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4 / 0128 ----------------------------------------------
중간계
즐거이 식사하고 있는데, 실망이가 나에게 다가온다. 다가와 예의 그 미안함과 감사함이 섞인 표정으로 인사한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만약 당신을.......”
실망이의 말문이 막힌다. 당황한 눈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나는 킥킥 웃는다. 실망이가 저러는 이유를 알거든.
“처음 물었어야 했는데,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만나고 며칠이나 지났는데 아직 우리는 서로 이름도 모른다. 이름을 알 필요도 없긴 하다.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실망이밖에 없고, 나머지는 내가 다가가서 직접 말을 걸면 된다.
거기에 이름은 필요 없다. 저기요. 야. 너. 등이면 충분하다. 이름은 부르기도 귀찮고 외우기도 귀찮다. 자동으로 기억되긴 하지만 어쨌든 귀찮아.
“세계최강 유일무이 유아독존 진휘님이라고 불러라.”
“알겠습니다. 세계최강 유일무이 유아독존 진휘님.”
“농담이랑 진담은 우리 구분해서 듣자.”
듣는 내가 쪽팔려서 얼굴을 가리고 싶어진다.
“저도 농담입니다.”
실망이가 피식 웃는다. 어쩐지 그 웃음이 힘겨워 보인다. 나는 그 웃음을 잰다. 자로 재듯, 얼마나 남았을까. 슬슬 한계로 보인다. 내가 합류하기 전부터 이런저런 일로 스트레스를 받았다면 터질 때도 됐다.
“아니, 그건 농담이 아니었어.”
영혼 없이 대꾸한다. 실망이랑 놀아줄 시간이 없다. 다른 쪽에선 재미있는 대화가 오가고 있다. 나에게 들릴세라 옹기종기 모여서 속닥속닥 말하는 것이 귀엽게 보인다.
“강원까지는 갈 수 있을까?”
“강원까지야 못 가겠어. 몸 성히 갈 수 있느냐가 문제지 잘못하면 상혁 씨처럼.......”
다리 병신 된 상혁이는 인생도 조졌다. 다리를 완치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상혁이는 몸으로 돈 버는 직업이다. 돈도 못 벌고 몸도 버렸으니 남은 게 없다.
“듣지도 못하는데 말 못할 게 뭐 있어. 상혁이는 망한 거지. 돈이나 좀 모아뒀으면 몰라.”
“그 정도로 모아뒀겠어? 고급 포션이 얼마나 비싼데.”
“신전에 가면 되잖아. 싼 신전 두고 왜 비싼 포션 찾아.”
“메아리가 무너졌는데, 그쪽이라고 멀쩡하겠어? 만약 강원이랑 세종에서도 사제가 신성력을 못 쓰면?”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러면...... 상혁이 진짜 좆됐네. 와, 다쳐도 팔다리는 다치면 안 되겠다.”
“몸은 되고?”
“장기야 조금 뜯겨도 죽진 않잖아. 돈 벌어서 고치면 되지. 그런데 팔다리 못 쓰면? 인생 끝이지.”
내 영혼 없는 대꾸에 질린 건지 실망이는 떨어진 곳에서 홀로 식사한다. 이제는 밥도 혼자 먹는구나. 좋은 징조다, 나에게만.
상혁이가 어쩌니 몸 다치면 고생이니 하는 이야기가 이어지다, 누군가 다른 주제를 꺼낸다.
“그나저나 몬스터는 왜 이렇게 나오는 거야? 그저께까지는 아무 문제 없었잖아.”
“낸들 아냐. 혹시 거물이라도 떴나?”
“끔찍한 소리. 거물 뜨면 다 죽어.”
“또 모르지. 그 사람이 정리해줄지.”
“사실 몬스터도 저 사람이 불러온 거 아냐?”
정답. 아주 정확하게 맞췄다. 맞아. 내가 불러왔어.
정답을 맞췄는데도 그 사람은 주변 사람에게 구박받는다.
“들으면 어쩌려고.”
“들었으면 가만 있겠어? 벌써 민권이 꼴 났지. 그 미친놈.......”
그 미친놈이 다 듣고 있단다. 더 큰 그림을 보고 있어서 내가 참는다. 안 그랬으면 이미 안면을 박살 냈지.
“또 가?”
그릇을 비우고 일어나니 라팔이 묻는다.
“듣고만 있으면 심심하니까. 무슨 일 생기면 불러라.”
“응.”
캠프를 빠져나와 숲을 달린다. 달빛도 희미한 밤이지만 내 눈에는 전부 보인다.
‘오늘은 어디를 몰아볼까.’
자연이란 원색적이다. 강한 놈이 넓은 땅을 차지하고, 더 강한 놈이 나타나면 물러난다. 여기서 더 강한 놈은 나다.
적당한 장소에 서서 살기를 흘린다. 은밀한 살기가 공간을 장악한다. 나는 시비를 걸고 있다. 이 주변의 주인 되는 놈에게. 자, 와라. 내가 네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
쿵!
