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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소환된 남자-23화 (23/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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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계

이 세상에선 모든 지성체가 하나의 공용어를 가진다. 이 언어는 태어나면서부터 상태창에 각인되는 기능으로 인간, 오크, 수인 할 것 없이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자연스럽게 이 언어를 사용한다. 대신 각 종족의 문자는 모두 다르다.

지구인이 소환된 자리 근처에는 던전이 나타나며, 던전은 몬스터를 끌어들인다. 인류의 주 자원은 자연과 몬스터에게서 나온다.

이 세계엔 마법도 있고, 무술, 중국인들 때문에 무공이라고 주로 불리는 것도 존재하며, 진명이나 기능을 통한 초능력이라고 봐도 좋을 것들도 존재한다.

기능 부분에서 딱 떠오른 게 바로 대장장이 영감의 기술과 눈썰미다. 우라늄을 만져보고 알아보는 것이 지나치게 이상하다 싶었다.

해골이 말한 건 대충 이 정도다. 내가 궁금한 것도 이 정도고. 아니, 아직 하나 더 남았구나.

“신을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지?”

“신, 신이라.”

해골이 염주를 돌린다. 한 시간 정도의 대화에서 봤는데, 이게 생각하는 해골의 습관이다. 아님 말고.

“오크들이 수시로 강신 의식을 치르고 힘을 받고는 하지.”

“그 오크들은 어디 가면 볼 수 있고?”

“몰라.”

아쉽지만 단서를 얻은 것만으로 만족하자.

반 가까이 타들어 간 초는 여전히 희미한 밝기로 골방을 밝힌다. 해골의 모습은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지 않다. 지친 기색이라곤 없다. 저 체형과 다르게 의외로 체력은 있다.

마지막 고민이다. 저걸 살릴까. 죽일까. 내 고민을 알아챈 건지. 해골이 다시 묻는다.

“당신은 어려운 사람이요? 쉬운 사람이요?”

내게 처음 했던 그 질문이다. 내 대답도 처음과 같다.

“어려운 사람이지.”

덕분에 대답이 정해졌다. 난 어려운 사람이고, 되도록 신중할 필요가 있다.

손을 까딱이니 해골의 목이 떨어진다. 흙으로 되돌아가라 해골바가지. 다 좋았는데 넌 마지막 질문을 그르쳤어. 밥은 먹었냐? 라던가, 맛있는 음식점이 안다. 라고 했으면 난 십중팔구 이 녀석을 죽이지 않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오늘은 기분이 괜찮으니 가볍게 살려줬을지도 모른다. 난 때에 따라 무겁고 가볍고 자유롭다. 내 양심을 건드린 것이, 나에게 내가 누군지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준 것이 놈의 패인이다.

뭐든 꿰뚫어 볼 것 같은 눈으로 염세주의자 놀이를 하더니 결국 마지막에 이 꼴이군.

해골의 시체를 방치하고 다시 긴 통로를 따라 나온다. 밖으로 나오니 비명은 그쳤다. 대신 피 냄새가 감돈다. 비명은 이제 저쪽 멀리 가 있다.

좋아, 이 근처에는 아무도 없다. 돌아가자.

***

마스터 혈 길드의 스카우터 한백남은 간부 회의에 와 있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것이 아닌, 오늘 아침 급히 잡힌 회의였다.

“마스터가 돌아오는 날인데 어찌한단 말인가?”

“어쩌긴 뭘 어째. 방법도 없는데.”

“신의 메아리는 아직도 대답이 없나?”

사람들은 중구난방으로 떠들기 바빴다. 한백남은 입을 꾹 다물고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스카우터라는 직책도 있지만, 사실 그의 역할은 교섭원, 협상가에 가까웠다.

그런 그가 보기에 지금 이 회의를 위한 회의. 아무 가치도 없는 회의였다. 당장 여기서 대책을 생각하기엔 사안이 컸다.

“그깟 빈민들 쓸어버리는 것은 어때? 그깟 놈들 사라진다고 큰일이 있겠어?”

“넌 좀 제발 입 좀 다물어라. 그러면 사람들이 우리를 뭘로 보겠냐. 우린 학살자가 아니다. 신서울의 지배자인 마스터 혈이라고.”

“해골을 죽인 사람에 대한 추적은?”

“마검 때문에 아직도 소란이 일어나고 있는 판이다. 조사가 될 리가 없지.”

“제길 마스터가 오면 뭐라고 해야 하지.”

이런 식이다. 한백남이 세었을 때 비슷한 식의 대화만 벌써 네 번이 있었다. 진도는 나가지 않고, 모든 것은 올곧다. 너무 곧아. 정답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상한 일은 아니지.’

