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99화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는데 우찬이 오고 있다는 소식은 들리지도 않았다. 그 대신 온통 시커먼 복장을 한, 얼굴에 눈에 익은 호위군이 후원 뒤로 들어와 전언했다.
말인즉슨 조금 늦을 테니 저녁은 혼자 먹되 남기면 이따 큰일을 치를 줄 알라는 것이었다. 큰일이라는 게 무엇일지 대충 감은 왔지만 오랜만에 궁에서 식사하는 이설을 위해 푸짐하게 한 상 차려진 모든 음식을 남기지 않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설은 제 식사가 남은 것을 보고 돌아가려는 호위군을 붙잡고 사정사정을 했지만 충직한 그 사내가 주군에게 거짓을 고할지는 의문이다. ‘마마께서 저를 붙잡고 거짓된 증언을 하라 사주하였습니다.’라고 털어놓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마마, 주 상궁입니다. 들어가 봐도 될까요?”
자박자박 조심스러운 발소리를 듣고 주 상궁인 줄은 진작 알았다. 안으로 들어오라 하니 품에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왔다.
“오늘 밤 필요하실 물건들입니다.”
“그게 무언데?”
“보시면 압니다.”
탁자 위에 바구니를 내려놓은 주 상궁이 그 위를 덮은 천을 걷자 비명에 가까운 감탄사가 절로 튀어 나왔다. 놀라 입을 틀어막았지만 주 상궁은 눈이 마주치고도 별 반응 없이 안에 내용물을 하나하나 꺼냈다.
“향유는 써 보셨으니 무엇인지 알고 계시지요? 너무 많이 사용하시면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질 수 있으니 뭐든 적당히 쓰셔야 합니다.”
“저기 주 상궁…….”
“이건 비문 입구를 넓힐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대체 그런 게 오늘 밤 왜 필요가 있는 건가?”
“마마께서는 사용 방법을 모르셔도 괜찮습니다. 폐하께서 다 알아서 하실 테니까요. 그저 이따 놀라지 마시라는 의미에서 미리 보여 드리는 것뿐입니다.”
시종일관 낯부끄러운 소리를 하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주 상궁은 바구니에서 끝도 없이 범상치 않은 물건들을 꺼내 이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무슨 용도로 쓰이는 것인지는 알려 주지 않았지만 얼추 짐작이 가는 기름 먹인 나무 막대는, 그 굵기가 우찬의 것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그걸 주 상궁에 면전에 대고 말할 수도 없고 이설은 혼자 부끄러워 죽을 노릇이었다.
“저기 주 상궁. 이런 건 다 필요 없을 것 같아.”
“꼭 필요한 것들만 추려서 가져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전에도 없이 잘했는데…….”
“그래서 많이 아프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또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다. 더 이상의 반박할 의지를 잃은 이설을 보고 주 상궁이 내심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탁자 위의 물건들을 정리했다. 물끄러미 그것들을 바라보던 이설은 주 상궁이 나가는 대로 몽땅 바구니에 담아 숨길 생각을 했다.
“폐하께서는 좀 더 늦으신다 하시지요?”
“응. 바쁘실 테니 어쩔 수 없지.”
“마마께서도 무척 피곤하실 텐데 내일 뵙는 건 어떻습니까?”
“음, 그건 싫어.”
온화하지만 강경하게, 이설이 딱 잘라 대답했다.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폐하가 보고 싶어. 내일까지는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아.”
“폐하를 연모하십니까?”
빈 바구니를 정리하며 주 상궁이 물었다. 이설은 소리 내어 대답하는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부끄럽기는 하지만 속마음을 고백하는 것이 싫지는 않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온 세상에 이 마음을 다 알리고 싶었다. 내가 금의 황제 금우찬을 연모한다고. 그리고 그 역시 나를 은애하고 있다고.
“늘 오늘만 같은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폐하도, 마마도 그리고 저희도요.”
“나만 잘하면 된다 그리 말하는 거지?”
“비슷합니다.”
먼저 농을 할 만큼 가까워진 주 상궁이 낮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고생했던 세월의 흔적이 녹아든 얼굴은 주름이 깊게 패었지만 웃음이 번졌을 때는 여느 때보다도 화사하고 인자해 보였다. 나이대도, 생김새도 아무것도 닮은 구석이 없는 주 상궁에게서 돌아가신 어마마마의 빈자가 채워진 기분이 들었다.
