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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계
날 취직시켜준 이놈은 마스터 혈 길드의 스카우터라고 한다. 이름은 한백남. 한 백날 때리고 싶은 이름이다.
한백남이는 나에게 아무 일도 안 시킨다고 했지만, 내가 마스터 혈 길드의 식객이 되는 것만으로 이미 난 일을 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괴물은 머무는 것만으로 주변을 자기 구역으로 삼는다. 내가 머무름으로써 마스터 혈 길드는 오크 부족 하나를 태워 죽이는 인간의 구역이 되었다. 나중에 무력 가지고 협상할 일이 있으면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대단한 카드라도 되는 양 써먹을 거다.
그게 아니더라도 마스터 혈 길드가 위험해지면 나에게 불똥이 튀게 된다. 식객이란 건 공짜처럼 보여도 공짜가 아니란 거지.
이런 이득을 보면서 한백남이는 나한테는 거저 이득을 주는 것처럼 말했다. 날 호구 취급한 거다. 마스터 혈 길드에 대해 대충 안 기분이다. 별로 상종할 마음이 안 드는 것들이다.
나중에 쓸어버리게 되면 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다. 이럴 생각으로 취집한 건 아니었는데 어째 일이 이렇게 되냐.
한백남이는 바쁘다면서 나가버리고 나 혼자 멀뚱히 있다. 아, 한 명 더 있다. 날 안내한 남정네가 하나. 이왕이면 여자로 붙여주지. 내 가슴 속에서 마스터 혈 길드에 대한 평가가 더욱 떨어진다.
“여기 식사는 잘 나와?”
“꽤 실력 좋은 요리사가 있습니다.”
“밥 어디서 먹어?”
“안내하겠습니다.”
남자가 날 다른 건물로 안내한다. 나는 주변을 면밀이 살핀다. 건물이 많다. 띄엄띄엄 있는 건물 사이로는 꽃도 심고 나무도 심어 놨다. 그렇게 보이는 구역이 꽤 넓다.
“이 주변이 전부 마스터 혈 길드인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잘 눈에 담아두자. 지하도 좀 탐색해두고. 지하에 탐지 마법을 사용하니 지하에도 여러 시설이 있다. 비밀 통로처럼 보이는 통로도 열 개가 넘는다. 수련 시설과 무언가 은밀한 것도 있다.
마법으로 감춰도 나에게는 안 된다. 숨겨둔 것들이 훤히 보인다. 일단 위치는 기억해두자. 저런 건 나중에 협박 재료로 써먹을 수 있다.
이게 다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다. 이만한 지혜를 쌓기 위해 개고생을 했지. 하아.
식당은 학교 급식소 같은 느낌이었다. 꾸준히 중무장한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다.
“귀빈들 식당은 기본적으로 이쪽입니다.”
“기본적으로?”
“식객들이 머무는 오피스텔에서는 따로 요리사가 딸려 있습니다.”
“그럼 왜 여기로 왔어?”
얼굴을 찌푸리며 묻는다. 바로 거기로 갔으면 거기서 밥 먹고 다시 잘 수도 있는데, 이러면 두 번 움직여야 하잖아.
“식사는 여기가 더 맛있습니다.”
좋아. 용서한다. 밥이 맛있으면 세상 대부분의 일은 용서가 된다. 그런데 방금 대화에서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다.
“아까 그 건물에서 오피스텔까지랑 여기까지. 어디가 더 가까워?”
“비슷비슷합니다.”
이놈들이 내 뒷조사를 했다고 느끼는 건 과대망상일까? 거리가 비슷하면 여기까지 올 것도 없이 바로 오피스텔로 가면 된다. 맛있는 음식을 위해 굳이 딴 길로 빠지는 건 내가 맛있는 음식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온 행동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나에게 맛있는 밥 한 끼 먹이려고 이리로 왔을 수도 있지만, 역시 그렇게 생각하기엔 내가 너무 검다. 속이 너무 검어.
“여기가 간부와 귀빈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식당입니다.”
남자가 안내한 곳은 급식소 옆에 있는 건물이다. 외벽부터 연갈색으로 깔끔하게 칠한 게 옆의 급식소와는 차원이 다르다. 크기도 작은 게 소수를 위한 거라는 느낌이 팍팍 난다.
식당은 내부도 고급스럽다. 평생 구경도 못해본 고급 레스토랑을 중간계에서 와보는구나.
멋대로 자리에 앉자 웨이터가 와서 주문을 받는다. 대충 오늘의 메뉴를 달라고 한다.
“감자 퓌레 끼얹은 살짝 구운 연어와 아스파라거스입니다.”
