다. 나 혼자 살자고 하는 일이다.

슬쩍 배신자를 보자 표정이 썩어있다. 둘만이라면 상혁이를 죽이기도 쉬울 텐데, 내가 있으면 상혁이를 죽이긴커녕 계획했던 일이 전부 무너진다.

심정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표정은 숨겨야지.

“어디 아프냐?”

“아뇨, 아닙니다.”

배신자는 겁에 질려 나에게서 멀어진다. 내가 얼굴을 갈아버렸을 때부터 늘 저런 반응이다. 내가 다가가면 물러나고, 말을 걸면 피하고. 저런 걸 두고 쫄보라고 하는 건가.

성인과 쫄보와 미친놈. 이상한 조합이 탄생했어.

캠프가 정리되고 모두 떠날 채비를 마쳤다. 배신자와 상혁이도 등 뒤가 묵직하다. 서로 인사를 나눈다. 상혁이와 혜지가 서로 짠하다.

떠나기 직전, 내가 미친놈에게 묻는다.

“어이, 조사관. 너 이름이 뭐냐?”

“유상민인데요?”

“그래, 가라.”

“안 그래도 갈 겁니다. 가요. 제가 앞장섭니다.”

유상민의 뒤로 떠날 사람들이 떠난다. 파티 사람들은 아쉬운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외인들은 그냥 그렇다는 반응이다. 외인과 파티는 함께한 시간이 다르다. 친구도, 동료도 아닌 그저 아는 사람과 헤어진다고 아쉬워하지는 않겠지.

-힘은 쓰지 말고. 이상한 일 생기면 보고하고. 오케?

-오케.

라팔은 저쪽에 남겨뒀다. 재미있는 일이 생기면 나에게 보고해줄 것이다. 지나치게 멀리 떨어지지 않는 한, 라팔이랑은 연락이 가능하다.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는 라팔은 다른 사람과 명백하게 이질적이다. 새하얀 피부에 나풀거리는 옷은 흙 하나 묻지 않았다. 씻지 않았어도 여전히 깨끗하고 더러워지지 않는다. 홀로 붕 떠 있다.

앞쪽과의 거리가 충분히 벌어질 때까지 기다린다. 다른 둘은 내 눈치를 보고 있다. 거리가 충분히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연다.

“하고 싶은 거 해.”

“예?”

“하고 싶은 거 하라고.”

배신자는 멍한 얼굴로 날 본다. 남자가 그러지 마라. 역겹다. 그런 표정 할 거면 라팔이 정도는 돼야지. 음. 그건 너무 엄격한 기준인가.

배신자는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는 얼굴이다.

“텅이라도 부를래? 독은 안 쓰고 아직 가지고 있어?”

배신자의 안색이 하얘진다. 나는 상혁이쪽으로 표적을 돌린다.

“나랑 처음 만났을 때. 그때 왜 텅을 만났을까? 그때는 몬스터 대이동도 없었는데. 그 정도 숫자가 주변에 있는데 길잡이가 몰랐을까?”

상혁이는 이해를 못하다가, 눈을 크게 뜨고, 분노로 얼굴을 물들인다.

“너, 너. 너.......!”

얼마나 화났으면 말문이 막혀 말도 제대로 못 한다. 삿대질은 잘하네.

“네가 배신을 해?! 우리 모두를 죽이려 했어?!”

“거짓말이야. 거짓말!”

“그럼 그 표정은 뭔데!”

배신자가 자기 얼굴을 만진다. 그런다고 자기 표정이 보일까. 적어도 자기 안색이 창백하다는 것은 모른다. 굳은 근육 정도는 만져지겠다.

배신자가 고개를 떨군다. 그리고 잠시 침묵하다, 웃음을 터뜨린다. 하하. 하하하. 맛이 간 웃음이다.

“혜지는 내꺼야! 내꺼라고! 너 같은 놈에게 줄 것 같아?”

“혜지?”

“나에게 말을 걸어준 건 그녀밖에 없었어! 그녀밖에 없었다고! 그녀는 날 좋아해. 그런데 네가 끼어들어서!”

배신자가 짧은 봉을 뽑는다. 봉은 몇 번 만지니 펴지며 창으로 변한다. 그대로 배신자가 상혁이를 덮친다. 상혁이는 배신자가 봉을 꺼낼 때부터 검을 꺼내고 있었다.

