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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계
이틀 정도 여기 머물려 알아낸 것이 있다. 일단, 이 도시 이름은 신서울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3대 길드 중 두 개가 신서울에 적을 두고 있다.
신서울이라고 불리는 이곳의 도시 구획은 이상하다. 도시 자체는 꽤 큰 규모다. 그런데 도시 중간에 구멍이 뻥뻥 뚫려 있다. 내가 중간계에 처음 왔던 그 자리도 도시에 뚫린 구멍 중 하나다.
알아보니 그 구멍들이 바로 현실의 도시들이 올라올 위치란다. 내가 있던 명동 2구역처럼 따로따로 분리된 도시가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땅에서 솟아난다고 하니 생각나는 건데, 아직 나타나지 않은 명동도 지금 지하에 있단다.
지하 던전에서 일주일에 걸쳐 세 개의 튜토리얼이 추가로 진행되고, 그게 끝나면 비로소 중간계의 대지에 발을 디디는 것이다.
“참으로 개 같은 세상이야.”
“그렇지? 회귀해도 달라지는 건 없더라니까.”
식당 아줌마가 친근하게 말을 건다. 어제오늘 내가 여기 매상을 왕창 올려주니 친한 척을 한다. 솔직한 말로 오지랖이다. 그 오지랖 덕에 궁금증이 많이 해결되긴 했다. 오지랖도 오지랖 나름이라는 걸까.
내 침묵을 뭘라 받아들였는지. 아줌마가 계속 떠든다.
“에휴, 젊었을 때라면 한몫 잡겠다고 날뛰었을지도 모르는데. 나이 드니 할 수 있는 게 있어야지. 또 젊은이들이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하고 싶다고 할 수나 있었겠어.”
“지 팔자지.”
“그래, 이것도 내 팔자지 어쩌겠어.”
이 허리 두꺼운 아줌마의 말이 맞다. 회귀라는 기적 같은 경험 앞에서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변함없이 잔혹하며 그 색이 진해지는 일은 있어도 색이 바래는 일은 없다.
우울한 기분을 두고 흔히 색이 바랜다고들 하던데, 색이 바래도 그건 회색이다. 여전히 색이며 진하다.
아무리 해도 색은, 색이라는 개념은 사라지지 않고 전두엽에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사라지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화인이다.
회귀한다고 자원이 늘어나지 않는다. 회귀한다고 없던 게 생기지 않는다. 회귀한다고 내가 타인이 되는 게 아니다. 회귀란 결국 미래의 내가 돌아오는 거고,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잡아먹는 거다.
잡아먹힌 과거의 나는 죽고 미래의 내가 남는다. 그러나 그건 여전히 나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에 글러 먹은 놈은 과거에도 글러 먹었었고, 미래에도 글러 먹을 거다.
사람이 쉽게 변하면 누구나 노력해서 누구나 성공하는 이상 사회가 노래하겠지. 아, 나는 누구나 성공하는 이상의 사회라네. 이곳에는 우는 사람도, 우울한 사람도 없다네. 내 이름은 이상 사회라네.
전부 지랄이다.
회귀해도 큰 깨달음을 얻어 극적으로 변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다.
회귀해도 알짜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다.
회귀해도 자원의 숫자는 늘어나지 않는다.
회귀해도 살 사람은 죽고 죽을 사람은 죽는다. 다만, 살 사람이 조금 늘어날 뿐이다.
살 사람이 늘어난 건 어떻게 아냐고? 그것도 이 오지랖 넓은 아줌마의 말이다. 회귀한다고 평민이 귀족 되지 않고, 귀족이 평민 되지 않지만, 회귀는 나름 인간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아줌마 왈. 회귀 전의 신서울은 지금의 신서울보다 조잡하고 규모도 작았다 한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이 훨씬 안전하고 훨씬 살만하다고.
이것도 또 웃기는 일이다. 모순투성이의, 숫제 모순밖에 낳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회귀라는 현상이 어째어째 결과적으로는 인간에게 도움이 된다.
이 세상은 여러 가지로 맛이 갔다. 먹으면 체할 것 같다.
상한 세상은 삼키면 체하지만 맛있는 음식은 먹으면 계속 들어간다. 이 집 요리는 그렇다. 맛도 그럭저럭 맛있고 제대로 한식이다.
한식, 또는 지구에서 먹었던 음식을 되살리려고 시도하는 음식점은 많다. 내가 본 음식점의 반 이상이 그랬다. 그러나 비슷하긴 해도 똑같이 맛을 낸 곳은 없었다.
여긴 모양부터 맛까지 한식과 거의 흡사하다. 셰프 지망생이었던 한중이가 만든 한식을 얼마 전까지 먹었던 내 혀는 틀림없다.