땅이 울리고 나무 사이에서 몸집이 큰 무언가가 일어선다. 길쭉한 머리에 몸체가 비늘로 덮여 있는, 한 마디로 비늘 덮인 여우 같은 놈이다.
어둠 속에서 푸른색 눈동자가 빛난다. 나는 일부러 무방비한 모습을 보여준다. 놈은 나에게 다가와 거리를 둔다. 그리고 옆으로 빙빙 돌며 나를 살핀다. 그 거구로 나무 사이를 매끄럽게 이동한다.
나는 여유롭게 기다린다. 몸이 텅텅 비어 빈틈투성이라 반대로 당황스러울 거다.
놈이 튕기듯 나를 덮친다. 무릎을 굽히는 동작도 없는 기습이다. 발톱을 들이대는 녀석에게 손을 내민다.
발톱이 내 손에 막힌다. 놈은 당황해서 뒤로 물러나려 한다. 그러나 내 마력이 무형의 힘이 되어 그걸 막는다.
“안녕, 친구? 좋은 밤이야.”
“크르릉.......”
“공교롭게도 내가 오늘 기분이 쬐끔 좋지 않아.”
손바닥을 깊게 베어낸다. 흘러나오는 피를 놈의 코로 흘려보낸다. 처음에는 반응이 없다가, 코의 점막으로 피가 흡수되기 시작하자 여우의 몸이 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청록색 비늘이 진해지며 빛을 내고 몸집도 커진다.
여우를 닮은 몬스터는 몸을 떨며 포효한다. 그 울음에 숲이 떨린다.
극상의 영약인 내 피에 포함된 마력을 받아들이기 위해 몸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강인하고, 더욱 튼튼하게.
변화를 마친 놈이 날 노려본다. 손을 뻗어 그 눈알을 후벼 판다. 놈이 몸을 뒤틀며 소리 없이 절규한다.
“그래서 장난감이 필요한데, 장난감은 튼튼할수록 좋잖아?”
눈알에서 손을 뽑으니 손이 축축하다. 부서진 놈의 눈알은 빠르게 재생되어 다쳤던 흔적까지 사라진다. 흔적은 사라져도 고통은 남는다.
놈은 나에게 붙잡혀 움직이지 못한다. 입만이 고통에 찬 신음을 뱉는다. 그 심정 내가 알지. 잔류하는 고통에 미친다. 미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다. 버티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어떻게 되긴. 죽지. 충격에 쇼크사한다.
바람의 칼날이 단두대가 되어 하늘에서 떨어진다. 놈의 목이 떨어진다. 그래도 아직 살아 있다. 나는 목을 들어 다시 몸에 붙인다.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목이 붙고, 신경이 이어지는 고통에 놈이 다시 포효한다.
이 근방을 다스리는 주인이 내지르는 끔찍한 소음에 숨죽이고 있던 몬스터들이 움직인다. 꽁지라 빠져라 달아난다.
여긴 캠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다. 여기서부터 몬스터가 움직이면 나비효과처럼 다른 구역들도 변동하고, 결국 몬스터 대이동이 일어난다.
나는 밤새 느긋하게 이놈과 즐기다가 돌아가면 된다. 단순한 고통만 가하는 건 내 미학에 반하는 일이지만, 오늘은 그 미학도 상관없을 정도로 기분이 나쁘다.
거친, 그러나 기계적인 내 손놀림이 놈을 헤집는다. 비늘을 쥐어뜯어 그 안의 살점을 쑤시고, 혈관을 뽑아 기차놀이를 한다.
뛰뛰빵빵. 기차 나가신다.
***
기차놀이고 하고, 줄넘기도 하고, 신나게 놀다가 캠프로 돌아오니 아침이다. 사람들은 벌써 일어나 아침을 차리고 캠핑 도구를 수거하고 있다.
분위기는 서먹하다. 어제보다 더 서먹해진 것도 같다.
나는 라팔에게 다가가 묻는다.
“무슨 일 있었냐?”
“싸웠어. 파티랑 외인이랑.”
“그런 일이 있었으면 연락을 했어야지.”
“했어. 했는데 안 왔어.”
그랬나? 기억을 되살려보니 중간에 나에게 간섭하려는 마력을 끊었던 적이 몇 번이나 있다. 과연, 연락했는데 내가 안 받은 거군. 이건 라팔이를 탓할 게 아니구나.
“내가 못 받은 거네. 미안하다. 그런데 뭐 때문에 싸운 거냐?”
“몰라. 그냥 싸웠어.”
“그냥?”
“싸우기 위한 싸움. 그런 느낌.”
어떤 싸움이었는지 알 것 같다. 논점은 흐리고 주제는 붕 뜨고, 서로 편을 갈라 팀의 결속을 위해서만 싸우는 그런 싸움.
“처음 시작할 때는 그래도 뭔가 있었지?”
“앞으로 어떻게 할까 의논하다가, 점점 논점 이탈.”
