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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소환된 남자-29화 (29/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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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계

라팔을 옆에 끼고 걷는다. 큰 구멍이 뻥뻥 뚫린 험한 지형을 힘들이지 않고 잘도 따라온다. 그런 모습이 대견...... 하긴 무슨 맨손으로 사람을 찢어 죽이는 얘한테 이게 어려울까.

“아.”

걷고 있던 라팔이 발을 멈춘다. 안 그래도 큰 눈이 똥그랗게 뜨여있다.

“왜?”

라팔이 내 멱살을 잡더니 입을 맞춘다. 야, 니가 아무리 발정했어도 때와 장소는 가리자!

아쉽게도 라팔이 하려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입을 따라 무언가 내 안으로 들어온다. 생소한 속성의 마력이다. 밀어낼까? 고민하다 그만둔다. 이 행위에 살기는 전혀 없다. 들어온 마력 자체가 적기도 하고.

내 앞에서 살기를 숨길 수 있다면 라팔은 인형술사가 아니라 암살자라고 불릴 거다. 마력은 내 몸을 한 바퀴 회전하고는 다시 입을 통해 라팔에게 돌아간다.

라팔이 입술을 뗀다 타액이 길게 늘어나다 끊어진다. 그사이 심심해 혀로 장난 좀 쳤다.

여기서 한 번 더 할까? 라팔이는 내 생각도 모르고 혼자 골똘히 생각한다. 라팔이. 라팔이. 이거 어감 참 좋네. 종종 써먹자.

생각하던 라팔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다시 내 멱살을 잡고 날 끌고 간다.

“야야야. 갑자기 뭐야?”

“여기 있으면 죽어. 도망 가야 해.”

“왜?”

“드래곤이 와. 늙은 놈으로.”

“왜?”

“림돔팔이 죽어서.”

대사가 연결이 안 된다. 머리 다친 얘 상대로 논리적인 대화를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차근차근. 하나씩 물어보자.

“드래곤이 왜 오는데?”

“림돔팔이 죽어서.”

“림돔팔이 죽으면 왜 드래곤이 오는데?”

“으음......?”

으음, 이 아니고 이년아. 이유를 말해 이유를. 이러다 화병 나 죽겠다. 화병이 도지기 전에 열이나 좀 식히자 내 멱살을 잡고 있는 팔 아래로 손을 뻗어 라팔의 멱살을 잡는다 그대로 팔을 당기자 라팔의 얼굴이 따라온다.

라팔의 입술에 나는 입을 맞춘다. 작은 입술을 삼킬 듯 거칠게 덮고 입술을 열어젖힌다. 이빨 사이에 혀를 집어넣는다. 혀로 혀를 감다가 이빨을 빨다가 침을 저쪽으로 넘긴다.

라팔이 소심하게 내민 혀를 깨물고 빨기도 한다. 한참이나 그러니 조금은 화가 풀린다. 입술을 떼자 라팔이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빤히 본다.

“기분 좋아.”

“그러냐.”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라팔이 내 멱살을 당기고 다시 입술 박치기를 사용한다. 너무 힘이 강해 이빨 깨질 뻔했다.

라팔이는 적극적으로 한참이나 딥키스를 이어간 후에야 만족한 듯 환하게 웃으며 내 멱살은 놓아주었다.

“좋냐?”

“응.”

좋겠다, 그래. 체감상 30분은 키스한 기분이다. 내 입안에 고인 침이 내 침인지 쟤 침인지 모르겠다. 어째 단맛이 나는 것도 같은데. 라팔이 침인가. 음식에도 쓸 수 있으려나.

“만족했으면 하던 일이나 계속하자. 아니아니. 벗지 말고!”

하던 일이라는 말에 라팔이 옷을 벗기 시작해 급히 말린다. 어째 아이 키우는 부모가 된 기분이다. 이거 반대로 역할이 반대로 되었다. 분명 쟤가 내 좆집이고, 내가 라팔이 주인일텐데.......

“그 아저씨가 죽으면 왜 드래곤이 오냐고,”

“용이 오니까?”