배신자의 공격을 상혁이가 방어한다. 다리가 불편한 상혁이가 불리한 게 당연하지만, 잘도 막고 있다.

“겨우 그런 이유로 모두를 죽이려 해?! 너 때문에 몇 명이 죽은 줄 알아?”

내가 저들을 구해주기 전, 그러니까 텅에게 습격받기 전에는 사람의 숫자가 더 많았다. 죽기는 참 많이 죽었다는 소리다.

“하, 그런 거 알까보냐! 나를 무시했던 놈들 따위 어찌되든 상관없어!”

배신자에게 대화의 여지는 전혀 없다. 그럼에도 상혁이는 계속 대화를 시도한다. 대화할 생각이 없는 사람을 상대로 대화를 하다니. 쓸데없는 짓이다.

“아무도 너를 무시하지 않아!”

“아니, 무시해.”

배신자의 공격이 거세진다. 상혁이의 몸에 상처가 늘어난다.

“나는 전생에 빈민, 낙오자였다.”

상혁이의 움직임에 빈틈이 생긴다. 배신자가 거길 파고든다. 어깨로 날아오는 공격을 간신히 피하며 상혁이는 뒤로 넘어진다.

배신자의 창이 상혁이의 목을 겨눈다.

“너는 몰라. 빈민들이, 낙오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아무도 우릴 신경 쓰지 않아. 봐주지 않아. 그저 싸늘하게 바라볼 뿐이지. 오직, 혜지만이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배신자는 상기된 얼굴로 상혁이를 노려본다.

“오직, 오직. 그녀만이.”

창이 움직인다. 상혁이의 어깨를 관통한다.

“혜지만이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어. 먹을 것을 줬다고.”

허벅지를, 종아리를, 팔을. 창이 난도질한다. 상혁이는 손가락이 흙을 쥐어뜯으며 몸을 비튼다. 고통에 소리친다.

“너만 없었으면! 너만 없었으면! 너만 없었으며어언!”

창에서 절제가 사라졌다. 창이 마구잡이로 상혁이의 몸을 누빈다. 누비고 깁는다. 창이 바늘이고 상혁이가 천이다. 천이 누더기가 되어간다.

“허억. 허억. 허억.”

배신자가 숨을 몰아쉰다. 누더기가 된 상혁이는 숨을 쉬지 않는다. 숨 쉴 폐도, 들이마실 기도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시체가 처참하다.

배신자는 통쾌해 보인다. 동시에 어딘가 어두워 보인다.

그나저나 저놈들, 신파극 찍느라 나를 잊고 있다. 내 존재감이 너무 옅어서 큰일이다.

“안녕?”

사뿐히 내 존재를 어필한다. 배신자가 나를 깨닫는다. 그리고 뒤로 넘어진다.

“넘어지면 어떻게 해. 빨리 남은 일도 처리해야지.”

배신자를 일으켜 세워주고 묻은 흙먼지도 털어주었다. 앞으로 큰일 할 인물인데 이런 곳에서 넘어지면 안 된다. 암, 그렇고말고.

배신자는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눈동자가 왔다 갔다 어수선하다. 나는 배신자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그 신파극은 좀 재미없었어. 여자 하나 때문이라니, 진부하잖아. 적어도...... 음, 적어도.......”

배신에 무슨 이유가 있었어야 재미있었을까? 으음. 그냥? 심심해서? 그것도 너무 평범한가.

사실, 배신자는 미래에서 온 혜지의 아들이고, 혜지가 상혁이와 결혼해서 일어나는 비극을 막으로 왔다고 하면 대박인데. 아무리 현실이 막장이라도 그런 일은 안 일어나려나.

그럼 대충 현실적인 이유가.......

“적어도 상혁이가 실은 희대의 개새끼였고, 나는 혜지를 지키려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지.”

남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거는 얘가 그랬다면 반전이긴 하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 뭐냐. 다음에는 잘 좀 해봐? 알았지?”

배신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얼이 빠진 얼굴이다. 뭐, 상관없나. 역할만 잘 해주면 좋다.

“가자, 혜지 보러. 방해꾼도 없어졌으니 혜지 봐야지?”

배신자가 몸을 떤다. 그렇게 좋아할 필요는 없는데. 곧 만나게 해준다니까.

