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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계
“민권아.......”
상혁이가 감격한 얼굴로 배신자를 본다. 민권이, 그놈이다. 첫날에 나한테 얼굴 갈린 그놈. 내가 합류하는 걸 그렇게 반대하던 것도 아마 계획이 꼬이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예상한다.
“길잡이는 한 명이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또 다른 길잡이인 아저씨가 대답한다. 아무도 배신자의 결정을 되묻지 않는다. 모두 짐덩이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내심 환영하고 있다. 말은 없지만 그런 분위기다.
살신성인하는 한 명과, 살인성인하려는 한 명에 의해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돌아왔다.
“꼭 가야겠어?”
파티의 여자가 상혁이에게 묻는다. 이름이 분명. 혜지라고 했던가? 내가 낙하할 때의 충격으로 팔이 부러졌던 여자다.
“뭘 평생 못 볼 사람처럼. 강원에서 보자.”
“그래.”
마지막 연인처럼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배신자가 옆에서 빤히 보고 있다. 눈빛이 위험하다. 안에 있는 욕망까지 보이겠다. 좀 꼭꼭 숨겨라.
실망이가 혜지와 상혁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말했었지. 배신자는 혜지를 아주 뜨겁게 보고 있고.
캬, 상혁이 이놈. 곱게 못 죽을지도 모르겠다.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렸어.
벌써 내일이 기대된다. 내가 판을 짤 것도 없이 이미 이들에게는 막장이 예약되어 있었다. 손댈 것도 없이 구경만 했어도 되는 일이었어. 설령 알았더라도 손은 댔겠지만.
게임은 보는 것보다 하는 게 재미있잖아? 미친놈 같다는 건 인정한다. 미친놈이 미친 짓하겠다는데 뭐가 나빠. 정말 만능 변명이다.
잘 준비가 끝나고, 모두 빨리 자려고 눕는다. 대화는 여전히 없다. 끼리끼리 작게 속닥이는 소리는 가끔 들린다.
자려고 누웠던 라팔이 일어난다. 내가 묻는다.
“느꼈냐?”
“응.”
누가 우릴 지켜보고 있다. 무엇이 지켜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시선만이 느껴진다.
“나도 갈래.”
내가 몸을 일으키자 라팔도 따라서 일어난다. 같이 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날린다. 들키지 않도록 환영을 만들어두는 것도 잊지 않는다.
감시자는 사람이었다. 위장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아 있다. 남자는 나와 라팔이 근처에 있어도 알아채지 못한다.
남자의 앞에 나타나 묻는다.
“야밤에 홀로 뭘 하시나?”
남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정확히는 움직이지 못한다. 거창하게 마법을 쓸 것도 없이 내 마력에 묶여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남들은 이거 보고 마력 낭비라고 욕하던데, 난 마력이 무한이라서.
그래도 머리는 움직이게 해뒀다.
“어떻게?”
남자는 눈동자가 떼굴떼굴 구른다. 캠프장에 있는 나와 여기 있는 나 사이를 왕복한다.
“마법. 근데 넌 누구냐?”
“대한 길드 소속 조사관인데요.”
대한 길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길드다. 신서울에 군림하던 마스터 혈이나 신의 메아리보다 급이 높다는 소리다. 그런 사람이 산에서 우릴 감시하다니 이유를 모르겠다. 그건 그거고,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말이 짧다?”
이게 자꾸 아까부터 반말이다. 말은 존댓말이어도 태도가 불량하면 그게 반말이지.
“이게 천성이어서요.”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어깨까지 으쓱했을 것 같다. 그 태도에 내가 묻는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알지?”
“아는데요? 고문 교육받았습니다.”
고문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도 이러겠다는 뜻이다. 호기심에 손가락을 하나 부러뜨리고 하는 김에 손톱도 두 개 뽑는다.
“아파요. 아프다고요!”
꽥꽥 소리 지르긴 하는데 진짜 아파 보이진 않는다. 뭐랄까. 고문 받는 게 아니라 친구들끼리 조금 심하게 장난치는 그런 거? 장난이랍시고 더럽게 아픈 그런 거 말이다.
“미안, 미안.”
사과하며 손을 놓아준다. 미안해서 구속도 풀어줬다. 남자는 손을 호호 불며 나에게 묻는다.
“포션 없어요?”
“니꺼 있잖아.”
남자의 허리춤을 가리킨다. 허리띠에 작은 포션병이 매달려 있다.
“그쪽이 부러뜨린 거잖아요. 그쪽이 해결해 줘야죠.”
내가 싼 똥이니 나보고 치우라고?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특이한 놈을 만났다 싶었는데 특이한 놈이 아니라 미친놈이었다. 이 동네는 미친놈이 왜 이렇게 많아?
아, 전부 회귀했구나. 라팔과 난 놈의 말에 의하면 인류는 한 번 멸망 직전까지 갔었다. 중간계에 있는 인간은 대부분 한 번씩 죽었다 살아난 놈들이니 미쳐도 이상할 건 없겠다.
나만 해도 봐. 죽었던 것도 아닌데 이 모양이잖아.
