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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소환된 남자-22화 (2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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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계

아공간에서 검 하나를 꺼낸다. 보라색 검신에 손잡이에도 보석이 잔뜩 박힌 검이다. 이놈은 만인의 피를 먹었다고 전해지는 마검인데 내가 얻어 거기에 또 마개조 더해 흉악한 녀석이 되었다.

“선물.”

이빨 빠진 놈이 검을 든다. 손 하나는 반죽했지만, 하나는 남겨뒀다. 삽시간에 놈의 눈이 붉게 물들고, 입에선 침을 질질 흘리기 시작한다. 이빨 빠진 놈이 미친놈으로 진화했다.

“가라, 틀니몬! 학살하기!”

마검을 든 틀니몬은 나를 경계한다. 본능적으로 나를 알아본다. 내가 대항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틀니몬은 인간이 있는 가장 가까운 장소를 향해 돌격한다. 곧 비명이 울린다.

저 마검의 성능은 지극히 마검답다. 들면 엄청난 힘을 얻고 피에 미쳐 날뛴다. 피를 보려면 생물이 필요하니 생물을 탐지하는 기능도 달려 있다. 그리고 하나 더.

저 검은 방사능을 뿜는다. 검을 쥔 놈도, 검에 베인 놈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 덤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료 효과까지 가지고 있으니 주인 걱정도 안 하는 아주 마검계의 귀족이시다.

저런 놈이 날뛰면 내 소문 같은 건 금방 지워지겠지. 그럼 하나가 남네? 손을 뻗자 숨어서 날 감시하던 놈이 빨려들어 온다. 공기를 이용한 간단한 마법이다. 공기, 그러니까 바람 계열을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워서 좋다.

“유언은?”

“날 죽이면.......”

“마스터 혈 길드가 화내겠지. 그건 전부 저 마검 탓으로 돌아갈 거고.”

그러라고 준 마검이다. 한바탕 학살이 벌어지겠고 이놈은 마검에게 죽은 거라고 가닥 잡고 그쪽으로 화살이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나에게 화살이 돌아오는 것은 나중이다. 그리고 그때면 일이 전부 정리된 후겠지.

“왜? 미친놈이 머리 쓰는 게 그렇게 놀라워?”

무슨 천지가 개벽하는 걸 본 표정을 하고 있어. 나도 머리 정도는 쓴다. 내가 직접 책략을 짜낼 정도로 머리가 좋진 않아도, 남들이 짜둔 전략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여러 번 당해본 만큼 이런 건 잘하거든.

젠장, 아갈리에서 내가 그만큼 굴렀다는 뜻이잖아. 힘만 센 꼬꼬마를 어른들 사이에 던져두니 어른들이 꼬꼬마를 이용해먹더라. 그것도 아주 골수까지 빼먹으려 들어.

마지막에는 내가 역으로 골수는 빼먹어 주었지만, 그렇다고 내 개고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기분 더럽다. 그러니까.

“니가 좀 죽어라. 잘 가.”

목뼈가 부러져 죽은 감시자를 대충 던져둔다. 나중에 불 지르면 다 없어지겠지. 나는 앞에 있는 건물로 향한다. 이 주변에서 유일하게 마법 함정이 설치된 건물이다.

건물은 입구부터 피로 질척하다. 마검든 놈이 입구부터 쫙 쓸어간 탓이다.

여기가 이곳 놈들의 왕초가 사는 곳인가? 그렇다면 사람이 이렇게 많은 것도 납득이 된다. 대충 마흔 명 정도가 이 건물 하나에만 몰려 있다. 주변에는 생쥐 한 마리 없는데도.

틀니몬이 일은 참 확실하게 한다.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나는 가장 건물의 가장 안쪽에 도착했다. 거기서 벽을 부수고 드러난 통로로 태연하게 이동한다. 지금의 나는 여기 집 주인보다 태연하다.

아주 편안해 누우면 잠들 것 같네.

바깥은 여전히 비명이 들려온다. 통로를 내려갈수록 비명은 멀어진다. 사각형 통로를 희미한 비명의 메아리가 때린다.

통로 끝에는 침대가 하나, 식량을 저장한 것으로 보이는 항아리가 몇 개, 그리고 화장실 대용으로 보이는 구멍 하나가 전부다. 이 초라한 피난처의 주인은 침대 위에 누워있다.

저건 해골이야 인간이야? 삐쩍 말라서 가죽만 남은 인간이다. 어떻게 저 모습으로 살아 있는지 의문이다.

“사람은 쉽게 죽기도 하지.”

