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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계
중년 남자, 림돔팔이 축 늘어졌다. 그가 숨을 가늘게 뱉으며 말했다.
“다행이군. 먹혔어.”
“림돔팔, 꼭 입방 시간 결계까지 써야 했습니까?”
림돔팔 옆에서 청년, 라이켄이 묻는다. 림돔팔은 라이켄을 빤히 바라봤다. 라이켄도 지지 않고 림돔팔을 바라봤다.
입방 시간 결계는 림돔팔이 가진 비기 중 하나다. 검은 입방체 안쪽은 이쪽과는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그 배율은 수십만 배에서 수천만 배까지 가능하다.
입방 시간 결계는 대상은 그 시간 동안 아무것도 없는 검은 상자 속에서 홀로 버텨야 한다. 대부분은 굶어 죽는다. 살아남아도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만한 효능을 가진 만큼 입방 시간 결계는 많은 대가가 따른다. 아마 림돔팔은 돌아가서 당분간 요양해야 할 것이다. 라이켄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사에 독, 대단한 놈이긴 하지만 시간을 들이면 못 잡을 것도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림돔팔이 몸을 망칠 필요까진 없었다.
“감이었다. 쓰지 않으면 죽는다는 감. 그게 아니더라도 여기서 시간을 끌면 라팔의 케어는 누가 하지? 나야 몸을 추스르면 되지만, 여기서 시간을 끌면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라이켄은 그제야 라팔을 떠올렸다. 저자가 보여준 모습이 너무 인상 깊어 잊고 있었다.
불기둥은 아직 올라오고 있었다. 저 안에 라팔이 있다. 목이 꺾이고 불에 탄 거 가지고 그녀가 죽을 리가 없다. 그녀는 죽여도 죽지 않으니까.
다만, 죽는 일이 일어나면 조금 곤란해진다. 통제 잃은 본능이 어디로 튈지는 영혼술사밖에 모른다. 그리고 그 영혼술사는 지금 없다.
“저건 뭐지?”
마스터 혈 길드의 마스터 무백촌이 두 사람에게 다가와 물었다. 림돔팔이 질문에 답했다.
“결계요. 한 번 걸리면 용족이라도 치명적이지.”
“반드시 죽는 건가?”
“인간이라면 반드시.”
무백촌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결계보다는 대상이 죽고 사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만약 죽어 있다면 되살려서라도 죗값을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간단히 풀릴 화가 아니었다.
지원군이 와서 검은 입방체를 중심으로 포위망을 재구성했다. 더욱 탄탄하고, 더욱 유연하게. 무백촌이 지원군을 데려온 간부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늦었지?”
“빈민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손이 남는 부대는 전부 가서 폭동을 진압하는 중입니다. 거기다 마검까지 날뛰는 통에 여유 인력이 없습니다.”
“신의 메아리는?”
“그게 저.......”
신의 메아리는 사태가 이 지경이 되어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무백촌은 들고 있던 할버드의 손잡이를 땅에 내려찍어 불쾌한 심정을 드러냈다.
그는 이 일이 끝나면 신의 메아리에 강하게 항의할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이권도 몇 개 얻어내고 말이다.
“안쪽에선 수십 년이 지났을 거요. 이제 열지.”
작은 골방 크기의 검은 입방체가 위쪽에서부터 사라져갔다. 위쪽부터 차례차례 반듯이 접혀가고 있었다. 입방체는 빠르게 접혀 사라졌고, 갇혀 있던 대상의 모습이 머리부터 드러났다.
안에서 드러난 무언가를 보고 라이켄은 말을 잃었다.
***
위에서 태양이 들어온다. 잠깐 실명했다가 눈이 재생되어 이내 앞이 보인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십 년? 백 년? 일단 삼 년은 확실히 넘었다. 쓰고 있던 시계가 삼 년이 넘어서 고장 났으니 이건 확실하다. 그런데 시계는 어디 갔지? 아, 먹었구나.
맛은 있었던가? 없었던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손톱은 맛없었다. 손가락은? 두 개가 없는 것 같긴 한데 맛은 기억 안 난다. 다시 먹어볼까? 관두자.
그리고 또....... 다음에는?
잤던가? 깼던가? 숨은 쉬었나? 안 쉬었나?
모르겠다. 결계를 부수려고 했던 것이 간신히 기억난다. 결계가 좁아 부수다가 내 몸도 같이 부술 것 같아 그만 뒀었다. 그것 말고는 전부 깜깜하다. 이럴 거라면 차라리 죽을 걸 그랬나.
검은 벽이 사라지며 앞이 보인다.
그리고 저건. 음식이다. 고기.
“퉤.”
맛없다. 다른 건? 역시 맛없다. 좀 맛있는 걸 먹고 싶은데. 아, 시끄러. 주변이 시끄럽다.
