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94화
의외로 상대의 방문을 덤덤하게 받아들인 이설은 재빨리 자리에서 몸을 세웠다. 아니나 다를까 우찬이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미리 언질을 받았는지 태자를 보고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 태자 역시 놀란 기색 없이 이설보다 한 박자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나 우찬을 맞이했다.
“오실 줄은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는,”
“앉아. 앉아서 해.”
“아니 저, 폐하……!”
빠르게 안으로 들어오기에 뭐가 그리 급한가 했더니 태자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가타부타 자리에 앉으라 어깨를 눌렀다. 당황해 버텨 보긴 했지만 이길 수가 없는 힘의 차이였다. 딱딱한 나무 의자에 엉덩이가 쿵 내려앉고 놀랐다가 태자 앞에서 창피를 보였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을 이길 길이 없었다.
“몸 돌볼 생각 못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인 것 같아. 스스로 아픈 사람이라는 자각이 전혀 없나?”
“신첩의 몸은 신첩이 잘 돌보고 있어서……, 그것보다 폐하 여기 태자 전하께서 와 계십니다.”
“알아. 봤다.”
“마침 근처를 지나시던 길에 신첩을 만나셨습니다.”
“그래?”
이설은 태자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 앞에 서서 엄한 표정을 풀지 못하는 우찬의 눈치를 살폈다. 태자가 후원 담벼락의 구멍으로 여태 드나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찬이 알았다간 큰 사달이 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제 그릇에 맞지 않아 겁이 덜컥 났다. 제법 그럴듯했는지 우찬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제야 태자를 봤다.
“소의의 말이 사실이냐 태자.”
태자에게 되묻는 우찬을 보고 아차 싶었다. 태자가 사실이라고 대답한다면 이설의 거짓말에 공범을 만드는 셈이고, 사실이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태자는 우찬에게 호되게 혼이 날 것이다.
“비은궁 대문 문턱을 넘어서 여기로 들어왔다고?”
“예. 마침 소자가 후원의 담벼락을 몰래 넘어오는데 근처에 계시던 마마의 도움을 조금 받았습니다. 하마터면 저 구멍에 몸이 끼어 큰일을 치를 뻔했습니다.”
“그새 또 몸이 컸나 보군. ……아무튼 설이 너는 문제다. 듣자 하니 점심상을 차려 준다는 것도 먹지 않겠다 했다던데?”
우찬도 태자도, 자신이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솔직하게 여기까지 온 경로를 털어놓는 태자에게 한 번, 그게 무슨 큰일이라는 양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리는 우찬에게 한 번 놀랐다.
“오늘 좀 많이 걸은 것 같은데. 발 좀 보자.”
의자에 이설을 앉히고 그 발치에 철퍼덕 앉은 우찬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이설의 왼발을 버선을 벗기는 것이었다. 훌러덩 벗겨지는 하얀 버선을 잡을 새도 없었다.
“폐하!”
“왜.”
“갑자기 왜, 태자 전하께서 보고 계십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힘줘 오므라뜨린 발가락을 살살 만지며 우찬이 어처구니없는 듯 피식 웃었다. 이설은 빳빳하게 굳은 목을 옆으로 옮기며 태자를 살폈지만, 태자는 별 표정 없이 먹던 당과를 먹는 중이었다.
“오는 길에 태의를 만났는데 네 상처를 살펴보고 부기가 가라앉거든 냉찜질을 해 주라고 했거든. 그래서 부기가 빠졌는지 확인하는 참인데, 태자가 보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지?”
“아니 저, 그게…….”
“기가 막히는군.”
“면목 없습니다.”
왜 사과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어찌 되었든 고개가 앞으로 푹 고꾸라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이설이 입을 웅얼거렸다. 못 들은 척 고개를 숙이고 발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우찬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우찬을 바닥에 앉힌 것도 모자라 옥수에 발을 올리고 있는 것도 난처하다. 부끄럽다고 발을 뒤로 뺐다가는 호통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을 알기에 괜히 끙끙 앓는 소리만 내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리고 태자는 당과를 몇 개 더 집어 먹으며 조용히 두 사람을 관망했다.
“부기는 다 가라앉은 것 같다.”
“많이 아프지는 않습니다. 냉찜질은 됐고 며칠 더 쉬면 나을 것 같습니다.”
“네가 뭐라고 태의의 처방을 무시해. 오늘부터는 여기 꼼짝 말고 누워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람을 보내 항상 확인할 테니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고.”
이설은 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럴 주제가 되나 싶어 억울함과 함께 입을 꾹 다물었다. 우찬에게 괜히 툴툴거리고 싶은 걸 보니 제가 버릇이 없어졌나 싶기도 하고 여러모로 기분이 이상했다.
우찬의 차를 준비해 주려고 들어왔던 태금궁 궁인이 바닥에 앉아 있는 우찬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흔들린 찻주전자 뚜껑으로 뜨거운 찻물이 튀겨 궁인의 손을 적시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찻주전자 뚜껑이 떨어지며 깨지고 별안간 소란스러워지며 궁인들 몇 명이 더 안으로 들어와 우찬이 바닥에 앉아 있는 모습을 봤다. 태자는 물론 당사자인 우찬까지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걸 이설과 궁인들만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못 본 척 후다닥 침소를 나갔다.
“진짜…… 너무 하십니다, 폐하.”
