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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98)화 (298/300)

달의 황홀경

298화

“덕분에 나를 네 것이라 소리 지르는 모습도 보고. 좋은 구경 했구나.”

“잊어 주세요.”

“평생 기억하마.”

우찬이 장난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은 마음에 뭔가 충동적인 일을 벌이고 싶어졌다.

제까짓 게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입맞춤뿐인지라 우찬의 목에 다시 팔을 둘러 입술을 맞부딪혔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틈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가 우찬의 것과 닿자 화들짝 놀라 입술을 떼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방금 뭘 한 것이야?”

“그냥 저도 한번 제대로 해 보고 싶었습니다.”

“이게 제대로 한 거라고?”

“아닌가요?”

“다시 해 보거라.”

“신첩이요?”

“그래.”

“폐하께서 하시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목뒤로 두른 손을 꼬물거리며 이설이 다시 얼굴을 어깨에 문질렀다. 두 사람의 몸이 틈 없이 밀착됐다. 좀만 더 세게 안아 주시지, 하는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까지는 입이 떨어지지 않아 입술만 삐죽였다. 이런 버릇은 원래 없던 것이었는데 근래에 생긴 것인 듯하다.

“아까 최선을 다하는 중이라 하지 않았어?”

“너무 빠릅니다.”

“아직 한참 느린걸.”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아직은…….”

“아직은?”

뒤끝을 흘리는 말을 재차 반복해 따라 하는 우찬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상냥했다. 겨우 이런 것에도 아찔함을 느끼는 자신은 어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 같다.

“아직은 부끄럽습니다.”

“그럼 언제쯤 부끄럽지 않을 생각인데?”

“음 내년 이맘때쯤까지는 아마 나아,”

“늦어. 난 그렇게 오래 못 기다릴 것 같은데.”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폐하.”

“응.”

묻었던 얼굴을 떼고 목을 뒤로 쭉 뺀 이설이 심통 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정한 대답과 함께 시선을 내려 눈이 마주친 우찬은 이설이 왜 저를 뾰로통하게 쳐다보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이설은 어쩐지 그게 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왜 같이 안아 주지 않으십니까?”

“누가? 내가?”

“지금 저만 폐하를 안고 있지 않습니까?”

팔에 힘을 줘 목을 더 꽉 끌어안으며 이설이 물었다. 나긋한 웃음이 만면에 퍼져 있던 우찬은 잠시 그 얼굴 그대로 굳어 눈만 서너 번 느리게 깜빡이더니 곧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려 웃기 시작했다. 웃는 이유도 모르는 이설이지만 좌우지간 우찬이 저 때문에 웃는다는 것은 알겠다. 겨우 용기 내서 쫓아와 붙잡았더니 이런 취급이나 받고 억울하다.

“그게 그리 억울하더냐?”

“억울하다 말씀드리지는 않았습니다.”

속으로 뜨끔했으면서도 티 내지 않으려고 이설이 더 과장스럽게 투덜거렸다. 오늘따라 자꾸만 우찬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 하는 자신이 이상하다.

왜 이렇게 뭔가를 자꾸 확인받고 싶어 하는지…… 뭔가를.

“무척 억울한 표정인데?”

우찬이 자신을 내내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표정을 훤히 드러낸 채 눈에 보이는 뻔한 거짓말을 한 것이 수치스러웠다. 왜 제 얼굴은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지 원통하다.

“지금은 또 분해 죽겠다는 표정이고.”

“…….”

“내가 얘기하지 않았어? 넌 거짓말만 못 하는 게 아니라 표정도 못 감춘다고.”

보통 얄미운 목소리로 말을 하는 게 아닌 우찬을 한 번 흘겨봤다가 팔에 힘을 풀려던 찰나였다. 허리께에 휘감긴 단단한 팔이 느껴진 순간 포박당한 듯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래도 잘했다. 방금처럼 서운한 게 있거든 바로 내게 말해. 그럼 내가 다 들어줄 테니.”

우찬이 마주 앉아주지 않아 서운했다고 말을 꺼내는 것은 정말이지 창피하기 짝이 없는 어리광이었다. 태자도 제게 그런 어리광을 부리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우찬이 제게 어린애처럼 굴지 말라고 한마디 해 줬으면 좋겠다. 그럼 지켜야 할 선을 어디서 더 선명하게 그을 수 있는지 명확해질 텐데.