해골, 빈민가의 현자 프레이드가 죽고 빈민가의 지휘 체계가 무너지고 마검이 나타나 소유자를 차례차례 갈아치우며 신서울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 머리를 잃은 부랑자들은 통제를 잃고 막 나가는 중이다.

문제는 이 모든 일이 어제 하루에 일어난 일이다.

단체기도랍시고 신의 메아리가 침묵하고, 길드 마스터가 간부들과 원정을 나간 지금 마땅한 해결책을 제시할 사람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마스터는 오늘 오전 중으로 돌아올 예정이며 벌써 가깝다는 간다는 소식도 받았다.

마지막으로 오늘은 명동 2구역이 나타나는 날이며 마스터의 애첩 유연화가 중간계에 처음으로 발을 디디는 날이기도 했다. 여긴 결혼이라는 풍습이 없으니 유연화는 사실 마스터의 와이프와도 다르지 않았다. 마스터의 원정도 유연화의 선물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설상가상, 첩첩산중. 아무리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한백남은 조용히,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진행된 회의에서 대응책이 나오긴 나왔다. 그것은 미봉책에 가까웠다.

일단 마스터가 유연화를 만나는 오늘은 무슨 일을 써서라도 일을 숨기자. 그러는 게 마스터가 덜 화낼 것이다.

***

오피스텔 옥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주위가 소란스럽다. 생각해보니 여기 온 지 오늘로 딱 일주일이 되었다. 명동 2구역을 비롯한 서울의 구역들이 중간계에 나타나는 날이다.

명동 2구역 하니 생각나는데 내 퀘스트는 전부 허공으로 날아갔구나. 사람도 많이 죽였고 몬스터도 많이 잡았는데 말이야. 아마 인류 최고 기록이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쉽기도 하다.

보상도 받았으면 좋은 거로 받았을 건데. 뭐, 덕분에 여신을 죽였으니 후회는 없다. 튜토리얼 보상이라 해도 내가 쓸 물건은 나오지도 않겠고.

지나가던 아무에게나 물어 명동이 나타나는 시간을 묻는다. 다행히 아직 시간이 남았다. 나도 구경이나 가자. 요리사 삼인방에게 볼일도 있다.

내가 마스터 혈 길드와 적대관계가 되면 가장 먼저 걔들이 노려질 거니 죽지 않게는 해줘야지.

명동 2구역에 도착하니 이미 뭐가 바글바글하다. 눈에 띄는 무리는 세 개가 있다. 그중 한 무리는 마스터 혈 길드다.

나머지 두 개는 통일성 없이 모인 사람들의 덩어리가 하나. 단 세 명으로 이루어진 그룹이 하나. 단 세 명이지만 그들이 내뿜는 기세 때문에 그들 주위로는 사람이 다가가고 있지 않다. 소풍날 자리 잡는 데 쓰면 좋을 기술이네.

저 셋은 보통이 아니다. 만약 싸우면 애 좀 먹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뒤쪽이 소란스러워진다. 인파가 열리고, 큰길을 따라 행렬이 나타난다. 검은 옷에 혈(血)자가 새겨진 깃발을 나부끼고 있다.

“혈 길드의 마스터야. 역시 유연화를 보러 온 건가.”

“선물을 구하러 원정까지 다녀왔으니.”

주변에서 이런 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유연화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중요 인물이었던 듯하다. 반반 정도로 점치던 마스터 혈 길드와 싸울 확률이 더 높아질 것 같다. 흠, 구멍동서랑은 친하게 지낼 수 없는 건가.

화려하게 등장한 마스터 혈 길드는 그대로 앞쪽에 자리 잡는다.

앞쪽에 있는 저게 마스턴가. 크게 카리스마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위로 솟은 눈매가 성격 더러워 보이긴 한다. 유연화랑 죽이 잘 맞을 것 같다. 끼리끼리 논다는 거겠지.

주전부리를 파는 사람이 있어 몇 개 사서 까먹고 있는데 땅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우르르하는 울림은 점점 심해지더니 뒤쪽에 있는 건물이 흔들리기에 이른다. 그리고 땅에서 무언가 솟구친다.

땅 아래에서 나왔는데도 흙 하나 안 묻은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건물이 드러나고, 사람이 드러나고, 마지막에는 아스팔트 도로와 보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빠르게 움직이고, 살기를 담아 움직이고, 반갑게 움직이고. 아무튼 움직인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도 만인의 사랑의 한 몸에 받는 사람도 있었다.

“검은 마녀를 찾아라!”