다리 병신, 상혁이는 실망이와 같은 파티 소속이다.
“결국, 말싸움만 하다가 끝. 결론 없음. 무의미.”
“리더는 뭘 했는데?”
“어디도 끼지 못하고, 중앙에서 우왕좌왕. 아무것도 못 함. 무능.”
“그렇겠지.”
그럴 것 같더라. 사소한 일 하나에도 의견을 맞춰가며 분쟁을 피하려는 놈이 한쪽 편을 들어 일을 키울 것 같진 않으니까.
다리 병신 때문에 일행의 속도가 느려졌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없다. 빨리 가고 싶어도 앞서가는 길잡이의 속도가 느리다.
나보고 길잡이를 하라는 말은 없다. 감히 그런 부탁을 하는 놈도 없거니와, 내 감지 능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계속 어필해왔다. 나는 한 번도 먼저 나서 몬스터를 잡은 적이 없다.
몬스터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잡은 것. 그게 떡밥이다.
실망이의 위치가 가깝다. 어제보다 나에게 더 붙어서 걷고 있다. 말도 많아졌다. 묻지도 않은 걸 계속 떠든다.
파티의 누가 누구와 친하며 누구와 분위기가 좋고, 누구와 누구는 잘 맞지 않은 것 같다. 등등 다양한 이야기를 한다.
사교성 좋은 애들이 이렇게 무섭다. 타인의 개인 정보를 술술 꿰고 있다. 무심한 척 귀 기울여 그 정보들을 기억해 차곡차곡 쌓아둔다.
오늘도 몬스터는 여전히 나온다. 탐색으로 살펴보니 어제보다 숫자가 더 많아졌다. 길잡이의 노력인지 만나는 몬스터의 숫자는 더 줄었다. 일행은 이제 더욱 뭉쳤고, 더욱 말이 없어졌다. 몸의 거리는 가까운데 마음의 거리는 멀다. 뱉는 말은 없고, 말은 없는데 몸으로 더 많은 것을 전한다.
사소한 동작, 걷는 사람 사이의 거리. 확연히 조심스럽고, 까탈과 짜증 섞인 몸짓.
서로의 동작에 조심하고, 나타낼 수 없는 미묘함이 남는다. 남아 퇴적된다.
10시간의 이동, 5번의 기습이 있었다. 한 명이 더 중상을 입어 팔 하나를 못 쓰게 되었고, 포션이 거의 떨어졌다.
저녁을 먹고 잘 준비를 하는 자리에서 상혁이가 말한다.
“날 두고 가.”
잡담도 없는 자리에서 그 말이 전하는 울림은 유난하다.
걱정, 안도, 죄책감. 다양한 감정이 사람들의 얼굴을 스친다. 콕 집어 표현할 수 없는 뒤섞인 얼굴이다.
실망이가 나선다.
“하지만.......”
“너도 알잖아. 여기서 가장 짐이 되는 건 나야. 이대로는 강원에 가기 전에 전부 죽거나 병신 돼.”
상혁이는 다리를 주무르며 무심하게 대답한다. 다쳐 잘 움직이지 않는 그 다리다. 가려진 상처처럼, 상혁이의 속마음도 그 무심함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열 길 물속은 쉬이 읽는 나도 한 길 사람속은 못 읽는다.
“내 선택이야. 네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상혁이가 다정하게 말한다. 실망이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말아쥔다. 손등이 핏줄이 돋아난다.
천천히 이동할 때는 괜찮지만, 빠른 대응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다리 병신인 상혁이는 그대로 짐이 된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짐.
“나도 남을게. 내가 있으면 어떻게든 몬스터를 피해 강원까지 갈 수 있을 거야. 길잡이는 한 명이면 충분하잖아?”
오. 작게 감탄한다. 멍하니 있던 라팔이도 흥미가 이는지 고개를 돌린다. 저 용감한 사람의 선택에 감탄한 것이 아니다. 상혁이와 함께 남겠다고 한 놈. 저놈이 바로 배신자 중 하나다.
실망이 파티에서 하나, 또 다른 그룹에서 하나를 더한 둘. 배신자의 소속이다.
후에 합류한 사람이 배신하는 건 그렇게 이상하지 않지만, 함께 지내던 실망이 파티에서도 배신자가 있다. 이게 내가 눈여겨보는 점이다. 배신자는 뭐가 아쉬워서 잘 지내던 이들을 배신하고 있다.
그런 배신자가 지금은 살신성인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동료들을 몬스터 밥으로 만들고 라팔이를 노예로 팔려던 놈들이 갑자기 회개하지는 않았을 거니 노리는 건 따로 떨어져 일을 벌이는 건가?
그러려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하고, 짐을 들고 움직일 수는 없을 테니 상혁이는 죽겠지.
배신자가 성인을 죽이려 한다.
살신성인이 아니라 살인성인(殺人聖人)이다.
============================ 작품 후기 ============================
살신성인에서 ㅅ 하나 빼면 살인성인. ㅅ이 이렇게 위험합니다.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