“뭐가?”
“신첩이 창피해할 걸 알면서 지금 이러시는 것 아닙니까?”
“전혀. 네 상처를 살펴보는 중이다.”
“태자 전하께서 당과를 네 개나 드실 동안에 말이죠?”
불퉁한 말투로 투덜거린 이설이 아차 싶어 태자를 봤다. 곧 죽어도 태자 앞에서는 어른스럽고 싶었는데. 또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모습을 보여 준 게 여간 창피한 게 아니었다.
이설이 왜 그렇게 불퉁한 태도로 입술이 삐죽 나왔는지 진작 알고 있었을 우찬이 그제야 소리 내 웃으며 발목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놀란 이설이 발을 당겨 무릎을 올려 세워 끌어안았다. 순순히 발이 딸려 올라온 것은 순전히 우찬이 힘을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 다 나은 상처는 핑계고 거기 있는 내 이름이 신기해서 들여다봤다. 그냥 보여 달라고 하면 넌 또 창피하다며 반나절 내내 부끄러워할 것 아니냐?”
우찬이 나타난 뒤로는 두 사람에게 일절 관심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던 태자가 다섯 개째 먹던 당과를 그 자리에 툭 내려놓았다.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을 이리 쉽게 태자에게 밝히는 것 같아 깜짝 놀란 이설이 태자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쉬워하는 것 같기도 한 얼굴로 태자는 입술을 삐죽였다.
“정말 마마께서 아바마마의 이름을 가지셨습니까?”
“가졌지. 그것도 이름보다 더 귀한 이름을. 헌데 태자는 표정이 왜 그러한가? 먹던 당과라도 빼앗긴 얼굴인데.”
“그럴 리가요.”
복잡 미묘한 얼굴이 무슨 감정인지 이설로써는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눈치 빠른 우찬은 그걸 단번에 파악한 듯하다. 어딘가 묘하게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저를 보고 웃는 게 아무리 봐도 속내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며 웃는 모습에 뭐에 홀린 듯 결국 발을 내렸다.
“아픈 곳은 정말 없고?”
“그냥 좀 간질간질합니다. 아프지는 않고요.”
“나도 처음에는 그랬어. 태의 말로는 상처가 날 수 있으니 절대 긁지 말라더군.”
“그래도 너무 간지럽습니다.”
“그래?”
“……폐하!”
답지 않게 칭얼거리는 이설을 사랑스럽다는 듯 올려다본 우찬이 발목에 혀를 감아올렸다. 축축하게 젖은 혀가 닿는 느낌에 기겁을 한 이설이 발버둥을 쳤지만, 힘에 밀려 꼼짝도 못 했다.
대놓고 불만스럽게 쳐다보던 태자마저 놀라 엉겁결에 고개를 옆으로 휙 돌려 시선을 피할 정도였다.
“물이 닿으면 그나마 좀 참기가 수월하던데.”
“다시는, 다시는 이러지 마십시오!”
하얗게 질린 얼굴색으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이설을 보고 우찬이 호탕하게 웃어 젖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자는 뭐가 뭔지도 모르겠다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함께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자신의 의사가 들어간 일이 아니었다고 해도 태자 앞에서 보이기에는 여간 민망한 짓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걸 참고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게 맞는 건지, 이참에 우찬에게 따끔하게 아닌 건 아닌 거라고 말을 전하는 게 맞는 건지. 갈팡질팡하다가 볼이 벌게진 태자를 보니 할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이설의 마음이야 어떻든 우찬은 잔여분의 남아 있는 웃음을 한 톨까지 모두 털어 낸 뒤 태자가 먹다 남긴 당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나저나 태자는 언제까지 여기 앉아 있을 셈인가? 요즘 슬슬 글공부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던데.”
“그렇지 않아도 학운관으로 돌아갈 참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자리를 비켜 줄 것 같던 태자에게 그리 말할 필요는 없었다. 누가 봐도 객식구를 쫓아내는 눈치로, 우찬 감정 없이 말했다.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로 너무 매정한 탓에 되려 이설이 무안할 정도였는데 태자는 별 타격이 없는 모양이었다.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알았나 싶은 건조한 얼굴이 조금은 불만스러운 듯 우찬을 올려다봤다. 태자가 아직 많이 크기는 했어도 우찬을 따라잡기에는 세월이 한참 남아 보였다.
궁 밖까지만, 대문 앞까지만, 본궁 앞까지만 데려다주겠다고 해도 어느 것 하나 허락을 해 주지 않는 우찬은 기어코 태자를 혼자서 궁 밖으로 내보냈다. 따르는 궁인들도 없이 혼자 터덜터덜 대문 밖을 나설 태자를 생각하니 안쓰러워 안절부절못했다.
“정말 전하를 혼자 학운관까지 돌려보내실 생각이십니까?”
“그동안 황명을 어기고 여길 왔다 갔다 했던 대가에 비하면 가볍지.”
“여태 알고 계셨습니까?”
“지난번 너와의 일이 있고 나서 태자가 내 생각 이상으로 영악하다는 걸 깨달았거든.”
“전하께서 달리 폐하를 속이시려고 그런 거짓말을,”
“됐어. 신경 안 써.”
장지문 앞에서 시무룩해 있는 이설의 팔을 당기며 우찬이 말을 끊었다. 태자의 얘기가 지겹기라도 한지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리 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