해골이 말을 하기 시작한다. 진기명기다. 다시 무덤에 되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싶은 광경이다. 나한테 생전의 원한을 갚아 달리던가 하는 거라면 사절하고 싶다.

해골이 말을 계속한다.

“쉽게 살기도 하고. 그 반대이기도 해. 어렵게 죽거나. 어렵게 살거나.”

해골이 몸을 일으킨다. 해골바가지는 여전히 딸그락거리며 말을 토해낸다.

“그래서 불청객께서는 쉬운 사람인가? 어려운 사람인가?”

해골이 날 본다. 볼 살이 하나도 없어 그 두상은 진짜 해골이다. 막 굶어 죽은, 머리카락의 기름기로 마르지 않은 시체.

“난 어려운 사람이지. 아주 어려운 사람.”

적어도 이유 없이 사람을 막 죽이지 않으니 난 매우 손이 무거운 사람이다. 도덕감에 넘친다고나 할까. 도덕과 윤리의 화신이지. 내가 춘추전국시대에 태어났으면 성인에 이름 올리는 것도 여반장이다.

해골이 초에 불을 붙인다. 흠, 우리 둘 다 빛 한 점 없는 곳에서 대화하고 있었구나. 해골의 얼굴이 불빛에 드러난다. 너무 바가지 같아서 몰랐는데, 해골은 외국인이었다. 금발에 뚜렷한 이목구비. 그리고 푸른 눈.

외국인은 처음 보는군.

“무엇을 알고 싶어 왔소?”

“내가 무엇을 알고 싶어 왔다고?”

“멀쩡한 사람이 뒷골목에 오면 보통 셋 중 하나지. 영웅 행세나 하려는 사람이나. 뭘 찾는 사람이나. 뭐가 궁금한 사람.”

“내가 세 번째라는 보장은?”

“난 훔친 물건이 없고 날 죽인다고 영웅이 되지도 않으니까. 그럼 하나가 남지.”

그래, 니 머리 굵다. 그래도 편하게 되었다. 머리 굵은 놈이 나는 건 많을 테니. 대화도 조금은 통할 거고.

“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쇼?”

내가 묻는다.

“미친 세상. 더 이상 답이 없을 정도로.”

“오오.”

감격에 눈물을 흘릴 것 같다. 이런 곳에서 사상적 동지를 찾다니 사막에서 바늘을 찾은 기분이다. 부디, 그 바늘이 녹슨 바늘이 아니길.

“폭력적인 부조리. 항거할 수 없는 폭력. 그 모든 게 이상하게만 돌아가고, 삶의 뒤꼬리에 쫓겨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가장 기본적인 의문조차 갖지 않고, 설혹 갖더라도 입 밖에 내지 않아.”

해골이 팔찌를 손에 걸친다. 꼭 염주처럼 생긴 팔찌를 엄지로 더듬는다.

“여긴 지성의 사막이고, 인간성의 종착점. 종점에서 길을 잃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고 무섭고 까닭 없이 미워.”

이놈이 뭐하는 놈인지 알겠다. 잰 체 좋아하는 염세주의자시다.

“우리 염세주의자께선 염세주의자라서 이런 골방에 계시나. 재산 하나 없이?”

염세주의라 영세하다. 영세주의자의 탄생이로다. 영세하니 염세한다. 그럴듯한 이론이다. 배고프면 세상이 더러워 보이고 가진 놈들 곱창이 궁금해지는 법이다. 죽창, 죽창이 필요하다.

“내 재산이 없어? 누가 그러지? 신서울 빈민가가 다 내 것인데. 땅문서도 있어.”

“땅문서라니. 그런 것도 파나?”

“두 길드 공증으로.”

“미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치고 속물적이군.”

“사막에선 물이 필요한 법. 마찬가지로 지성의 사막에선 황금이 필요하다네.”

“그 황금은 진정으로 사막의 물인가?”

사막의 물은 목숨을 구해주지만, 황금은 아니다. 내가 무력만능주의를 숭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력은 언제나 마지막까지 남는다.

공수래공수거라. 빈손으로 와 빈손으로 간다면 그 빈손이 최강의 빈손이 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무엇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지성을 연명한다는 점에서는. 진정으로 물과 같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대답해야겠군. 불청객을 내쫓을 수도 없으니까.”

“사담을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농담 따먹기는 이 정도면 됐다. 적당히 따먹어 뇌에 기름칠이 되었어. 이제 기름칠한 뇌를 써먹을 일이 남았다.

“그대는 누구지?”

“농담 따먹기는 끝내자고 했을 텐데.”