개업한 지 얼마 안 됐다는데 내가 봤을 때 이 집은 성공한다. 향수, 특히 음식에 대한 향수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콜라부터 해서 음식 먹으려고 아갈리에서 버텨온 내가 그 증거다.
“오늘도 더?”
아줌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명동에서부터 내 식욕을 고삐를 풀어버린 모양이다. 계속 먹고 싶고, 계속 들어간다. 어떻게 고삐를 잡아야할지 나도 모르겠다. 그냥 먹고 싶고 싶은 거 다 먹자. 여기 먹방 컨텐츠가 없는 게 참 아쉬워. 대박 낼 자신 있는데.
잘 먹고 있는 차에 바깥에서 큰 소리가 울린다.
-사흘 전 발견된 오크 무리와의 접촉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전투원들은 속히 서쪽으로 모여주세요. 다시 한 번 알립니다. 사흘 전 발견된 오크 무리와의 접촉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전투원들은 속히 서쪽으로 모여주세요.
“이건 무슨 소리야?”
“못 들었수? 오크 부락 하나가 이리로 진군하고 있다고 사흘 전에 난리였는데.”
“그때는 바깥 상황을 모르는 장소에 있었거든.”
사흘 전이면 영감이 전백귀후십귀의 마무리를 하고 있을 때다. 나도 옆에서 마력 셔틀하고 있었다. 밀폐된 공방 안이었으니 안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설령 들어도 그때는 듣고 흘렸겠지.
“그런데 전투원들이 오라는 건 뭐야?”
여기 사람들에겐 상식에 속하는 질문이지만, 이런 건 물어도 크게 상관없다. 다른 도시에서 왔다고 하면 끝이다.
바퀴벌레 같은 인류가 미래에 멸종위기종이 될 정도로 개막장인 세계답게 여긴 밖을 나돌기도 힘들다. 일정 영역을 벗어나면 조금 과장해 삼보일몹이다.
지구에서처럼 다른 동네에 가볍게 가는 건 힘들다. 그래서 그런지 도시끼리의 문화적 괴리도 있는 모양이다. 즉, 그냥 여기 문화를 잘 모른다고 변명하면 통한다.
“세금이지. 세금. 나처럼 가게 하는 사람들은 세금을 내고,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세금 대신 일하는 거야. 얼굴 잘 비추면 가게 할인도 되고 마스터 혈 길드나 신의 메아리 길드에 들어갈 때 가산점도 줘.”
신의 메아리는 마스터 혈과 같은 대한민국 3대 길드 중 하나다. 신서울은 저 2개 길드가 지배하고 있다. 신의 메아리 길드는 신이 내려주는 신성한 능력, 신성력을 사용하는 성직자 길드라고 들었다.
그 신이 내가 죽인 그년이라면 재미있겠다. 걔들 앞에 가서 내가 신을 죽였다고 소리치면 폭동이 일어나려나.
“보통 이럴 땐 어떻게 하지?”
“대부분 싸웠지. 오크는 그런 종족이니까.”
그런 종족이라고 해도 난 오크가 어떤 종족인지 몰라, 이 아줌마야.
“높은 확률로 싸운다는 거지?”
“싸움이 아니라 전쟁이지. 그건.”
아줌마가 무엇을 떠올렸는지 표정을 구긴다. 예로부터 남는 건 땅장사랬다. 이틀 정도 살펴본 바로 따르면 중간계라고 그건 다르지 않은 듯 했다.
도시 곳곳을 떠도는 빈민들을 많이 봤거든. 집 있으면 걔들이 그러고 다니겠어?
여기서 이렇게 가게를 열었다는 점에서 이 아줌마의 과거도 짐작된다. 지구와 전혀 다른 식재료로 이렇게 훌륭한 한식을 재현했다.
보이지 않는 집착이 느껴진다. 그 안에 있는 고생이 어렴풋이 보인다. 그런 삶을 살고도 저 오지랖이라....... 내 알 바는 아니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 도시를 다스리는 것은 마스터 혈과 신의 메아리다. 그러면 저 방송도 두 길드 중 하나가 했을 거고, 오크가 있는 자리에는 두 길드도 있을 거다. 그놈들이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온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침 뱉을 수 있다. 시체가 침을 뱉을 순 없으니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는 뜻이다. 이기면 적 시체에 침 뱉을 때도 있다. 여하튼, 좋은 속담이다.
***
내 생각은 적중했다. 무작정 서쪽으로 가니 일단의 무리가 모여 있는 게 보인다.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등에 새겨진 혈(血)이라는 글자가 그들의 소속을 증명한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싸움이 일어나고 징집까지 하고 있다. 정작 징집한 장군이 오지 않으면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을 질질 기게 된다. 도시를 다스리는 마스터 혈과 신의 메아리에 대한 신뢰도 떨어진다.
