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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계
항상 느끼는 거지만 나와 라팔이는 파장이 잘 맞는다. 어디 부서진 것이 똑 닮았다. 부서진 부분을 고칠 수 없다는 점도.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왔다. 돌아갈 항구를 잃고 빛을 비추는 등대도 없으니 표류할밖에.
“움직일 때가 되긴 했는데. 어딜 가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래서 내 다음 목적지도 표류 중이다. 일주일을 기다릴 때는 그렇게 지루했는데, 막상 가려고 생각하니 목적지가 없다. 일주일간 뭐 했지? 멍때렸구나. 그러니 아무것도 안 나오지.
지금부터라도 목적지를 정하자. 세종. 세종으로 가자. 한국 국적을 달고 있는 도시는 몇 개가 있는데, 그중에서 세종이 가장 크다고 하더라.
“넌 여기 어떻게 왔냐?”
옆에 있는 라팔에게 묻는다.
“텔레포트.”
“오.”
귀찮게 걸어갈 필요가 없다니 그것 참 다행이다.
“어떻게 가는데?”
“몰라.”
“.......”
“텔레포트 마법은 잘 몰라.”
“세종시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몰라.”
좋아, 내 파트너이자 좆집께선 아무것도 모른답신다. 여행 계획은 전부 내가 짜야 하는군.
일단 지도를 꺼낸다. 마스터 혈 길드의 창고를 털며 지도를 몇 개 구하긴 했다. 비리 자료도 왕창 털었는데 결국 이건 쓸 일이 없었다.
이거 몇 개만 뿌리면 당장 도시를 공중분해 시킬 수도 있었는데 아쉽다. 아이들을 이용한 슈퍼 솔져 계획이라니 이놈들은 사실 악의 조직이 아니었나 싶다.
지도에는 신서울 주변의 위치가 상세하게 나와 있다. 신세종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세종뿐만 아니라 대구, 부산 등도 있다. 정확하게는 신대구, 신부산이다.
“이렇게 된 이상 걸어야지.”
가면서 중간계의 몬스터에게 익숙해질 수도 있고, 운이 좋으면 오크랑 싸워볼 수도 있다. 그러다 강림한 신을 만나면 더 좋고. 나쁜 선택은 아니다.
내가 걷자 라팔이 옆에 따라붙는다. 걸어서 하는 여행은 오랜만이다.
준비를 마치고 성벽을 나왔다. 성문에는 지키는 사람도 없다. 또 오크가 쳐들어오면 그대로 뚫리겠다.
텔레포트 마법은 나도 할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12명이 전쟁을 벌이는 미친 짓은 하지 않았다. 개인이 괴물이라도 산발적 게릴라에는 답이 없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안다. 질 싸움은 안 해.
이번 여행은 되도록 걸어갈 예정이다. 높은 곳에 올라간 다음 지평선을 향해 텔레포트를 쓰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이건 생략이 너무 심하다. 경치가 휙휙 지나가니 여행하는 맛이 없다.
중간계에서의 경험이 괴멸적으로 부족한 나에게는 더욱 좋지 않다. 이 여행은 경험을 쌓는 여행이기도 하다.
“챙길 거 다 챙겼지?”
“응.”
“나중에 뭐 사달라고 해도 못 사준다?”
텔레포트로 신서울로 잠깐씩 돌아오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지만, 그래도 그러면 여행하는 맛이 없다. 낮에 걷고 밤에 신서울로 돌아오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산책이지.
“나, 어린애 아냐.”
라팔이 뾰로통하게 말한다. 그래 봤자 얼굴은 무표정이다.
“네 평소 행실을 기억해라.”
“여행은 괜찮아.”
“그래. 난 책임 안 진다.”
라팔이 시선을 올려 날 바라본다. 이건 쏘아보는 거군. 얘 취급하는 게 그렇게 불만인가. 그렇게 봐도 난 해줄 말이 없단다. 고로 무시하자.
“가자.”
라팔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이 근처는 신서울의 영역이라 몬스터도 안 나오고 사람도 없어 재미가 없다. 여행 시작은 저 앞에서부터다.
텔레포트 하자 순식간에 시선이 변한다. 구름이 머리 바로 위에 있다. 내가 텔레포트한 장소는 허공이다. 위치 선정을 잘못한 건 아니고. 이렇게 공중으로 하는 게 더 위치 조정이 편해서 이렇게 했다.
라팔과 나는 하늘에서 떨어진다. 자유낙하하며 아래를 살핀다. 좋은 걸 발견했다.
아래쪽 저기에선 한창 사람과 몬스터가 싸우고 있다. 사람의 일방적 열세. 전멸은 확정적으로 보인다.