“저희 조명히 조금 하서 살지 만두?”
....... 이거 이상하다.
“하, 이 대게가 뭔지?”
... 이런 말이 아니었을 건데. 내가 말을 얼마나 안 했지? 생각은 똑바로 하고 있나?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쑤셔 넣는다. 존나게 아프다. 휘적휘적. 뇌가 곤죽이 된다. 곤죽이 됨과 동시에 회복된다.
언어가 떠오르고 생각하는 법이 떠오르고 기억이 떠오른다.
우웩. 손가락 맛없었어.
주변도 보이기 시작한다. 주변에는 어딘가 한 군데가 뜯긴 놈들이 발버둥 친다. 뜯긴 모양이 꼭 누가 베어 먹은 것 같다. 그리고 내 입안도 핏기가 가득하다. 이빨에도 뭐가 끼어 있고. 손으로 입가를 닦으니 피가 나온다.
제길. 못 먹을 거 먹었다.
내 손은 또 왜 이래? 손가락이 두 개밖에 안 남았다. 반대쪽 손은 더 가관이다. 중지 하나만 딸랑 남아 있다. 이거 욕하기 좋겠다. 갔다 대기만 하면 퍽유! 앞쪽에 상콤하게 욕을 날려준다.
계속 내 몸을 살핀다. 상의는 어디 가고 없다. 하의도 팬티 하나 달랑 있다. 그래도 알몸이 안 됐다는 점에서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 팬티는 그래도 안 먹었구나.
팔뚝에는 할퀸 자국과 뜯어먹은 자국이 가득하고 배를 보니 푹 들어간 게 장기도 몇 개 없는 것 같다. 용케 안 죽고 살아 있네. 이런다고 죽을 것 같지도 않다만.
“씌벌.”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야? 손톱 맛하고 손가락 맛은 기억나는데 곱창 맛은 나도 기억 안 난다고. 그 정도로 맛이 가 있었던 건가? 몇 년이 지난 거야, 이거.
심장이 마력을 힘차게 한 번 뿜으니 살이 자라고 장기가 생겨난다. 곱창이 새로 들어찬 꽉 찬 느낌의 아랫배를 어루만진다. 묘한 만족감이 느껴진다.
고개를 들어 다른 놈들을 보니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 충격과 공포다 그지 깽깽이들아. 꼭 그런 표정이다. 나는 크게 웃는다. 그리고 말한다.
“뭘 봐? 사람 처음 봐?”
“어떻게.......”
소리 난 방향을 돌아보니 초록 머리가 망연한 표정을 하고 있다.
“어떻게? 다음에 뭐?”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지? 질문 많잖아? 어떻게, 라는 한 마디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도 무슨 대답이 오더라도 내 대답은 하나다.
내 맘.
사람을 죽이는 것도, 사람을 먹는 것도,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모두 내 의지다. 진정으로 죽고 싶었다면 저 안에서 자살이라도 했겠지.
“어떻게 너 같은 자를 우리가 모를 수 있지?”
초록 머리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질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절묘하게 핵심을 짚고 있기도 하다.
나는 회귀하지 않은 자이며 끼어든 자이다. 이 세계의 신을 죽인자이며, 시스템으로 나타낼 수 없는 자이다. 내 존재 자체가 버그다. 세상에 끼어든 이물질.
과거를 얼마나 알고, 현재를 얼마나 안다고 한들 나에 대한 것을 알 리가 없다. 나는 세계와 괴리된 존재이기에.
저 질문은 내 존재에 대한 질문이며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을 꿰뚫어 설명을 요구하는 그런 질문이다.
질문은 예상과 다르지만, 그래도 내 대답은 같다.
“내 맘.”
틀린 말도 아니다. 내가 알려주지 않으면 저들은 나에 대해 모른다. 나에 대한 정보는 모두 나에게 있다.
“그게 무슨.......”
초록 머리가 말끝을 흐린다. 흐려지는 말꼬리를 따라 수십 개의 목숨도 흐려진다.
옆에서 날아온 빛줄기가 포위한 한쪽을 쓸어버린다. 포격에 맞은 사람은 시체도 남지 않고 소멸한다.
이건 내가 한 거 아니다.
빛이 날아온 방향을 보니 목을 꺾고 불태웠던 소녀가 이쪽으로 손을 내밀고 있다. 그 모습이 심상치가 앉다.
알몸인 소녀의 몸에는 마력의 실이 무수히 연결되어 있었고, 그건 또 하늘에 있는 십자모양 나무 막대로 연결되어 있다.
저거 비슷한 걸 어디서 봤는데...... 생각났다. 인형극에서 인형에 연결해서 쓰는 그거다. 깨닫고 보니 깨닫고 나니 소녀가 보이지 않는 손에 조종당하는 인형처럼 보인다.