“그래, 내가 잘못했다.”
아공간에서 포션을 하나 꺼내 남자에게 던진다. 남자는 포션을 자기 손에 펴 바른다.
“그런데 그쪽은 뭐에요? 이런 데서 뭘 하고 있는데요?”
“강원으로 가는 길인데. 넌 뭐냐?”
“말했잖아요. 대한 소속 조사관.”
이게 어디서 말장난이야. 손에 불을 피워 남자의 팔로 손을 뻗는다. 피하려 하는 걸 마력으로 억누르고 팔을 붙잡는다. 옷에 불이 붙어 타들어 간다.
“맞을래? 이번에는 팔 하나다.”
“이거! 이거 벌써 타고 있는데여?”
“아직 피부는 안 타.”
곧 타겠지. 마력을 제어하고 있긴 하지만, 이놈이 계속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제어를 풀어버릴 거다. 옷과 함께 활활 타죽어라.
“몬스터의 움직임이 이상해서 조사 나왔어요. 레알! 엠창!”
얼마나 급했으면 엠창까지 찍는다. 저거 오랜만에 보네. 그 마음가짐이 기특해 불꽃을 거둔다. 남자는 호들갑스럽게 불탄 옷을 털어낸다. 팔 곳곳에 검은 그을음이 있다.
음. 잘못해서 털도 태운 모양이다.
“몬스터의 움직임이 이상하다고?”
“이틀 전부터 산에서 몬스터들이 몰려와서요. 강원이 공격당했어요. 그래서 조사 나왔습니다.”
아, 그거. 나 때문이다. 몬스터의 영역을 조금 건드렸는데, 나비 효과가 강원까지 닿네. 멀리 떨어진 위치도 아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강원 시민들에게는 미안한 짓을 했다. 그러니까 입 꾹 다물 거다.
나랑 라팔만 조용하면 아무도 모른다. 이 일은 평생 묻어두자.
“원인은 나왔고?”
“모르겠는데요. 귀찮아서 집에 가게요.”
“우린 왜 감시했고?”
“뭔가 관계가 있나 해서요. 여기 말고도 다른 파티 3개를 관찰하고 오는 길인데요. 신서울이 무너졌다는데 진짜예요?”
“어. 망했어.”
나 때문에 망했어. 내가 진상을 알려주면 신서울은 여자 하나에 망한 도시라고 기록되려나 싶다. 세계적 미친놈으로 이름 알릴 좋은 기회다만, 그건 사양하고 싶으니 관두자.
그러면 적이 너무 많아진다. 농담 안 하고 전 인류와 싸워야 할지도 몰라.
“진짜요?”
“파란 드래곤이 나타나 전부 쓸어버렸지. 그러니까, 이름이.......”
“포루시안.”
“포루시안?”
남자는 많이 놀란 것 같다. 용가리 하나가 나타난 게 그 정도로 놀랄 일인가. 마력으로 찍어누른 기억밖에 없어서 그렇게 대단한지도 모르겠다.
“그놈이 떠서 전부 박살 냈다더라.”
“포루시안은 어떻게 됐어요?”
“몰라. 동귀어진했다던데.”
남자는 고개를 내리고 침묵한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표정이다. 머리까지 긁적인다. 나는 남이 고민하는 시간을 기다려주는 친절한 사람이 아니다. 내 볼일이 먼저야.
“넌 좀 같이 가줘야겠다.”
“싫은데요?”
“여기서 뒤질래?”
“갈게요.”
협박하자 바로 말을 바꾼다. 참으로 현명한 놈이다. 힘도 없는데 기개를 굽힐 순 없다며 개기는 놈들이 진짜 미련한 놈들이란 말씀. 힘도 없는데 개기긴 왜 개겨.
내 앞에서 기개로 개기면 개처럼 맞아 죽는다.
“가자.”
“응.”
감시자가 누군지도 확인했으니 여기 있을 이유도 없으니 돌아가자. 가려는데 뒤에서 남자가 따라온다.
“아, 넌 거기 있어.”
“왜요?”
“내일 와.”
“왜요?”
왜긴, 내가 밤에 싸돌아다니는 걸 들키면 안 되니까. 이놈을 보러 나온 게 들키면 무조건 나에게 좋지 않다. 내 탐지 능력이 뛰어나다는 걸 들키는 데다 내가 저놈들을 속이고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도 들킨다.
마이너스 요소밖에 없다. 귀찮고 안 좋은 점이 더 많은데 그냥 여기서 죽일까? 그건 참자. 참신하게 미친놈이니 여기서 죽이긴 아깝다. 내가 조금 손해 보더라도 한 번 영입해보자.
“저 환영 안 보이냐? 내가 저놈들을 속이고 왔다는 게 들키면 내 입장이 어떻게 되겠어. 그러니까 넌 나중에 와라.”
내일 오든지 오늘 밤에 오든지 그건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난 너무 마음이 넓어서 탈이다. 이러다가 호구 되는 거 아닌가 몰라.
“옷 태워놓고, 사람 반라로 이렇게 남겨두고 가게요? 진짜요?”