“시작부터 느낌이 좋아.”
“사람이 습격당하고 있는데?”
“그게 좋다는 거야.”
사람이 죽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 생겼다는 것이 중요하다. 습격당하는 사람들을 구해주면 자연스럽게 무리에 끼어들 수 있다. 적어도 평범한 상황보다 경계심은 줄일 수 있다.
효과는 보증한다. 몇 번 써먹어 봤다. 도망치는 귀족 영애의 습격을 지시한 뒤 내가 영애를 구해주고 정의의 기사인 척도 해봤다. 그건 잘 먹혔지.
적진 중앙까지 파고들어 반대 세력을 쓸어버릴 수 있었다. 참으로 친절한 영애였다. 속살도 쫄깃해서 좋았던 기억이 난다.
생각하는 사이 지상이 상당히 가까워졌다. 옆을 보니 라팔은 이미 휘날리는 치마를 한쪽으로 넘겨 붙잡고 있다.
라팔이 날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무게 중심을 옮겨 몸을 이동한다. 사람들이 습격당하고 있는 바로 위쪽이다.
점점 땅과 가까워진다. 셋, 둘, 하나. 낙하.
-콰강!
충격으로 다리가 찌릿 저리고 흙이 사방으로 튀어 사람과 몬스터를 덮친다. 셋 정도가 휘말린 것 같다.
괜히 입을 열면 군소리가 나올 것 같으니 우선 정리부터 해야겠다. 손짓 세 번에 43마리의 몬스터가 죽는다.
남은 사람들이 당황하는 기색이 그대로 느껴진다.
연기가 걷힌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우릴 본다.
“위험해 보여서 도왔는데, 방해되면 가줘?”
“아니, 아닙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눈치 빠른 하나가 재빨리 나에게 다가오며 말한다. 나는 놈의 눈을, 시선 처리를 살핀다. 살피는 시선은 아니다. 놈의 눈동자는 나를 똑바로 보고 있다. 잠깐씩 옆의 라팔에게 시선이 향하는 것 정도는 봐주자.
나야 경국지색의 미인을 여럿 안아보기도 했고, 자주 만지작 거리다 보니 익숙하지만, 우리 라팔이 미모는 조금 많이 비현실적이다. 인형 같은 미묘가 아니라 장인이 만든 인형 그 자체니 말이 필요 없다.
판단을 마친다. 일단 믿어 봐도 괜찮을 놈이다. 적어도 내가 싫어하는 난 놈 같은 부류는 아니다.
“어디로 가는 중이야?”
다짜고짜 반말인데도 남자는 눈썹도 까딱하지 않는다. 이건 제법이다.
“강원으로 가고 있습니다.”
강원, 중간에 들를 예정이던 마을이다. 도시보다는 작지만 나름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쉬어가는 역참 역할을 한다. 라는 것이 강원에 대한 정보다.
“신서울을 떠났나?”
이 거리라면 이들이 왔을 장소는 서울밖에 없다.
남자가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인다.
“서울에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이대로 세종까지 가볼 생각입니다.”
우연인지 목적지까지도 같았다. 머리로 어디까지 함께 갈지 계산하고 있으니 남자는 계속 말한다.
“혹시 세종으로 가십니까?”
“아니, 발 닿는 대로 가는 중.”
“그러면, 강원까지라도 저희와 함께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세종 중간까지 따라가 줄게.”
라팔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느긋하게 대답한다.
남자는 잠깐 라팔을 바라보더니 뒤돌아 동료들에게 다가간다.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저 사람하고 같이 가자고?”
“봤잖아. 그 무력. 수십 마리 텅을 한 번에 쓸어버렸다고.”
늑대의 몸에 머리 대신 커다란 원통형 입을 달고 있던 몬스터던데, 그놈이 텅이라는 이름인가 보다. 지금은 모두 시체가 되어 있다.
“그래도 처음 보는 사람을 어떻게 믿고.”
“그러면 우리끼리 강원까지 가자는 거야?”
나에게 안 들리도록 작게 말하고 있지만, 다 들린다. 아주 잘 들려.
이야기를 종합하면 대부분 찬성하고 있으나 몇몇이 반대하고 있다. 처음 만난 사람을 무슨 수로 믿느냐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들렸다.
“텅을 몰고 온 것도 사실 그 사람 아니야? 이런 산속에서 전멸 직전에 사람이 나타나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돼? 혜지는 저 사람이 떨어질 때 튕겨 나가서 다쳤다고.”
