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97화
“……가끔은 잘한다고 칭찬도 좀 해 주세요. 신첩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중입니다.”
그런 것치고는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어깨쯤에 이마를 쿵 찧어 기댄 뒤 부드러운 비단 옷자락에 얼굴을 비볐다. 우찬의 의복에서 나는 향냄새가 묘하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이 좋았다. 태금궁 향냄새가 이제 제 궁의 것처럼 익숙해진 것이다.
“너무 느리다고 그냥 가 버리시면 서운합니다.”
“네가 서운하다는 마음을 느낄 줄은 몰랐는데.”
“사람이면 누구나 갖는 마음입니다.”
“그래?”
어딘가 묘연해진 표정으로 우찬은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시선을 피했다가 돌아왔다. 할 말이 많이 보이는 얼굴이지만 쉽사리 그 속내를 털어놓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설은 가끔씩 그런 표정을 볼 때면 우찬은 보기보다 심술 맞은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물론 대체적으로 모두에게 친절하지 않은 우찬이지만 유독 자신에게만 짓궂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말할까 말까 고민하던 것이 짓궂게 웃음 진 얼굴을 보고 괜한 오기가 생겼다. 어린애처럼 굴면 안 되는데. 칭얼거리면 안 되는데. 내내 다잡았던 마음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폐하.”
자못 비장한 목소리로 우찬을 부른 이설이 고개를 들었다.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한 가지든 열 가지든 뭐든 물어보거라.”
“절대 곡해하여 생각하시면 아니 되십니다. 아셨죠?”
“안 그런다고 약조하지.”
마냥 가볍게 대답하는 우찬이 정말 그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지금이 아니면 나중에는 물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이설은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겨우 이런 것 따위를 묻기 위해 우찬을 붙잡아 두는 자신이 너무 어리석은 한편, 한낱 사람의 마음이라면 어쩔 수 없지 않냐는 핑계가 샘솟았다.
“왜 우 미인이어야 하나요?”
대답을 빨리 듣고 싶은 마음에 앞서나간 질문이 밑도 끝도 없었다. 다짜고짜 내뱉은 질문에 자신도 아차 싶었는데 우찬은 얼마나 황당할까 싶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황후 말입니다. 왜 우 미인이어야 하나요?”
“양 소원의 아비는 이번 전쟁에서 공이 무척 컸어. 무장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충신이지만 그 이상 힘을 실어 주고 싶지는 않아. 장차 태자가 황권을 휘두르는 데에도 방해가 될 것이다. 그리고 태자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양 소원이 태자에게 좋은 어미가 되어 줄 것 같지도 않고.”
“아뇨. 신첩이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사람 속도 모르고 장황히 설명하는 우찬에게 볼멘소리하듯 입술을 내밀며 이설이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 투덜거렸다.
“왜 신첩은 황후가 될 수 없는지, 그걸 여쭙고 싶었습니다.”
“네가 왜 황후가 될 수 없는지 그게 궁금했다고?”
한쪽 눈썹만 삐죽 위로 올라서는 표정을 보니 방금의 질문이 우찬에게는 얼마나 황당하게 들렸을지 가늠이 됐다. 이제 와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일뿐더러 이설은 그 대답을 듣고 싶었다.
물론 우 미인이 자신 대신 황후가 된다는 것이 원통하고 분해 마지않는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우 미인은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고, 좋은 황후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우 미인에게는 절대 억하심정이 있는 게 아니었다.
다만 어느 순간 우찬에게 묘한 서운함을 느꼈다는 게 문제였다. 명확한 이유를 콕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웠다. 이설이라고 황후 자리에 욕심을 냈던 것도 아닌데. 우찬이 자신이 아닌 우 미인을 선택했다는 것이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신첩이 사내라서요?”
자기가 뱉은 말에 상처받았다. 바보같이. 이런 이유라면 우찬이 우 미인에게서 후사를 보기 위해 사내가 아닌 여인을 선택했다는 말이 되지 않겠는가.