‘이상해.’
마스터 혈은 왔는데, 신의 메아리로 보이는 집단은 없다. 거긴 유니폼 없나? 하고 생각하니 옆에서 이런 말이 들린다.
“신의 메아리는 없어?”
“우리만 죽으라고 내놓고, 미친놈들이네, 이거.”
“며칠 전에 교주가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단체 기도를 한다던데.”
“개새끼들. 언제부터 그렇게 열렬한 신자였다고.”
킁킁. 여러분, 어디서 촉이 안 옵니까? 전 싸하니 촉이 오는데요. 제가 죽인 그 년이 자기더러 인간의 신이라 안 합디까.
그 년이 뒈진지 얼마 되도 않아 공교롭게도 사이비 놈들이 기도를 한다네요?
윽수로 재밌네. 인류의 미래를 시궁창에 박고 강간한 년을 신이랍시고 섬기는 꼴을 다 보고. 신의 메아리 놈들이 그걸 알랑가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훌륭한 희극이다.
자기 인생 작살낸 년을 물고 빨고 핥아서 그년이 내려준 힘으로 몸을 지키고 도시를 세우다니. 이보다 막장인 이야기가 어디 있어?
책으로 내면 필히 베스트셀러에 스터디셀러로 대대를 호령할 거다.
“정렬 신호 떨어졌다.”
“가자. 가자. 피 묻은 놈들은 이런 거에 까다롭다고.”
무질서하게 서 있던 사람들이 진형을 갖춘다. 역시 대한민국이라고 할까. 이런 건 참 빠르다. 농민들은 전열 맞추라 해도 이렇게 못 맞춘다. 남자들이 군대 갔다 오니 오와 열은 참 잘 맞춘다.
난 오열할 줄 모르므로 멀뚱멀뚱 서 있다.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본다. 어쩌라고. 난 마이웨이를 달릴 거야.
사 온 꼬치를 질겅질겅 씹으며 다가오는 오크들을 구경한다. 오크들의 생김새는 오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처음 보는 오크가 봤던 오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것도 이상한 일이다.
왜 똑같은 거야? 이것도 비상식적이고 비정상적이다. 오크라는 생물이 있어도 이상한 일이고, 오크라는 생물이 익숙한 외형이라는 것은 더욱 이상하다. 그렇잖아. 영화에서 보던 놈들이 현실에 있어. 그건 사람의 상상력으로 만든 거라고.
비슷한 생물에 오크라는 이름을 붙였다 해도 비슷한 생물이 있는 것도 이상하다. 진화론은 어디 갔어? 물리학 실험처럼 진화를 사고실험으로 했니? 생각하면 진화하는 정신 생물이야? 우리는 군단이다!
처음 보지만 익숙한 오크의 외형을 두고 내가 혼란에 빠져있는 사이, 오크는 말이 통할 거리에 오크가 멈춰 섰다. 말이 통한다 해도 목청으로 통하는 건 아니고 마력으로 통할 거리다.
다른 오크보다 머리 두 개는 큰 오크가 앞으로 나온다. 몸에 흉터가 가득한 게 왜 안 죽었는지 모르겠다.
오크라는 생물은 선천적으로 면역력이 높아 상처를 통한 감염이 없나? 아니면 가슴을 크게 가르는 상처도 치료할 정도의 의료 기술(마법 포함이다.)이 있나?
오크가 입을 연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내 머리를 강타한다.
내 상식에 의거해서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자. 내 상식 속에서 오크는 무식한 생물이다. 그건 저놈들 복장을 봐도 짐작된다. 저 오크들은 복장과 무기도 오크다. 물론, 나쁜 의미로.
저런 놈들이 언어를 몇 개나 익힐 지능이 있을까? 이쪽 언어도 모른다고 보기에, 지금 앞으로 나온 저놈의 태도는 대화를 하려는 것 같다. 지나치게 당당하다.
오크가 입을 연다.
“얌전히 항복하면 고통은 없을 거다!”
“오, 씨발 하느님 맙소사!”
오크가 인간의 말을 사용한다! 내가 이상한 언어라고 이름 붙인 그 언어를 사용한다!
인간이 미쳤다고 오크 언어를 주워섬길 리는 없다. 밥집 아줌마의 말을 들으면 오크를 죽이면 죽였지, 오크랑 쎄쎄쎄 하고 언어까지 오크 언어를 써줄 정도로 인간과 오크의 관계가 양호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한국어 두고 굳이 오크어를 써주다니. 그거 식민지잖아.
그런데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네?
씨발, 이 세계는 미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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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다가다 침팬지를 발견했습니다. 침팬지가 익숙하게 말을 걸어옵니다.
"이봐, 친구. 잘 지냈어?"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