“그러니까. 그 용은 무슨 볼일이 있어 오는 건데.”

라팔이 날 삿대질한다. 우리 라팔이가 하는 일이니 자각은 없겠지만, 이거 기분 나쁘단다 라팔아.

“너, 죽이러.”

“왜, 날. 죽이러. 오는. 건데.”

“약속했어.”

“무슨 약속?”

“우응.......”

우응, 이 나왔다. 좋아. 뭔가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려 한다. 벌써 라팔이 습관까지 꿰어가고 있다. 진짜 보호자가 되가고 있어.

“포루시안하고 싸웠는데 림돔팔이 봉인해서 이겼다. 그리고 3개의 선물을 받았고, 포루시안이 림돔팔의 복수를 해주기로 했다.”

“포루시안이라는 드래곤이랑 싸웠다?”

끄덕.

“싸워서 이겼고.”

끄덕끄덕.

“람돌팔을 인정한 포루시안이 나중에 그가 죽으면 복수를 해주기로 했다?”

끄덕끄덕끄덕.

“나는 그런 거 못 느꼈는데?”

“저주. 먼저 알면 저주 아니야.”

이건 알아듣겠네. 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아갈리에서 저주는 몰래 거는 것이 정석이었다. 저주라는 것 자체가 상대를 말려 죽이는 건데, 저주를 상대에게 알려주는 것은 말려 죽이려는 대상에게 너 말라죽고 있으니 빨리 물 찾아 마셔! 하고 말해주는 꼴이다.

즉, 중년 아저씨가 죽으며 나도 모르는 사이 나에게 저주가 걸렸고, 그거 때문에 드래곤이 찾아온다는 소리렷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걸렸다는 게 조금 충격이다. 검은 상자도 그렇고 그 아저씨한테만 두 방 얻어맞은 셈인가.

흐음. 이번에는 잘 풀렸지만 다음부터는 조심해야겠다. 마침, 그런 쪽의 프로도 내 앞에 있다. 화병만 버티면 라팔이에게 정보를 얻을 수도 있겠지.

“그 드래곤이란 놈은 언제 오는데?”

“몰라. 온다고만 했어.”

“이 저주 못 풀어?”

“나는 못 풀어.”

“그럼 감지하는 법을 나한테 알려주는 건?”

라팔은 인현술사고 나는 마법사다. 라팔이가 못 풀어도 나는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계산이다. 라팔은 대답 대신 다시 내 멱살을 잡고 입술 박치기를 한다. 소심하게 보이는데 행동할 때는 참으로 거침이 없다.

입술을 타고 들어온 마력이 내 몸에 퍼진다. 아까와는 느낌이 다르다. 나에게 가르쳐주려고 하고 있구나. 이런 건 조금 얌전하게 해주면 안 될까. 이 터프한 꼬맹아. 나도 모르게 두근거리네.

“흐음, 이런 건가.”

대충 알겠다. 요령만 알면 감지 자체는 쉽다. 그 요령이 머리 터지게 복잡하다는 것만 빼면. 나니까 이거 한 번에 익혔지. 머리 나쁜 사람은 평생 가르쳐 줘도 못 한다.

우리 귀여운 라팔이도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날 본다.

“혹시, 너. 천재?”

“천재라기보다는 괴물이지.”

“응, 그 사이즈. 괴물.”

왜 눈이 아래를 보고 있니 라팔아.

“내 아들은 괴물이 아니라 샷건이란다. 그런데 그 너라는 호칭 어떻게 안 되냐?”

“그러면 뭐라고 불러?”

“너는 내 좆집이니까. 내 도구다. 주인님이라고 불러라.”

“응, 주인님.”

이 미친 대화는 뭘까. 라팔이를 상대하면 나까지 이상해지는 기분이다.

대화는 잠시 뒤로하고, 이걸 어떡한담. 라팔이 풀지 못한다고 했던 이유가 있다. 마력으로 만든 낚싯줄로 내 영혼을 칭칭 묶어 꼬아둔 것 같다고나 할까, 쉽사리 풀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런 저주가 나 몰래 나에게 걸렸다니 가볍게 소름이 돋는다.