뱉은 말은 다시 도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만고의 진리에 다시 한번 굴복하며 이설은 착잡한 마음으로 우찬을 봤다.
“그 말인즉슨 내가 후사를 보기 위해 사내가 아닌 우 미인을 택하였다, 그리 생각하는 것이냐?”
“폐하의 의중이 궁금하단 뜻입니다.”
“그렇단 얘기지…….”
내심 아닐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물은 것이었는데, 우찬은 흔쾌히 아니라는 대답을 하는 대신 말끝만 흐리고 말 뿐이다.
“후사라…….”
그것도 꽤 괜찮은 생각인 것 같은데, 라고 말하는 듯한 눈동자가 이리저리 옆으로 움직인다. 그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에 온몸으로 맞부딪힌 이설은 목을 끌어안은 팔을 스르르 풀어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정말 후사를 위해 신첩이 아닌 우 미인을 택하신 겁니까?”
“설아. 만약 그렇다면 네 기분은 어떨까?”
그걸 물을 것이라고 묻습니까, 하는 되먹지 못한 대답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 뒤로 울컥 올라오는 서러운 울음을 참으려고 하는데, 속도 모르고 우찬은 빙그레 웃는 얼굴로 이설의 뒷머리를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정말,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후사 때문에 우 미인을 황후로 맞이하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런 이유라면 싫습니다!”
짓궂은 미소가 짙게 밴 얼굴로 되묻는 것을 보고 결국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물먹은 목소리를 듣고 우찬보다도 자신이 더 놀랐다.
“태자 전하를 위해 후사는……, 후사는 보지 않으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스스로 격앙된 목소리를 느끼고 혼자 진정하기를 애썼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우찬이 우 미인과 후사를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리는 하얘지고 눈앞은 깜깜해졌다. 벅차오르는 울음을 참는 것도 한계다.
“생각은 늘 바뀌기 마련이니까.”
“어떻게, ……어떻게 그런…….”
“하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내가 우 미인과 후사를 보는 것이,”
“싫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나마 진정 되어 가는 마음에 불을 지피려는 듯 우찬이 재차 물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리를 버럭 질렀다. 동시에 왈칵 쏟아지는 눈물이 앞을 가렸다.
“싫어? 어째서? 이 또한 나의 정무 중 하나인데. 설이 너는 다 참고 이해해 줄 줄 알았다.”
“어찌 저라고 다 참고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말씀하십니까! 제가 연모하는 분이 다른 여인과 후사를 보시겠다 하는데 제가 어떻게요! 어떻게 그런 것까지 참으라 하십니까?”
“태자가 걱정돼 이러는 것이야?”
“폐하께서 다른 여인을 안고 만지는 게 싫습니다. 눈을 마주치는 것도, 손을 잡는 것도 다 싫습니다. 양 소원과 동침을 하시는 줄 알았던 밤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런 일을 또다시 겪고 싶지 않습니다.”
한번 터진 눈물은 쉴 새 없이 볼을 타고 흘러 옷깃을 적셨다. 볼을 훔치려고 하기 전에 우찬이 한쪽 팔로 어깨를 끌어안은 뒤 다른 손으로 다정하게 눈물을 닦았다. 뿌옇던 시야가 조금 밝아지고 나니 우찬의 손목에 선명하게 새겨진 제 이름이 보였다. 이설은 뭐에 홀린 듯 두 손으로 이름이 새겨진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폐하는 제 정인이십니다.”
“너는 내 정인이고.”
“제가 폐하의 것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내 것이지.”
아기의 옹알이를 받아 주듯 우찬이 한마디 한마디 이설의 말을 따라 하며 웃었다.
“제가 폐하의 것이든 폐하도 제 것입니다.”
“…….”
“우 미인이 황후가 되는 것은 반대하지 않습니다. 허나 폐하를 우 미인에게 드릴 수는 없어요. 절대로.”
