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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소환된 남자-30화 (3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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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계

내가 죽은 남자를 보고 낄낄 웃고 있자니. 라팔이 다가가 남자의 볼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른다. 라팔이 고개를 갸웃하곤 날 본다.

“뭘 했어?”

“으음....... 이걸 뭐라 해야 하나.”

으음....... 은 라팔의 전매특허였는데 이게 내 입에서 나오네. 진짜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뿐인데 거기에 막상 말을 갖다 붙이려니 어색하다. 여기 뭘 더 갖다 붙이겠다고 궁상이야. 그냥 말하자.

“하고 싶은 걸 했지.”

끄덕. 라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나 쪼르르 내 옆으로 온다.

“그거면 돼냐?”

“그거면 돼.”

“그러냐.”

라팔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는다. 라팔의 고개가 흔들린다. 우리 라팔이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라팔이 외모가 이렇지 않았다면 나한테 벌써 죽었겠지. 역시 세상은 외모가 전부다. 외모지상주의 만세다.

나는 라팔과 걷는다. 그 짧은 사이 도시를 태우는 불길이 더 늘어난 기분이다. 불길을 끄려는 사람은 없다. 자연히 불길은 꺼지지 않는다. 이 혼란도 꺼지지 않는다.

혼란을 꺼야 할 사람은 이미 전부 고혼의 객이 되었다.

“이 도시, 망하겠어.”

“내기 할래? 난 안 망한다에 걸 건데.”

“콜. 판돈은?”

대답은 시원스럽게 바로 튀어나온다. 얘 기억은 어떻게 되먹은 걸까. 무표정하게 저리 말하는데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닌 것 같다.

“하루 종일 기분 좋은 거 해줄게. 너는 뭐 해줄 건데?”

“이거. 줄게.”

라팔이 자기 왼쪽 가슴을 툭툭 건드린다.

“네 심장? 훠이훠이. 줘도 안 받아.”

최고급 인형이니 심장 재질도 평범한 건 아니겠다만, 뭘 썼든 내 심장보다 좋을까. 내 심장은 최고의 무한동력이라고.

라팔이 고개를 흔든다.

“으응. 내 목숨.”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이냐?”

“강간의 뜻만큼 확실히.”

강간당하면서 좋아하던 얘가 강간의 뜻을 알긴 뭘 알아.

“나 놀리는 거지?”

“아닌데.”

“내기 하나에 목숨을 걸겠다고? 이기든 지든 난 손해 없는데?”

정확히 말하면 확실히 내가 이기겠지. 난 질 내기는 안 한다. 설령 져도 그냥 하루 라팔이랑 놀아주면 끝이다. 남들은 체력이 달릴지 몰라도 나에게 침대에서 하루 뒹구는 건 우습다.

“그냥 내가 주고 싶어서. 아마, 사랑?”

얼쑤. 강간에서 피어나는 사랑이라. 로맨스도 이런 로맨스도 없다. 너무 달달해 남자 주인공이 당뇨 걸려 죽겠다. 강간당한 여자가 10년에 걸쳐 남자를 천천히 암살하는 거지. 차라리 그쪽이 더 와 닿겠다.

“하긴, 상식으로 널 생각하려 한 내 잘못이다.”

날 상대하는 적들을 보면서 미친놈을 상식으로 판단하려는 무식한 놈들이라고 비웃었는데, 내가 미친년을 상식으로 판단하려 하고 있었다.

목숨을 준다는데 주면 이유 재지 말고 고맙게 받아야지. 말뿐인 약속이라 해도 나한테 손해는 없고. 크게 생각하지 말자.

“우리가 직접 간섭하는 건 있다 없다?”

“없다.”

내가 나서는 것은 물론이고, 라팔도 약하진 않다. 라팔이가 나서면 혼란이 몇 시간 안에 정리될 것이다. 도시는 사라지거나 남겠지.

“그럼 지켜보기나 할까. 그 전에 밥부터 먹고.”

오지랖 아줌마의 식당을 찾아가니 놀랍게도 이 주변은 비교적 질서가 잡혀있다.

“어, 청년.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구나.”

“그게 단골한테 할 말이야?”

“좋은 게 좋은 거지.”

아줌마가 내 등을 탁 친다.

“어째 여기는 멀쩡하다? 밥은 되지?”

“단골인데 당연히 해줘야지. 들어와 들어와.”

나를 가게 안으로 밀며 아줌마가 말한다.

“가게 인맥들 모으니 대충 몸 지킬 정도는 나오더라. 덕분에 여긴 안전하지.”

가게 안으로 들어오니 마스터 혈 길드에 있던 요리사 아저씨도 있다. 역시 요리에 환장한 두 사람은 친분이 있던 건가. 아저씨가 나에게 알은 채 해서 나도 가볍게 인사한다. 도시가 이 꼬라지가 된 것이 나 때문이라는 건 모르는 눈치다.