***

멍한 배신자를 끌고 앞서간 일행을 추적한다. 그렇게 멀리 가진 못했다. 금방 따라잡아 들키지 않게 지켜본다.

순조롭게 앞으로 가고 있다.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배신자도 아무 반응이 없다. 충격이 너무 커 내면으로 숨어버렸나. 크게 걱정은 안 한다. 이런 건 대게 다시 충격을 주면 깨어나게 되어 있다. 제정신으로 깨어난다는 보장은 없지만.

유상민은 능력이 뛰어났다. 규칙 없이 움직이는 몬스터들을 용케 피해 움직이고 있다. 시간이 지나자 뒤따르는 사람들도 안심하고 있다. 한 시간에 한 번꼴로 만나던 몬스터를 세 시간 만나지 않았다.

누군가 불쑥 말한다.

“저런 능력이 있다면, 상혁 씨도 같이 가도 되지 않았을까?”

“맞아. 그 사람까지 있었으면 4급 몬스터가 나와도 어떻게 됐을 거 같은데.”

“상혁이만 버려진 거야? 저 사람 때문에?”

맞아. 어떻게 돼. 어떻게 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강원까지 갔겠지. 그런데 어쩌나. 버스는 이미 떠났는데. 무슨 소릴 해도 실없는 소리밖에 안 돼.

“쉿. 그러다 들을라.”

“다 들리는데요? 가실 분 있으면 가셔도 돼요. 전 안 갑니다. 알아서들 다녀오세요.”

잡담이 쏙 들어간다. 뒷담하던 사람들은 앞서가는 유상민의 등을 불안하게 바라본다. 유상민의 태도는 변함이 없다. 길 찾기에만 집중한다.

“사건이 벌어질 여지는 없나.”

유상민이 너무 우수해 그럴 여지가 없다. 사람들끼리의 갈등 정도가 있겠는데, 그건 너무 불확실한 요소다.

“다른 한 명이랑 연락은 어떻게 하기로 했냐?”

뺨을 툭툭 치며 배신자에게 묻는다.

“암구호로.......”

빙고, 서로 떨어지는 거니 연락 방법 정도는 마련해뒀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진짜 있다. 나쁜 짓 하는 놈들이 이런 면에선 철저하다니까.

“구체적으로 말해봐.”

“시, 시...... 싫어. 싫어!”

“혜지 만나기 싫어? 이것만 잘하면 혜지 만나게 해줄게.”

배신자를 살살 구슬린다. 상혁이고 죽이고 볼 장 다 본 놈이 여기까지 와서 왜 이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잖아. 너는 혜지 만나고, 나는 나대로 즐기고. 얼마나 좋아.

계속 유혹하니 배신자가 암구호를 말한다. 생각보다 간단한 구호다.

좋았어.

***

밤이 되자 유상민은 숨기 좋은 자리를 찾아 걸음을 멈췄다. 잡초도 적고 땅이 모나지도 않은, 캠핑하기 좋은 자리였다.

“오늘은 여기서 자요.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거에요.”

“저기, 저녁은 먹나요?”

“안 먹을래요?”

“아뇨!”

유상민은 자연스럽게 자리를 주도하고 있었다. 대한 길드 소속이라는 점과 그가 보여준 능력, 오늘 하루 동안 한 번도 몬스터를 마주치지 않게 해준 그 능력 때문에라도 그에게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짐을 풀고 마른 가지를 모았다. 신서울을 떠나고 밤마다 해온 일이다. 역할은 분담되어 있었고, 동작들은 신속했다.

각자 할 일을 하는 가운데 산새 우는 소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한 사람 빼고.

김찬수는 화장실을 가는 척하며 슬그머니 캠프를 빠져나왔다. 저 소리가 중간계에는 없는 꾀꼬리 소리라는 사실을 아는 건 이 자리에서 김찬수와 임명수뿐이다.

꾀꼬리 소리 3번 짧게. 김찬수는 캠프에서 남쪽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편지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꼬질꼬질한 싸구려 갈색 종이에 적힌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내일 아침에 독을 타. 그리고 새벽 불침번 때 혜지를 여기까지 불러내.

============================ 작품 후기 ============================

주인공의 성향을 표현하자면 혼돈 중립입니다. 미친놈이라 악처럼 보일 뿐. 착한 일도 가끔 하잖아요?

p.s 함부러 착한짓 하면 스토커가 따라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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