추운 바람이 쌩쌩 불고, 뒤쪽에선 누군가 애잔하게 비는 것 같지만. 환청일 거다. 아마.
***
다음 날 아침 남자는 캠프를 찾아왔다.
“대한 길드 소속 조사관인데요. 어디 가요?”
막 아침을 먹으려는데 다짜고짜 찾아오더니 꺼낸 첫말이 이거다.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도 없고, 그냥 나는 누구니 너희가 어디를 향하는지 말해라! 한다. 나사가 몇 개 빠진 질문이어서 싸움이 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들이 보여주는 반응은 내 예상과 정 반대다.
“대한 길드? 정말입니까?”
먼저 실망이가 남자를 환대하고.
“대한 길드가 왔다.”
“우린 살았어.”
나머지는 안도하며 좋아한다. 대한 길드라는 이름이 그렇게 믿음직한가? 대한 길드에 대한 신뢰와는 따로 나는 저놈을 못 믿겠다.
예로부터 미친놈은 믿는 게 아니랬어. 나와 라팔이만 봐도 증명되는 사실이다.
실망이와 남자가 대화를 나누더니. 남자가 우리와 함께 이동하는 일이 됐다.
그 말을 듣고 두 명이 특히 좋아한다. 상혁이와 혜지다. 두 사람은 눈에 보일 정도로 서로 바라보며 웃고 있다.
대한 길드에서 왔으니 상혁이를 버릴 필요도 없어지나. 이건 생각 못 했던 일이다.
기쁜 건 실망이도 마찬가지인지. 실망이가 상혁이 옆으로 가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됐어. 상혁아. 네가 갈 필요 없어.”
“어제 그렇게 분위기 잡아놓고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
대답하는 상혁이의 음성도 가볍다. 그저께부터 감돌던 긴장감이 해소되고 훈훈한 공기가 감돈다. 미친놈 하나가 초를 친다.
“거기 다리 다친 분이 남는 거였어요? 남아도 되는데?”
모든 게 싸늘해진다. 꽁꽁 얼어 서리가 끼겠다. 사람들이 말을 꺼낸 미친놈을 본다. 자신을 대한 길드 소속 조사관이라고 소개한 미친놈은 뭐가 잘못됐냐는 얼굴이다.
아, 미치겠다. 웃겨 죽겠어. 잘못하면 터지겠다. 씰룩이는 입꼬리를 억지로 가라앉히며 웃음을 참는다.
미친놈인 줄은 알았는데 제대로 미친놈이다. 나는 사람 이름에는 크게 신경 안 쓰는데 쟤 이름은 알아둬야겠다.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미친놈이다. 나도 분위기 정도는 읽을 줄 아는데, 쟨 뭐야.
사람들의 시선이 어떻건 미친놈은 미친 짓을 계속한다.
“왜들 그렇게 봐요? 내가 무슨 히어로인줄 알았어요? 여기 사람들 전부 지키면서 안전하게 강원까지 데려다주는 건 나도 못해요. 안 그래도 몬스터들 영역이 꼬여서 복잡한데. 다친 사람이 남고 싶다 하면 남아도 돼요. 방해만 되니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끼리 빨리 가는 게 훨씬 안전해요.”
미친놈의 말이 끝나자 조용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훈훈한 공기는 모두 찬바람 타고 날아갔다. 찬바람만 쌩쌩 분다.
환기가 필요한 순간이다. 여기서 나서는 것이 좋겠지.
“내가 같이 남으면 되니까. 먼저들 가.”
미친놈에게 쏠렸던 시선이 나에게 모인다.
“둘 정도라면 내가 커버할 수 있으니까. 그쪽은 먼저 가고. 뒤쪽에 내가 남는다. 그럼 되잖아?”
얼핏 보면 괜찮은 선택이다. 상혁이와 배신자, 그리고 나. 배신자가 길잡이니 조금 느려도 길을 찾아 강원까지 확실하게 갈 수 있다.
여기에는 난점이 하나 있다. 그냥 나를 포함해 다 같이 가면 된다. 미친놈이 탐지를 맡고 내가 무력을 맡으라는 말이 나오면 그냥 끝난다. 그 말이 나오기 전에 빠르게 일을 정리해야지.
-알아서 말 맞춰라. 이상한 말 하면 진짜 뒤진다. 농담 아니야.
미친놈이 미친 짓을 하기 전에 막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약자 코스프레 중이세요?
-넌 남들한테 가진 카드 다 보여주고 포커치냐?
-아닌데요.
-그거 봐.
미친놈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걸로 입막음도 끝났다.
이 신파극이나 계속하자.
============================ 작품 후기 ============================
중간계에 미친놈이 많은 이유는 전부 회귀자이기 때문입니다. 죽을 고비를 넘긴게 아니라 한 번 죽었다 살아난 놈들이 정상이길 기대하면 안돼요. 회귀한 주인공들도 보면 나사 하나씩 빠져 있잖아요?
미친놈이 아무리 나와도 상관없다니. 설정 참 잘 잡은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