“마녀를 찾아 죽여!”

그렇게 소리치며 그들은 한 번에 명동 2구역 전체로 퍼져나간다. 막는 사람은 밀치며 거침이 없다.

검은 마녀라. 어쩐지 누군지 알 것 같은 이름이다. 그 여자. 쉬우니까 사람 죽인다던 그 여자. 그 여자라면 검은 마녀라는 거창할 별명 정도는 있을 것도 같다.

나는 얼마간 사람들이 만드는 혼란을 지켜본다.

인간군상은 다양하다.

서로 죽이고, 얼싸안고, 도망가고.

이토록 다양한 광경을 한 장소에서 구경하다니. 이 자리 돈 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이것도 저것도 다 회귀 때문이다. 설마 자기가 죽였던 놈이 되살아나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건 어떤 기분이고. 죽었던 친구가 되살아난 건 또 어떤 기분일까.

쭉쟁이들의 회포가 계속되는 가운데, 나도 익숙한 얼굴을 찾는다.

“일주일만이다?”

몰래 뒤로 다가가 말을 걸자 치킨녀가 화들짝 놀라 뒤를 본다. 다른 둘도 무기에 손을 가져가 뒤로 돌며 자세를 잡았다가, 나를 보고는 긴장을 푼다. 일주일 전보다는 확연히 나아졌다.

“어디 가셨던 거예요?”

“신이라는 놈이 날 불러서 죽였지.”

“그게 뭐에요.”

치킨녀가 피 웃는다. 진짜 죽였거든? 나중에 알고 놀라라지. 나는 미리 준비해둔 선물을 꺼내 세 사람에게 건넨다.

작은 단검을 하나씩 받아든 세 사람이 날 본다.

“선물. 원래 같이 튜토리얼 할 때 주려고 했는데 방해가 들어와서 못 줬네. 그 방해꾼은 잘 묻었으니 걱정 말고.”

치킨녀와 아저씨의 표정이 애매해진다. 그 방해꾼이 누군지 알면 그런 표정 안 나올 거야. 니들 인생을 강간하고 시궁창에 처박은 년이라고.

“자, 그럼.......”

식사나 하고 헤어지자고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알바트로스니 영혼술사니 하는 이야기가 들린다.

치킨녀와 한중이가 그 이름에 움찔 반응한다.

내가 모르는 걸 아는지 묻기 전에 한중이가 먼저 설명한다.

“알바트로스는 인류 최고의 소수 정예 길드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영혼술사는 알바트로스의 일원이고요.”

“세 명이 모이면 드래곤을 잡는다고 해요.”

한중이의 말에 치킨녀가 덧붙인다. 세 명이면 드래곤을 잡는다라. 드래곤이 어떤 도마뱀인지 궁금하지만, 그보다 우선 짚이는 점이 있다.

영혼술사라는 거. 난 놈이네.

그 이상한 불꽃과 폭발적인 마력 증폭. 적어도 마력을 사용한 기술로는 안 보였다. 모두 영혼을 사용한 기술이라고 하면 이해가 된다.

상황을 파악해보자. 난 명동에서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길드 주인의 와이프를 강간했고, 인류 최고라고 불리는 놈들의 동료를 참살했다.

나, 인류의 공적인가?

“씨발.”

일이 꼬이려니 이렇게도 꼬이는구나. 어째 인생에서 되는 일이 없냐. 아냐아냐. 아직 속단하긴 일러.

“치킨녀. 가서 그 영혼술사라는 놈 인상착의 좀 알아 와라.”

“네, 저 저요?”

치킨녀가 놀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킨다.

“너 말고 누가 있어?”

치킨녀가 조심조심 사람들 사이에 끼어든다. 그리고 잠시 뒤 돌아와 더듬거리며 입을 연다.

“저... 그 사람 있잖아요. 치킨집에 같이 있던 다른 사람. 그 사람인 것 같은데요...?”

“하아.......”

한숨이 나온다. 안 나오게 생겼냐고. 일이 개떡같이 돌아가는데.

“따라와. 당장 떠야겠어.”

알카트뢰즈? 그 녀석들이 난 놈이 죽었다는 걸 알고 그 범인이 나라는 걸 알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또 마스터 혈에서 유연화 강간범을 찾는 데는 얼마나 걸릴 거고?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빌어먹을.

============================ 작품 후기 ============================

난 놈은 원래 알바트로스의 동료들과 함께 인류 부흥을 위해 힘쓸 예정이었습니다.

웬 미친놈 하나만 없었어도 주인공이 됐을 놈이.... 그런 아이가 어쩌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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