연갈색 소스를 아래 흰색 생선살이 있고, 시금치 닮은 풀떼기도 있다. 이름과 비슷한 건 감자밖에 없다. 감자는 몰라도 비슷해 보이는데 연어와 아스파라거스는 아무리 봐도 아니다. 맛이 비슷한 재료에 같은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전혀 다른 재료에 익숙한 이름을 쓰며 익숙함을 찾는다. 언어란 이런 거다. 어딜 가나 떼려야 뗄 수 없는 것. 그런데 그걸 오크랑 같이 쓰고 있다는 거지?
생각하니 또 화가 난다. 음식에 집중해 주의를 돌리자.
연어를 젓가락으로 잘라 소스와 함께 입에 넣는다. 이런 건 조금씩 음미하는 거라고 한중이한테 배웠다.
연어라고 한 생선은 혀로 느껴질 정도로 지방이 많다. 혀에 닿는 순간 지방의 풍미로 혀가 짜릿해지고 씹으니 은은한 단맛이 올라온다.
살짝 구웠다고 했는데 정말 살짝 구워 거의 회처럼 느껴진다. 회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제 회 맛을 알겠다.
미각이 수십 배는 좋은 내가 은은하게 느낄 정도면 보통 사람은 거의 못 느낀다는 거다. 지구에서 회를 단맛으로 먹는다던 사람들은 뭐지. 그 사람들도 사실 초인인가?
연어를 씹으니 감자 퓌레가 섞이기 시작한다. 퓌레는 농도가 진한 소스란다. 이것도 한중이가 말해줬다. 한중이가 나한테 해준 일이 참 많은 것 같다. 다시 만나면 선물 하나 줘야겠다.
감자 퓌레는 맛이 진한 감자전 같은 맛이다. 감자의 강렬한 구수함이 연어를 덮지만, 연어의 식감과 혀를 코팅한 지방의 감칠맛 나는 느끼함은 살아 있다.
퓌레의 농도도 딱 좋다. 걸쭉한 퓌레의 식감도 좋고, 이빨에 부서지는 연어의 식감도 좋다. 연어가 몇 점 없는 것이 흠이다. 전채 요리니 이 정도로 참자.
마지막으로 남은 아스파라거스를 퓌레에 찍어 먹는다. 아스파라거스는 나도 며칠 전에 처음 먹은 식재료다. 이런 시금치는 아니었어.
보기완 달리 아스파라거스는 똑바로 아스파라거스였다. 시금치 닮아 축 처진 모습과는 달리 제대로 아삭거린다. 아스파라거스 자체의 맛은 거의 없어 아삭한 감자전을 먹는 것 같다.
그릇을 비우니 웨이터가 그릇을 내간다. 첫 그릇을 보니 다음 그릇이 기대된다. 쓰리 코스 요리였는데 어떤 게 나올까.
“입에 맞으십니까?”
“요리 맛있네.”
“요리 경력만 20년이 넘는 사람입니다.”
“쟤가?”
다음 요리를 가져오는 웨이터에게 고갯짓한다.
“셰프가요. 회귀 전에도 식재를 찾아 떠돌던 사람이었답니다.”
“그거 참 대단하군.”
신서울에는 요리에 환장한 사람이 많나 보다. 한식집 오지랖 아줌마도 그렇고 전부 음식에 목숨을 건 것 같다. 뭐, 나에게는 좋은 일이다. 나는 그 사람들이 만든 걸 즐기기만 하면 된다.
“특제 간장 소스로 재웠다가 구운 이블아이 스테이크입니다.”
다음 음식은 조촐한 스테이크다. 장식용으로 올려둔 풀떼기 빼면 고기밖에 없다. 소스도 하나 없다. 살짝 실망하지만, 이것도 먹어보기 전에는 모르는 거다. 간장에 재웠다니 맛은 스테이크 안에 있겠지.
고기에 칼을 대자 육즙이 흘러나온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는 줄 알았네. 고기는 부드럽게 잘린다. 안쪽은 연분홍빛이다.
실망했다는 말 취소. 이건 완벽하게 구워진 고기다. 이게 입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츄릅. 전채 요리의 여운과 합쳐져 입에 침이 한가득이다.
먹기 좋게 썬 스테이크를 입으로 가져간다.
첫 느낌은 생각했던 그대로다. 씹으니 육즙이 폭발한다. 씹는 순간 고기에서 육즙이 뿜어지다니. 이런 건 처음이다. 첫 경험을 빼앗겼어.
행복하다. 잠깐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도 죽을 순 없지. 이런 음식을 더 먹어야 하니까.
역시 고기는 한입 크게 물어야 제 맛이다. 큼직한 고기의 반을 삼킨다. 씹으면 씹을수록 행복하다. 고기 아래에서 간장 소스가 맛을 완벽히 받치고 있다. 달짝지근한 간장의 맛이 고기를 계속 입으로 가져가게 만든다.