남자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팔이 돌아가선 안 되는 방향으로 돌아간 여자가 있다. 여자는 괜찮다며 고개를 젓는다. 그래도 남자는 멈추지 않는다. 언성이 점점 높아진다.
보자 보자 하니 나를 호구로 보고 있어. 이 새끼가 뒤질라고.
남자의 뒤로 빠르게 이동해, 머리를 잡고 땅에 찍어 누른다. 남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다. 대신 같이 있던 다른 사람들이 놀라 소리친다.
“내가 니 봉이냐? 호구야? 죽을 거 살려줬더니 지랄을 해요. 지랄을. 뒷담을 깔거면 안 들리게 좀 조용한 곳에서 까던가.”
머리를 꾸욱 누르고 돌리며 짓이긴다. 손맛을 보면 죽진 않았다. 코만 좀 뭉개졌다. 나에게 개기고 이 정도면 선방했다. 같이 다닐지도 모르는데 죽이면 뒷맛이 찝찝하잖아.
“왜? 꼽냐? 꼬우면 싸울까?”
공포에 질린 얼굴, 또는 적의의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히죽이며 말한다. 아, 정상인인 척 좀 해볼까 했는데 다 틀렸구만. 내 잘못이 아니다. 전부 날 건드린 쟤들 잘못이야.
내 말에 사람들은 뒤로 물러선다. 싸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얼굴에 드러난다.
담배꽁초처럼 갈고 있던 머리에서 손을 떼고 일어나 뒤로 물러난다. 한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같이 가자는 말은 아직 유용하니까, 선택은 잘하라고.”
라팔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니 라팔은 자리에서 한 발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미친놈?”
“돌직구 날리지 마라. 아프다.”
사실 전혀 안 아프다. 그런 말 듣는 건 익숙해서.
“어쩔 거야?”
“같이 가겠다고 하면 한적한 여행이나 즐기고.”
이미 그러긴 다 글렀지만, 그 점은 무시하자.
“아니면....... 한 놈 붙잡을까?”
그래서 자잘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고, 깔끔하게 헤어진 다음 강원으로 향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 서울을 떠난 무리가 저들 말고 더 있다면 그들 중 세종으로 함께 갈 사람을 뽑아도 괜찮겠다.
의견 수렴을 마치고, 처음 나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가 다시 다가와 말한다.
“강원까지 함께해 주십시오.”
“좋아, 언제부터 이동할 건데?”
“지금 바로 갈 수 있습니다.”
남자의 태도가 조심스럽다. 정중하다 못해 꺼리는 느낌. 정상적인 반응이긴 하지만, 약간 실망이다. 조금은 담력을 보여줬으면 했는데. 그런 심정을 담아 너를 실망이라고 부르마.
실망이는 친화력이 좋을 뿐만 아니라 리더쉽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망이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이 전장을 정리하고 짐을 싼다.
떨어져 있던 무기는 금방 정리되고 동료의 시체에 있는 것들도 회수한다. 텅의 시체를 간단히 도축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이놈 고기도 먹을 수 있냐?”
텅을 도축하는 여자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여자는 날 보더니 놀라 뒤로 기우뚱하더니 간신히 균형을 잡는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텅에게 고정한 채로 대답한다.
“혀가 맛있어요.”
여자가 텅의 입을 벌리고 혀를 뽑아 칼로 자른다.
“특히 구워 먹으면 맛있어요.”
“오늘 저녁은 혀 구이다. 준비할 수 있지?”
반사적으로 대답이 나온다. 맛있다잖아. 맛있다잖아! 그러면 먹어야지!
“아? 네, 네네.”
여자는 날 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거면 됐다. 난 가벼운 기분으로 또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닌다. 내가 가까이 갈 때마다 흠칫흠칫하는 것이 재밌어서 자꾸 기웃거리게 된다.
빠르게 정리를 마치고 이동한다. 빠른 걸음으로 산을 타고 넘는다. 두 사람이 앞에서 길잡이 역할을 하는데, 길잡이의 역할은 몬스터를 피하는 것이다.
미숙한 점이 많지만 그래도 길잡이들은 일행을 잘 이끈다. 그 증거로 밤이 되기까지 몬스터를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이렇게 잘 피하면서 아까 텅 무리는 왜 만난거람.
그 의문에 대한 답은 합류 이틀이 지난 시점의 밤에 알았다.
“저 미친놈을 어떻게 할 거야?”
“다시 텅을 유인할게. 독을 먹은 상태로 텅에게 포위당하면 3차 각성자도 못 버텨.”
열 명 조금 넘는 이 작은 무리에서도 배신자가 있다.
세상 참 요지경 신기한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