하지만 내심 우찬은 자신에게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을 알기에 이설은 혼자 기뻤고, 그걸 깨달았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우찬이 자신을 은애한다는 그 마음에서 한 치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폐하. 저를 연모하십니까?”

“물론이지.”

“그럼 오늘 밤 저를 안으실 건가요?”

이설은 가끔 이런 식으로 우찬의 말문을 막게 하는 것도 썩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들어 다양한 표정을 보긴 했지만 보통은 싸늘해지거나, 화가 나 흥분하는 게 전부인 우찬도 사실 이런 표정을 지을 줄 알았던 것이다.

“싫으십니까?”

“나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

“폐하 그래서 저를 오늘 밤,”

이쯤 되면 그냥 궁금해 묻는 게 아니라 나를 안으라고 거의 종용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이설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우찬이 조금만 그런 낌새를 보이면 뒤꽁무니를 빼고 도망가는 게 일상이었던 지난날과 비교하면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말꼬리가 잘린 것은 순전히 우찬 때문이었다. 숨도 못 쉬게 얼굴을 꽉 끌어안으니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목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왜 대답을 안 해 주실까 조금 불안해질 때쯤 숨통이 트였다.

“오늘 정무는 중요한 일이야.”

“폐하의 정무는 늘 그러시죠.”

가느다란 숨을 길게 빼며 당연한 말씀을 한다는 듯 이설이 웃었다.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우찬이 낯선 듯 반가워 기분이 좋았다.

“일찍 돌아올 테니 기다려.”

“예. 그런데 폐하 대답을 아직 안 해 주셨습니다.”

슬쩍 뒤로 물러나려는 우찬의 옷깃을 다급하게 잡았다가 손을 놓았다. 붙잡힌 건 우찬인데 정작 놀란 건 이설이었다.

옷깃을 놓친 뒤 허공에 떠 있는 손을 우찬이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는 손가락 끝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데 숨소리가 거칠었다. 몸이 안 좋으신 걸 또 무리하며 숨기고 있으신가 걱정이 됐다. 뛰어 안기며 상처를 건드리지는 않았나 싶기도 하고.

“돌아와서 해 줄 테니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아무 데도 가지 말고, 누가 와도 만나지 말고.”

이설의 손가락 끝을 살짝 물어 자국을 남기고 난 뒤 우찬이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길게 이어지는 더운 숨이 이설의 이마를 훑고 지나갔다. 우찬은 느릿하게 감겼다 뜬 눈으로 나른하게 이설을 내려다보고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는 뒤를 휙 돌아 두 걸음 멀어졌다가 다시 몸을 돌린다.

“아무 데도 가지 마.”

“예.”

“누가 와도 만나지 말고. 태자든, 차란이든. 소운이나 우 미인도 안돼. 알아들었느냐?”

“예. 단단히 알아들었습니다.”

사실 알아는 들었지만 이해는 되지 않았다. 아무 데도 가지 않는 것이야 그럴 테지만 누가 찾아와도 만나지 말라니 어째서인지 모르겠다. 우찬은 예전부터 이따금 통 이해가 되지 않는 명을 내릴 때가 많았는데, 어차피 묻는다 한들 명쾌한 대답을 들을 수도 있는 게 아니라 그러려니 넘기는 편이 좋다는 걸 안다.

했던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면서도 우찬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듯 두 번이나 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맘 같아선 이설도 우찬이 멀어질 때마다 뛰어가 안기고 싶은 게 수백 번이었지만 이 시국의 우찬을 자신만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다.

문득 우찬과 자신이 저잣거리의 평범한 백성들 중 한 명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의미 없는 상상이다. 우찬은 그 누구보다도 황제의 자리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우찬이 아닌 황제는 글쎄……. 태자가 장성하고 나서야 비교가 되지 않을까.

우찬이 떠나고 난 뒤에도 복도에 멍하니 서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궁인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날도 찬에 여기서 뭘 하시냐며 성화인 아이들의 손에 떠밀려 침소로 들어갔다. 태자가 먹다 남긴 당과와 찻잔들을 치우는 사이 멀거니 창밖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마마 폐하와 좋은 얘기 나누신 모양입니다. 표정이 좋아 보이셔요.”