“그런데 저 꼬마 아가씨는 누구야? 애인?”

“쟤 겉모습을 보고 말해라.”

“겉모습으로는 나이를 잴 수 없는 게 이쪽인데, 뭘.”

“나, 마흔셋.”

라팔이 끼어들어 말한다. 너 아까는 마흔넷이라며. 아줌마는 호호 웃으며 라팔의 머리로 손을 가져간다. 라팔이 머리를 피하자 아줌마는 미련 없이 손을 거둔다.

“그래그래. 그래서 뭘 만들어줄까?”

“이 지경이 됐는데 식량은?”

“손님 한 끼 먹을 정도는 있으니 걱정 마라.”

아줌마가 손으로 가슴을 탕탕 두드린다.

“찌개 두 개랑 밥. 김치. 고기 적당한 걸로. 너는?”

“같은 거.”

“조금만 기다려라.”

아줌마는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으며 주방으로 들어간다. 앉아 있던 요리사 아저씨도 함께 들어갔다.

뭔가 므흣한 상상을 하는 것 같은데, 분명 우리 관계는 아줌마가 생각하는 거랑 많이 다를 거야. 좆집과 주인이거든.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온다. 밖은 새벽이다. 음식 맛은 여전했지만, 양이 적어 불만이다. 아줌마가 기막힌 얼굴을 하며 텅 빈 냉장고와 식량창고를 보여주니 나도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딴 식당에는 없냐니까 딴 식당에서 빌려와서 이렇단다. 십 년 굶은 내 안의 식충이는 대단했다.

“그런데 두 사람 아는 사이야?”

그냥 아는 사이라 말하기엔, 둘이 주방에서 일하는 모습이 너무 익숙했다. 요리를 모르는 나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회귀 전에는 부부였지.”

나는 그 말을 듣고 많이 놀란다. 옆의 라팔도 눈을 크게 뜬다. 아저씨는 뭘 그런 것까지 말하냐는 투로 아줌마를 흘긴다. 그 이상 딱히 다른 말을 하지는 않는다.

“지금은?”

“요리의 길을 찾기 위해 잠시 별거 중이지.”

“그래?”

아줌마의 얼굴에 그림자가 끼지만 묻지 않고 나온다. 조금 걸어가고 있으니 아저씨가 살그머니 가게 밖으로 나와 혼잣말한다.

“아이가 하나 있었다. 중간계에서 낳은 아이였어.”

그 말만 하고 들어간다. 그 말만으로 상황을 짐작하긴 충분하다.

“회귀하면 아이 없어져. 완전히.”

“그런 건 알아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거란다, 라팔아.”

“응.”

라팔이 고개를 끄덕인다. 반성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안 하고 있겠지.

아이가 있었다. 그런데 회귀했다. 그러면 아이는 어디로 갔는가? 어디서 찾아야 할까?

미래의 나는 과거의 나를 잡아먹고 살아남는다. 미래의 아기에게는 과거가 없다. 미래의 아기는 있어도 과거의 아기는 없다. 아기에게 회귀는 없고, 돌아오지 못한다.

한 번 더 아이를 낳는다 해도 그 아이는 전의 아이와 다르다. 회귀한 순간 미래는 달라졌으니 자연히 태어날 아이도 달라짐이다.

미래에 태어난 아이들은 과거에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태어났을 아이들은 죽이지 않았는데도 죽었다.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죽었다. 죽어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살인적인 모순이다. 잔인한 모순이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이를 그리며 부모였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돌아오지 않는 아이를. 잡을 수 없는 그 작은 손을 상상 속에서 그리며

“모를 일이군.”

“모를 일이야.”

옆에서 라팔이 내 말을 따라 한다.

“내가 뭘 생각하는지는 알고 하는 말이냐?”

“몰라.”

“으이그.”

손으로 라팔의 머리를 강하게 문지른다. 요 귀여운 녀석. 문뜩 생각나 묻는다.

“너 기억은 있냐?”

“거의 없다. 드문드문, 영화 보는 것처럼 기억나는 게 전부. 내 기억이지만 나 아니야. 그래서 싫어.”

평소 단답으로만 대답하는 녀석이 말이 길다. 생각하는 바가 있는 거겠지. 미친놈도 생각하고 미친년도 생각한다. 생각하고 자기의 기준과 세계가 있다. 미친놈이 하는 말이니 틀림없다.

라팔도 자기 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기준으로 생각하겠지. 미친놈에게 미친놈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례가 아니지만 생각 없는 놈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례가 될 수도 있다.

“몸은 왜 바꿨는데?”

“병, 그리고 부상. 죽기 싫어서 재료를 모아 이 몸을 만들었다.”