눈 깜짝하니 한 그릇이 사라져 있다.
옆에 있던 웨이터가 말한다. 식당에 다른 손님이 없어 완전 우리 전담이다.
“메인 요리는 리필이 됩니다.”
“한 그릇 더! 아니, 열 그릇 정도 가져와.”
고기를 먹고 또 먹는다. 나오는 대로 몽땅 먹었다.
“헛!”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그릇이 옆에 쌓여 있다. 몇 그릇을 먹은 거지? 웨이터와 앞에 앉은 남자의 표정을 보니 한두 그릇 먹은 건 아닌 것 같다.
이블아이, 너는 누구냐. 너야말로 고기의 왕이로구나. 괘씸하다. 실로 괘씸해. 너무 맛있어 벗어나지 못하겠다. 그 꼬치구이 아저씨의 꼬치도 그렇고 이블아이란 놈은 참으로 축복받은 고기를 가지고 있다.
식재료로 축복받아 오래 살 팔자는 못 되니까 이블아이들에게는 불행인가?
내가 배가 찰 때까지 먹으면 끝이 없으므로, 적당히 끊는다. 후식으로는 검은색 공이 나왔다. 이게 뭐야?
“뜨거운 초콜릿과 함께 먹는 구운 딸기와 녹차 아이스크림입니다.”
멀리서 봤을 땐 몰랐는데 검은 공은 초콜릿이었다. 그렇게 느껴진다뿐이지 먹어보지 않아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그 램프에 든 걸 공 위에 부으시면 됩니다.”
웨이터의 말에 따라 옆의 램프를 기울인다. 램프에서 나온 검은 액체가 초콜릿 공을 녹인다. 이것도 초콜릿인 것 같다. 공이 위쪽에서부터 녹아가며 안쪽의 아이스크림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뾰족이 솟은 산 모양의 빨간 아이스크림 아래에는 녹색 열매가 깔려있다. 빨간색 녹차 아이스크림에 녹색 딸기라. 이름도 맛도 알고 있는 것과 비슷한데 모양만 다르니 이런 재미있는 연출이 가능하다.
녹은 초콜릿이 아이스크림 위에 떨어져 미끄러진다. 공이 위쪽에서부터 녹아가는 모습이 동심을 자극해 흥미진진하다. 떨어진 초콜릿은 그대로 아이스크림과 딸기를 덮었다. 램프를 옆에 두고 숟가락을 든다.
잔뜩 기대하고 드디어 아이스크림을 한 숟갈 먹는다.
딸기의 단맛과 초콜릿이 단맛. 서로 다른 단맛이 절묘하게 섞이고 녹차의 쌉싸름한 맛이 단맛을 잡아둔다. 또 차가운 아이스크림과 뜨거운 초콜릿의 온도 변화가 입안을 즐겁게 한다. 차갑고, 뜨겁고, 미지근하고. 혀가 아닌 입 전체로 맛을 느끼는 착각이 든다.
좋았어. 내가 마스터 혈 길드를 쓸어버려도 요리사랑 웨이터는 살린다. 날 안내해준 이놈도 여유가 되면 살려주자. 맛집을 안내해준 공은 크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온다. 매우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식객에게는 이게 공짜라는 게 더 마음에 든다. 앞으로 매일 와서 먹자.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지만 취집 참 잘했다.
남자의 안내에 따라 오피스텔로 향한다. 내가 남자에게 묻는다.
“너 이름은?”
이러니 꼭 잘생긴 부하직원 꼬시는 대기업 사장님 딸 같군. 날 이렇게 대한 건 네가 처음이야. 너 이름은 뭐야?
“김창형입니다.”
좋아. 기억했다. 이름 정도는 알아야 나중에 살려주기 쉽겠지. 죽일 놈 모아놓고 그날 날 식당에 안내한 놈 데려와! 라고 하면 오래 걸리고 귀찮잖아.
그렇게 도착한 오피스텔은 그야말로 오피스텔이었다. 다른 건물들도 현대풍이었지만 이건 서울 오피스텔 하나를 뚝 떼어 가져온 느낌이다. 마스터 혈 길드에는 건축가라도 있나.
“여기 누가 죽거나 그런 거 아니지? 귀신이 산다거나?”
“5년도 안 된 새 건물입니다. 그런 건 일절 없습니다.”
“그래?”
그럼 저기서 나오는 살기는 전부 누가 고의로 보낸다는 거구나. 은밀하지만 강한 살기가 나를 정면으로 노리고 있다.
이게 신고식이란 건가? 여기 취집 자리는 조건도 좋으니 이런 텃세가 있는 것도 이상하진 않겠다.
그런데 이것들이 어따 살기를 흘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