“일단 가자.”

“저주는?”

“놔두련다.”

여기서 이러쿵저러쿵해서 풀릴 저주가 아니다. 나중에 날 잡고 연구해봐야겠다. 나는 연구랑은 연이 없는데, 쩝.

라팔과 걸어 마스터 혈 길드의 경계에 도착한다. 무너진 담장이 정리도 안 되어 방치되고 있다. 나는 적당한 나무 막대를 찾아 돌더미 사이에 세운다. 아공간에서 구멍동서의 머리를 꺼내 거기 꽂는다.

무너진 건물더미에서 목판도 찾아 글자도 새긴다.

-피의 주인. 무너지다.

좋아. 적당한 마무리다. 을씨년스러운 게 딱 내 취향이다.

“가자.”

“응.”

내 옆으로 라팔이 쫄래쫄래 따라붙는다. 우린 거리로 나간다. 폭음과 비명이 가득한 거리로.

***

며칠 전까지 평화롭던 거리가 난장판이다. 눈에 보이는 불길만 10개는 된다. 약탈에 방화에 살인까지. 내가 세기말에 왔나 싶다. 세기말은 참으로 살기 좋구나. 마치 나를 위한 장소 같아 친숙하다.

내 동행자도 매우 신색이 편안하시다. 가끔 라팔을 노리고 덮치는 간 큰 놈들이 있는데, 그놈들은 라팔의 발길질 한 번에 고자가 되어 땅을 뒹굴게 되었다. 벌써 다섯 놈이나 그렇게 됐다.

“어디가?”

여섯 번째 피해자를 만든 라팔이 묻는다.

“신의 메아리.”

“?”

전혀 모른다는 얼굴이다. 하긴, 얘가 뭘 알겠어. 그냥 가라 하니 왔겠지. 아니, 안 그럴지도 모르나. 그런 것치곤 난 놈이 죽었다고 했을 때 꽤 충격받은 걸로 보였었다.

“김백령이랑 무슨 관계야?”

“전 애인? 회귀 전에 날 지키다 죽었어.”

“넌 그 애인의 원수 좆집이나 하고 있냐? 복수는?”

내가 기막혀 묻는다.

“애인 아냐. 아마도? 내 머리를 고칠 수 있을지도 몰랐는데 죽었으니 조금 충격. 이제 괜찮아.”

난 놈아. 난 놈아. 김백령아. 너는 이래도 괜찮았니? 갑자기 난 놈이 불쌍해진다. 니가 목숨 걸고 지킨 여자는 내가 잘 써먹고 있단다. 좆집으로.

죽은 난 놈이 관 뚜껑 박차고 나와도 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래.

회귀 전에 있었던 일이니 엄밀히 말하면 그때의 라팔과 지금의 라팔은 조금 다른가? 그래도 난 놈이 불쌍하다는 것은 안 변한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라팔은 라팔이니까.

우리를 덮치는 간 큰 놈들은 꾸준히 나왔다. 내가 풀어버린 마검도 있었다. 마검의 소유자는 내 앞에 섰다가 날 보더니 황급히 달아났다.

먼저 건드리지 않았으므로 나도 순순히 보내줬다. 잠시 뒤 마검을 쫓는 사람들이 한 다스나 지나갔고, 몇 놈이 우릴 공격해서 곱이 접어 보내주었다. 허리를 접어 천국으로 보내줬다.

산전수전 겪으며 나는 신의 메아리 길드에 도착했다. 빈민이 말했던 대로, 여기도 이미 엉망이다. 흰색 건물들이 무너지고 벽과 기둥만 딸랑 서 있고 파편들이 근처에 떨어져 있다.

무너진 건물 사이에는 시체들도 있다. 대부분이 검은 옷을 입고 있다. 얼핏 기억나는 지구의 성직자들이 저런 옷을 입고 있었다.

“왜?”