문득 어마마마와 아바마마 생각이 났다. 이제 두 분은 달의 뒤편에서 만나셨을 테지. 언젠가 나와 폐하처럼…….
……폐하께서도 나와 달의 뒤편으로 가실까.
“아, 주 상궁.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예 하문하십시오. 그런데 저도 정확한 사용법을 모르는 것들이 있어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으시다면 화홍이를 부르시는 게,”
“아니 그 얘기가 아니라.”
늘어놓은 물건들을 훑어 오며 주 상궁이 곤란스럽다는 듯 대답하자 이설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여간 수상쩍어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사용하지 않을 테니 궁금해하지 않겠다 생각하며 아예 보이지 않는 척 시야에서 차단했다.
“금의 황족들은 생이 다하면 귀천을 하여 어디로 가지?”
“말 그대로 하늘로 돌아가시는 거지요. 본래 계시던 곳으로요.”
“그래?”
“관련 서책들이 있는데 가져다드릴까요?”
“그게 좋겠어.”
“내일 아침 일찍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아침 일찍 말고 조금, ……조금 더 늦은 시간이 좋겠어. 정오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무슨 이유로 이설이 다급하게 고개를 흔드는지 눈치챈 주 상궁이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설도 이번에는 얼굴이 빨갛게 익을 만큼 창피해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화홍이를 불러 물건들의 사용 방법을 아시는 게 좋지 않겠냐며 걱정이던 주 상궁에게 한사코 고집을 부려 비로소 혼자 침소에 남았다. 누가 볼 새라 빈 바구니에 물건들을 다시 챙겨 넣은 뒤 구석 한편에 숨겨 놓았다가 다시 가서 향유 하나만 꺼내 왔다. 창피한 건 싫지만 그래도 너무 아픈 건 더 싫으니까.
생각보다 주 상궁과 오래 담소를 나눴다. 뉘엿뉘엿 지던 해는 완전히 사라지고 금빛 기와 위로 까만 어둠에 짙게 내려앉았다. 잠시 주 상궁에게 한눈판 사이 밖이 깜깜해졌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많이 차갑지 않아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후원으로 나가자 차고 상쾌한 바람이 느슨하게 위로 틀어 올린 머리를 흔들고 지나갔다. 간밤의 비를 머금은 풀 비린내가 스치는 바람 한 땀 한 땀에 섞여 들어 있었다. 새벽이슬과는 확실히 다른 냄새가 났다.
기분이 이상했다. 어느 날이었던가, 오늘 같은 캄캄한 밤 이곳에 서서 훗날 황궁을 떠날 미래를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설렜을까 절망했을까.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설렘과 결국 우찬을 떠나야 한다는 절망 그 어딘가를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그게 뭐라고 그렇게 힘들고 괴로울 수가 없었는데.
그날 달에 소원을 빌었었던가? 어렸을 때는 보름달을 보면 무작정 소원을 빌었는데, 그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날 커다란 보름달이 떴었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혼자 얼마 동안 서 있는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
“연이설.”
그것만은 기억에 선명하다.
“설아.”
“…….”
“연이설.”
불과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은 옛날 생각에 잠겨 있던 이설은 환청을 들은 줄 알았다. 기억했던 것과 똑같은 목소리로 제 이름이 불렸다. 느리게 몸을 돌려 바라본 곳에는 어김없이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우찬 님.”
뭐에 홀린 듯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낸 뒤에도 이설은 무슨 말실수를 했는지 자각하지 못했다. 달빛을 정면으로 받고 선 우찬은 급히 달려오기라도 했는지 흐트러진 옷차림에 가슴팍이 짧게 오르락내리락 움직이고 있었다. 후후 뱉는 입바람이 이설에게까지 닿는 듯했다.
“설아. 여기서 뭘 하고,”
기껏해야 두세 걸음 떨어진 거리를 달려가 우찬에게 안겼다. 낮에 그랬던 것과 똑같이 목에 팔을 두르고 꽉 끌어안아 매달리며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익숙한 태금궁의 향냄새와 미약한 술 냄새 그리고 우찬 특유의 살 냄새가 한데 섞여 났다. 이설은 그것만으로도 배꼽 아래가 찌르르 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아랫도리를 우찬에게 바짝 갖다 붙였다.
“……뭘 하고 있었느냐.”
“폐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날이 이렇게 추운데?”