힘을 줘 우찬의 손목을 꽉 쥐었다. 제 악력 따위로 우찬을 붙들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지금 당장 심정이 너무 간절하고 절실해서 머릿속이 텅 비워진 것 같다.
“폐하. 후사 같은 건 보지 않겠다고 말씀해 주세요.”
“…….”
“다른 여인은 절대 품지 않겠다고요.”
“난 네가 가끔은 이렇게 굴어 주길 바랐어.”
애타게 애원하는 이설을 못내 사랑스러운 듯 내려다보는 우찬이 사르르 녹아내릴 것 같은 웃음을 지으며 이마에 입 맞췄다.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쓰러지려는 이설을 품으로 당기자 기다렸다는 듯 이설은 다시 우찬의 가슴에 안겼다. 아직 심장이 쿵쾅거리며 터질 것 같다.
“너는 늘 침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다른 사람을 먼저 이해하려고 하고 늘 네 감정은 뒷전이야. 착하고 미련한 너를 무척 은애하지만 설아,”
“네.”
설아, 하고 제 이름을 부르는 것에 이설은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우찬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내게는 그러지 않아도 돼.”
“……무엇을요?”
“욕심내고 서운함을 느끼고 투기하고 애원하고 투정 부려도 괜찮아. 나는 네가 모시는 황제가 아니라 너와 운명을 나눈 정인이니까. 그래도 괜찮다, 설아.”
등을 토닥이는 다정한 손길에 참았던 울음을 다시 터뜨렸다. 감정은 쉽게 드러내면 안 되는 것이라고 배웠고 나름대로 잘 처신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우찬을 만난 뒤로는 언제고 어린아이처럼 구는 것이 매번 낯설고 창피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괜찮다고 말해 주는 우찬을 기대해 본 적은 없어서 이설은 더 서럽게 울었다.
“후사 같은 건 없다. 너는 늘 내 거짓말에 속는구나. 그래도 오늘은 내가 좀 심했지 싶어.”
끌어안아 토닥이는 손길에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확답으로 듣는 순간 하얗게 비워진 머릿속에 차츰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채 가시지는 않았는지 고개를 들어 재차 물었다.
“정말 후사 같은 건 계획에 없으신 겁니까?”
“없다. 나는 너만 있으면 돼.”
“……태자 전하가 들으시면 서운해하십니다.”
“난 네가 서운해하는 게 더 싫다.”
이설은 내심 듣기 좋으면서도 입술을 삐죽이며 태자 걱정을 했다. 우찬은 다시 등을 토닥이며 나긋해진 말투로 속삭였다.
“어차피 누가 차지해도 상관없는 자리였어, 황후는. 너만 아니면 누구든.”
“그러니까 그게 궁금합니다. 왜 저는, 아니 신첩은 아니 된단 말씀이십니까?”
“황후는 죽을 때까지 궁을 떠날 수가 없으니까.”
우찬이 조금 진중해진 목소리로 웃음기를 지우고 대답했다. 말 자체는 이해했지만 속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한 이설은 우찬이 뒤이어 말하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태자가 즉위하여 상황으로 물러나는 대로 나는 궁을 떠날 것이다. 그런데 네가 지금 황후가 된다면 나는 너를 두고 떠나야 하지 않겠느냐?”
“아.”
“나는 그런 일을 절대 만들지 않을 거야.”
“…….”
“네게 미리 말하지 않은 건 내 잘못인 것 같다. 사과하마. 생각해 보니 우 미인을 만나기 전에 네게 먼저 말을 해야 했어. 네가 서운하다 느꼈던 것도 다 이해해.”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신첩이 더 못난 사람 같습니다. 신첩은 그런 줄도 모르고…….”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으로 우찬의 품을 파고들었다. 바로 직전에 소리를 지르고 울며 부렸던 추태가 부끄럽다 못해 평생의 수치스러운 한처럼 기억을 쫓아다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