라팔이 내 소맷자락을 당기고 있다. 물으니 라팔은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킨다. 건물 잔해가 쌓여 있는 장소라 그냥 보기엔 아무것도 없다. 그 아래 사람이 파묻혀 있고,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걸 여길 다녀간 몇이나 알았을까.

잔해를 치우자 죽기 직전의 사람이 나타난다. 얼굴 반이 무너져 오래 살긴 글렀다. 내 피면 살리다 못해 펄쩍 뛰게도 할 수 있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을 살려줄 정도로 내가 호인이 아니어서.

“어이. 어어이.”

대충 뺨을 때워 깨운다. 남자가 간신히 눈을 뜬다.

“내 말, 알아들어?”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동작 하나도 남자에게는 힘겨워 보인다.

“왜 이렇게 된 거야? 유언 정도는 들어줄 테니 말해봐.”

유언을 말하라는 것과 이렇게 된 이유를 말하라는 건 서로 상충하는 요구인가? 알아서 하라지.

“갑자기. 우리의 모든 힘이 사라졌다. 길마는.......”

남자가 힘겹게 입을 연다. 그 내용은 다행히 내가 원하는 내용이다. 남자는 잔기침을 몇 번 하고는 다시 입을 연다.

“우리를 불러 모아 문을 걸어 잠그셨다. 그리고 우리는 원인 규명에 들어갔지.”

“그래서?”

“원인을 밝혀냈다.”

“거 참 큰일을 하셨수다. 어째 그 원인이 뭔지 나도 알 것 같은데.”

내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남자는 입가를 끌어올려 웃는다. 웃음은 금방 고통에 일그러진다.

“신은 죽었다. 신이 죽었으니 신성력이 전해질 리 없지.”

남자가 씁쓸하게 웃는다. 이번 웃음은 얼굴에 걸린 고통과도 잘 어울린다.

“우리는 침묵했고, 거의 동시에 폭도들이 쳐들어왔다.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신을 모시는 다른 사람들은 이 정보를 모를지도 모른다. 할 수 있다면....... 세종으로 가 이 소식을 알려다오.”

자기 할 일은 다 끝냈다는 듯 남자는 편히 눈감는다. 의무를 다하고 편히 죽으려는 모습이 아니꼽기 그지없다.

누구는 아직 개고생하며 구르고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내가 구르고 있지. 신을 쳐죽이느라. 아직 하나밖에 못 죽였는데 얼마나 더 있으려나.

손가락을 남자의 이마에 댄다. 그리고 마법을 사용한다.

보여주는 것은 환각.

그 근원은 내 기억.

그때 그 모습.

쓰러져 죽어가는 신의 모습이다.

상반신 반과 얼굴의 반이 날아가 처참하게 죽어가는 신.

죽어가던 남자가 눈을 부릅뜬다.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나를 삿대질한다. 실핏줄 터진 눈이 붉게 물들어간다.

분노에 찬 형상으로 남자가 고함을 터뜨린다.

“네놈이! 네놈이이이이! 이 불경한자가! 불경한 자가아아!”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른다.

내가 보여준 장면은 딱 두 개다. 여신이 자기를 소개하는 장면과 여신이 죽어가는 장면.

사실 나는 인류의 인생을 시궁창에 처박은 장본인을 죽인 것이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진실? 엿이나 먹으라지. 난 이놈이 만사 포기하고 편하게 죽는 것이 꼴 보기 싫었을 뿐이다. 내가 인류의 영웅이라는 것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남자는 나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는다. 욕설은 마지막에 들리지도 않는 옹알이로 변한다. 그래도 남자는 삿대질을 멈추지 않고, 욕설을 멈추지 않는다.

남자가 죽자 시체는 그대로 뒤로 넘어간다. 시체의 눈은 여전히 뜨여져 있다. 시체의 눈에는 피눈물이 흐른다.

아, 다행이다. 곱게 죽진 않았어.

============================ 작품 후기 ============================

사바트..... 그 영역은 제가 감히 넘볼수 없는 성역입니다. 어디서 저같이 평범한 사람이 그분에게 비빕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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