“신첩은 북쪽 출신 아닙니까? 하나도 춥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가. 너를 안으면 그늘에 들어온 것처럼 시원하고 상쾌해 기분이 좋다.”
“그럼 자주 안아 주세요.”
이설이 목을 끌어안아 당기며 투정 부리듯 말했다. 아이처럼 구는 자신이 창피한 한편, 늘 우찬에게 하고 싶었지만 참았던 말을 스스럼없이 고백하는 해방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벅찼다. 이설이 까치발로 힘들지 않게 하려고 허리를 숙여 키를 맞춰 주는 우찬이 귓가에 더운 숨을 불었다.
“그럼 네가 자주 조르면 되지.”
장난 섞인 말에 심통이 나면서도 지고 싶지 않아 그럴까요, 하고 받아치니 우찬이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적막한 초겨울의 밤, 우찬의 낯선 웃음소리만이 이설의 후원을 가득 채웠다.
“설아 네 비밀 하나 말해 줄까?”
“신첩의 비밀이요?”
“그래 네 비밀.”
“폐하께서 알고 계신다면 비밀이 아니겠지요?”
“아니. 이건 나만 알고 있는 네 비밀이다.”
자신이 모르는 비밀을 어떻게 자신의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우찬이 알고 있는 이상 비밀이라 할 수가 없는 것인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 미약하게 술 냄새가 나신다 하였더니 술에 취하신 걸까 생각해 봤지만, 우찬이 술에 취한다니 어불성설이다. 생각조차 외람되지만, 사흘 밤낮을 술독에 빠져 지냈다가 나와도 우찬은 멀쩡할 사람이었다.
“신첩도 모르는 그 비밀이 대체 무엇입니까?”
목에 팔을 푸르고 한껏 고개를 뒤로 꺾어 올려다보며 물었다. 우찬은 쉽게 말해 줄 생각은 없는 듯 웃기만 할 뿐 말없이 느슨하게 찔러져 있던 비녀를 뽑았다.
“많이 길렀어.”
“이번에야말로 자를까 싶습니다. 그런데 신첩의 비밀이 무엇인데요?”
“꿈도 꾸지 말거라. 네 몸에는 칼끝 하나도 대지 않을 거야.”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 정도로 우찬이 강경하게 말하자 대꾸할 말을 잃어버렸다. 어차피 우찬이 허락하지 않으면 자를 수도 없는 머리고, 설령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우찬이 이렇게까지 마음에 들어 하는 이상 마음대로 자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불편한 것 역시 말할 것도 없고…….
“너를 처음 봤을 때 말이다.”
느닷없이 옛날얘기를 꺼내는 우찬이 이설의 손을 이끌었다. 그리고는 후원을 가장 잘 둘러볼 수 있는 가운데에 만들어 둔 자리에 먼저 앉은 뒤 이설을 그 무릎 위에 앉혔다. 이설은 거기가 원래부터 제 자리였던 양 우찬에게 몸을 기대며 물었다.
“신첩이 궁에 처음 들어왔던 날, 대전에서요?”
“아니 그때 말고. 네가 내 금잔화 씨앗을 훔치러 왔을 때.”
“훔치러 간 것은 아니었는데…….”
말끝을 흐리며 억울함을 표현해 보지만 좌우지간 우찬이라는 주인이 버젓이 있는 꽃밭을 밤중에 몰래 들어가 꽃씨를 가져왔으니 그리 당당할 수는 없었다.
“폐하께서 다시는 눈에 띄지 말라 하셨죠? 아무 무섭게 말입니다.”
“그리 무섭게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우찬은 그때 기억이 아직 나는 듯 난감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이설은 그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제 눈에 띄지 말라며 쌩하니 뒤돌아선 우찬의 너른 뒷모습을 보고 얼마나 슬펐던가. 어둠 속으로 멀리 사라지는 저 아름다운 사람이 평생 자신과는 가까워질 수 없을 거라는 실망감은 다시 생각해도 가슴을 후벼 팠다. 울적해진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듯 우찬의 손을 조심스레 감싸 잡았다.
“그런데 그때 얘기는 왜 꺼내십니까? 저를 또 놀리려고 그러십니까?”
“아니. 그냥.”
아무리 보고 또 봐도 피부 위에 새겨진 이름이란 것은 신기하기 이를 데가 없다. 하물며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라면 더욱.
우찬이 또 저를 놀리려고 한다 생각한 이설이 미리부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네가 그때 무척 아름다웠었다고 말해 주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