소녀의 팔이 움직인다. 횡으로 크게 그으니 내 오피스텔이 잘려 넘어간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 마스터. 모든 병력을 물리시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을 거요.”
“저건 뭐냐! 어떻게 된 일이지!”
중년 아저씨가 마스터에게 말하고 마스터가 찡그리고 반박한다. 그 사이에 소녀는 포위망에 뛰어들어 학살을 시작한다.
소녀는 무표정하게 몸을 움직인다. 아니, 소녀가 아니라 소녀의 몸에 연결된 실이 움직인다. 잘 보면 목도 아직 부러진 상태고, 몸 여기저기도 그을려 있다. 저런 그을림은 인간의 몸에선 나오지 않는다.
“휘유.”
알바어쩌고에는 인간이 아닌 것들도 받는 건가. 아무렴 어때.
이것저것 너무 복잡해졌으니 좀 치워야겠다.
터져라. 쾅!
지하에 설치해둔 마법진이 서로 공명해 연쇄 폭발을 일으킨다.
눈부신 빛과 함께 굉음이 터져 나오고 열풍이 덮친다. 폭발은 길드 지부 전역을 뒤덮고 있을 거다. 이걸로 마스터 혈 길드는 완전히 날아갔군. 밖에 나가 있는 병력이 있으니 그쪽에 따라서 다르려나.
나도 폭발의 범위 안에 있지만 크게 문제는 없다. 자폭할 건도 아닌데 나도 못 버틸 공격으로 함정을 설계하진 않는다.
폭발이 사그라들고 연기가 바람에 날려간다. 남은 것은 온통 시체다. 간신히 형체를 유지한 시체부터 다진 고기가 된 시체까지 다양하다. 토막 나고 잘게 다져진 시체와 피가 하늘에서 후드득 떨어진다.
아직 서 있는 자들도 있다. 마스터와 길드 간부로 보이는 몇몇. 그리고 인간 아닌 소녀와 알바어쩌고의 둘도 건재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간단해졌어.”
나, 소녀, 알바어쩌고와 마스터 혈. 이렇게 삼파전이다.
알바어쩌고는 소녀를 신경 쓰는 듯하니 둘이 놀라고 놔두고, 난 반신이나 죽여야겠다.
땅에 꽂혀있는 전백귀후십귀를 뽑는다. 얘랑 대화도 많이 했었지. 있지도 않은 검과의 친분이 다져진 느낌인걸.
이번에는 후십귀 모드다. 전백귀는 너무 쌔다.
마스터는 날 노려보고 있다. 노려봐도 난 안 죽으니 행동으로 보여줬으며 싶은데. 안 오면 내가 먼 저 간다.
다가가 검을 휘두른다. 칼질 한 번에 땅이 갈라진다. 생존에 필요한 마력은 대단치 않다. 그리고 내 심장은 마력을 무한으로 뿜어낸다. 검은 상자에 갇혀 있는 동안 내 몸에는 마력이 응축되었다.
그것만으로 내 신체 능력은 평소의 십수 배에 달하고 있다.
내 공격을 피한 마스터가 비슷하게 할버드로 공격한다.
땅과 할버드가 충돌하자 지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며 갈라진다.
비슷한 위력의 공격이 연달아 날아온다. 공격 하나하나에 공기가 진동한다. 그런 공격이 연타가 되니 작은 폭풍이 된다. 사람이 들어오면 찢기는 것은 물론 마법도 통하지 않겠다.
나는 검만 슬쩍슬쩍 움직여 그 공격을 막는다.
할버드가 복잡기괴하게 움직인다. 저 큰 할버드가 어떻게 저렇게 움직이는지 휘고 꺾이며 내 빈틈을 노린다. 넘치는 마력이 아니었다면 근접전으로는 밀렸겠다.
나와 마스터 사이에 오가는 힘의 흐름이 점점 강해진다. 마스터의 힘은 끝을 모르고 상승한다.
힘을 다른 방향으로 해소하지 않았다면 이 주변 지반이 무너질 정도의 힘이다. 이미 허공에는 국지적인 허리케인이 만들어져 주위 모든 것들을 빨아올리고 있다. 부서진 건물의 잔해와 흩어져 있는 시신들이 허리케인을 타고 올라가 섞인다.
강하다. 강하긴 한데. 이거면 너무 약하잖아.
마법을 사용한다. 넘치는 마력을 이용한 마법은 역시나 강하다.
허리케인을 뚫고, 허공에서 마법이 떨어진다. 마스터가 몸을 피하지만 팔뚝을 스친다. 이어서 수백 발의 마법이 떨어진다.
놀이는 끝. 이제 본업으로 놀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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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은 봉인 안에서 먹은 맛없는 식사가 불만이시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