생각해보면 얘도 참 기구한 인생이다. 전생은 어땠는지 몰라도 현생은 충분히 그렇다. 죽기 싫어 몸을 바꿨는데 기억을 잃었다. 그리고 동료의 원수에게 붙어 좆집 노릇이나 하고 있다.

“너도 참 살려고 애쓴다, 애써.”

“죽는 건 싫어. 그러니까 애쓴다.”

“그 맘 내가 알지.”

정말 잘 안다. 내 인생도 얘 인생과 비교해도 안 꿀리게 막장이다. 현재 진행형으로 막장으로 치닫고 있지.

라팔이 살짝 웃는다. 정말 보일 듯 말듯한 변화다. 그 표정은 금방 사라지고 무표정이 대신한다.

사실 라팔이 미친년이 아니고, 복수를 위해 미인계로 날 꼬시려고 나에게 맞춰주는 거라면 난 얘를 이길 자신이 없다. 무서워서 꽁지 말고 도망갈 거다.

그건 그런 웃음이었다.

대화가 끊어진다. 나는 생각하며 걸음을 옮긴다.

죽지 않았지만 죽은 아이.

잃어버린 라팔이의 기억.

내 신세.

이 도시.

생각의 간격을 넘나들고 서로 다른 생각 사이를 뛰어넘다 보니 막대기에 꽂힌 대가리가 날 반긴다. 마스터 혈 길드로 돌아왔다.

나는 내가 만든 붉은 의자를 찾아 않는다. 라팔은 당연하다는 듯 내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내 가슴에 등을 기댄다. 몸을 비비며 내 품으로 파고든다.

자연스럽게 손이 올라가 라팔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라팔은 더욱 몸을 비비며 나에게 파고든다.

이것도 나쁘지 않은데, 생각할 때였다.

하늘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하얀 섬광이 하늘을 뒤덮는다. 섬광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엔 거대한 푸른색 드래곤이 있다.

“포루시안.”

내 품의 라팔이 말한다. 저게 그 드래곤인가. 림돔팔이 죽고 하루도 안 됐는데 벌써 오다니 엄청 부지런한 놈이다. 조금은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드래곤이 날 본다. 내 안에 있는 저주를 꿰뚫어본다.

“너로구나.”

드래곤의 몸에서 마력이 뿜어진다. 마력이 나와 라팔을 억누른다. 마력으로 나와 승부하자고? 배짱도 좋은 놈이다. 그 승부. 받아주지.

나도 맞대응해 마력을 뿜는다. 각자가 뿜는 마력이 강해진다. 밀도를 높인다.

“인간 영웅을 죽인 자가 있다고 해서 와봤는데, 제법 하는구나 어린 인간이여.”

드래곤이 말을 한다. 이상한 언어로. 이젠 놀랍지도 않다. 썩은 세상 뒤져버려라.

마력이 높아진다. 라팔은 비켰는지 저만치 물러나 있다. 라팔이 말한다. 들리진 않지만 입 모양은 알겠다.

드래곤, 마력 엄청 많아.

지가 많아도 얼마나 많겠어. 적어도 무한은 아니겠지. 무한이 아니라면 나한테 못 이긴다.

시간이 흐른다. 나와 드래곤 사이에 마력이 쌓인다. 쌓인 마력의 압력만으로 사방이 일그러진다. 드래곤은 슬슬 힘에 부치는 눈치다. 파충류의 면상이 일그러진다.

나는 낄낄 웃는다. 내 몸에선 여전히 마력이 뿜어진다. 드래곤이 급히 마력을 보충한다.

이걸 그대로 뒤집어쓰면 나도 죽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한 양의 마력이다. 드래곤도 이걸 덮어쓰면 어떻게 될지 안다. 그러니까 저렇게 필사적으로 버틴다.

그러게 왜 마력으로 덤비고 그러니. 이 마력에 적당한 마법이 곁들여진다면 나랑도 해볼 만 했을지 모른다. 내 신체는 불사에 가깝지만 불사도 무력화하려 한다면 얼마든지 방법이 있다.

마력으로 싸움을 걸어온 게 네 실수다.

아슬아슬하던 균형이 무너진다. 쌓였던 마력이 드래곤에게 몰려간다. 그 몸을 때리고 부수며 지나간다.

너덜너덜해져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어진 드래곤의 사체 땅에 떨어진다. 나에게 날아오는 영혼을 흩어버린다.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보며 난 생각한다.

늙은 용이라는 게 이 정돈가. 제대로 싸우면 확실히 날 위협할지도 모르겠다. 이놈처럼 무식하게 마력으로 승부하는 것만 아니라면.

반신은 아니지만, 고룡을 잡았다. 이 세계의 수준도 대충 알 것 같다. 원하는 건 대충 이룬 건가.

이제 여행을 시작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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