미간을 찌푸리고 해골을 노려본다. 해골의 눈동자에서 촛불이 일렁인다. 그 빛은 이 좁은 방을 약간 밝히고, 해골의 눈동자 속도 채운다. 그 눈동자는 빛나면서도 어딘가 찌들었다.

그래도 나보다는 덜 찌들었구나. 더 찌들고 와라 애송아.

“어디서 왔는지를 보면 원하는 게 대체로 보이지. 거지는 먹을 것을. 부자는 더 많은 돈을. 사냥꾼을 더 좋은 무기나 도구를. 또 말하는 상대가 누군지 알아야 이쪽도 말을 맞추기 쉬우니까. 정치인과 정치 이야기를 할 수는 없잖아?”

해골이 킥킥 웃는다. 묘사가 너무 리얼해서 하나도 재미없거든. 진퉁 귀족과 왕족들은 인생이 정치라 말이 안 통하더라. 차라리 시체랑 말하는 게 더 유익하다. 그건 자아 성찰이라도 가능하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길 가던 사람 아무나 잡고 내가 회귀자가 아니라는 것을 털어놓으면 내가 궁금해하는 것들을 당장 해결할 수 있다.

그게 안 되니까 내가 이러고 있지. 모난 돌은 정 맞는다. 난 모난 돌이 아니라 바위에 굴러들어온 다른 광석이다. 우라늄쯤으로 해둘까. 배척받다 못해 호기심 넘치는 것들의 표적이 될 거다.

질문도 마찬가지. 기억 상실을 연기하는 것도 오래 할 짓은 못 된다. 그걸로는 내가 지닌 근본적인 위화감, 이 세계와 나 사이의 괴리를 해결할 수 없다.

이 미친 세계에서 나 혼자 회귀자가 아니다. 비슷한 정신세계를 가진 이 해골도 그 점에서는 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남의 집에 들어온 것처럼, 모든 게 거리낌 없이 편하더라도 그건 내 것이 될 수 없다. 아무리 편하게 쓰고 마시더라도 그건 내 것이 아니다.

내 행동은 무언가 결여돼 있고, 내 사고 방식과 상식은 이곳과 맞물릴 수 없다. 해골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원주민이라 한다면 나는 거기 끼어든 유일한 이방인이다.

내가 너무 과민반응하는 건지도 모른다. 내 행동의 위화감이 어떤지는 나도 모르고, 그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미 전적이 있어서 내가 안심을 못 해.

세상엔 간혹 촉이 좋은 놈들이 있는데 천재라 불리는 그놈들은 중간 과정을 뛰어넘고 결과만 주워섬긴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오늘 공격해 들어올 적군의 방향과 병력을 깨닫는 것이 천재들이다.

천재까진 아니더라도 말조심 안 하면 난 놈 같은 경우가 또 생길 수도 있다. 난 놈이 내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나를 떠보기까지는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런고로 나는 말과 행동거지를 조심할 밖에 없다는 소린데. 흐음. 이번만은 살짝 변주를 줘볼까.

“이계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

“?”

해골이 의문에 찬 표정이 된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

“안내서도 하나 있었는데, 그걸 잃어버려서 여기 불시착했지.”

해골이 골똘히 생각에 골몰한다. 이런 부류는 때에 따라 귀찮기도 하고 편하기도 하지만 오늘은 편할 때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 파고들지 않는다.

해골이 내 말을 믿든, 믿지 않든, 반만 믿든, 또는 내 말에서 유추해 무언가를 알아내든 나는 상관없다. 대답은 내가 원하는 방향일 것이다.

“히치하이커께서는 상식이 필요한 게로군.”

봐라. 원하는 대답이 나왔다.

“통통 튀어 해부대로 들어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서.”

모난 돌이 통통 튀어 해부대로 들어가는 것은 사양하고 싶다. 진심으로.

“불청객인데 불청객이 아니야. 제대로 찾아오긴 했군. 오늘은 입이 마르겠어.”

“물이라도 주랴?”

“이왕이면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 혼자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고 싶어.”

살려달라는 말을 거창하게도 한다. 내 대답은 정해져 있다.

“하는 거 봐서.”

“현자의 진명에 걸고 최선을 다하지. 초대받지 않은 귀빈께선 무엇이 궁금한가?”

“일단은. 이 미친 세계의 미친 언어에 대해서.”

해골의 마른 입술이 열린다. 말하는 해골이 언어를 토한다. 해골의 뇌를 까볼 시간이다.

트릭 오어 트리트.

지식을 주지 않으면 장난을 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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