“내가? 표정이 좋아 보인다고?”

“지금 웃고 계시니까요!”

웃고 있었구나 내가. 실없는 사람처럼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고 흘려보내며 연화와 눈을 마주쳤다. 연화는 그 누구보다 활짝 웃어주었다.

“연화야.”

“예, 필요한 거 있으세요? 뭐든 말씀만 하세요!”

“목욕을 하고 싶어. 아주 오랫동안 공들여서 깨끗하게.”

“폐하께서 좋아하시는 약재를 끓인 물로 준비할까요?”

눈치 좋은 연화가 샐쭉 웃으며 물었다. 조금은 장난을 치려는 의도가 분명했겠지만 이설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해 줘.”

“…….”

“필요한 건 전부 부탁해.”

무엇에 필요한 것인지 말해 주지 않아도 연화는 눈치가 빨랐다. 에구머니나, 하고 놀란 뒤 되려 이설보다 더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얼굴이 붉어져 알았다 대답한 뒤 침소를 뛰쳐나갔다. 화홍이 왜 빈손으로 나가냐며 구시렁거리다 이설과 눈이 마주치고는 히죽 웃었다.

비은궁으로 돌아온 첫날.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는 하루는 기분 좋은 것들의 연속이었다.

얼마 안 있어 기연과 유강을 만났다. 나갔던 방향 그대로 담벼락을 통해 들어온 둘은 몸을 완전히 회복한 이설이 궁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입궁한 것이라고 했다. 돌아온 지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궁 밖까지 소식이 퍼졌다는 게 놀라웠다.

만나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는, 그사이 키가 더 큰 유강을 달래 내보내느라 진땀을 뺐고 자초지종을 듣고 싶어 하는 기연에게 두루뭉술하게 얘기를 전달하느라 애를 먹었다. 발목의 이름이 사실 우찬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빼고 설명하려다 보니 빈 틈투성이라 기연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럼 폐하와는 오해가 다 풀리신 겁니까?”

“응.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걱정이 안 될 수가 있겠습니까? 다들 마마께는 쉬쉬한 모양이지만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궁 대문 앞에 사람 목을 걸어 놓은 게 폐하이십니다. 정말 태금궁에서 아무 일 없었던 것 맞으십니까?”

“목이라니?”

한가로이 사과를 집어 먹던 이설이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알아보니 마마를 납치했다 실토한 이민족 여인 중 하나였습니다만, 그날 아침 궁인들이 대문 앞에서 줄줄이 졸도한 걸 생각하면……. 정말 폐하와 오해가 풀리신 게 맞으십니까?”

기연의 걱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찬이 왜 하필 비은궁 앞에 그런 일을 벌여 놓았는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아마 이설은 비은궁으로 돌려보내 달라 떼를 쓰고, 우찬은 이설이 입을 열지 않으면 하루가 지날 때마다 궁인들의 목을 베어 버리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던 때일 것이다.

그 광경을 직접 보여 주고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고 싶으셨을 테지.

하지만 그 잔인하고 매정한 속내에 화가 나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일랑 들어오지 않았다. 미친 걸까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우찬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우찬이 차마 궁인들에게 손을 대지 못한 것은 순전히 자신 때문이다. 제 걱정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우찬이 직접 그렇게 말해 준 것도 아닌데 이설은 그냥 그런 거라고 알 수 있었다.

“웃으실 일이 아닙니다. 자리를 비우신 동안 폐하께 무슨 해코지라도 당하신 게 아닌지 제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요.”

“기연아.”

“예, 마마.”

“폐하는 나를 절대 해치지 않아. 정말이야.”

“어떻게 그리 자신하십니까?”

“폐하께선 나를 정말 좋아하시거든.”

“…….”

“그리고 나도 폐하를 정말 좋아해.”

스스로 느끼기에 다분히 아이 같은 대답이었다고 생각했다. 마치 태자가, 소자는 마마가 참으로 좋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태자의 마음이 거짓이 아니듯 제 마음도 거짓이 아니었다. 그리고 우찬의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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