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93화
“앗!”
“두 분 괜찮으십니까?”
엉덩방아를 찧은 뒤 그대로 벌러덩 누워 자빠진 이설의 몸 위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주 상궁이 와서 드러내 준 뒤 이설이 엉금엉금 느리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풀밭에 엉거주춤 앉은 자세에서 이설이 움직이던 걸 멈췄다.
“아니 왜……, 태자 전하께서 갑자기 왜 또 여기서 나오시는 겁니까?”
“소의 마마!”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이설이 뒤로 다시 벌러덩 나자빠졌다. 특유의 아이 풋내가 싱그러운 태자가 목을 부둥켜 끌어안으며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못내 당황한 마음에 그대로 누워 있던 이설은 곧 맥없이 웃어 버리며 태자의 몸을 안았다.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태자 전하?”
“소자야 무탈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마께서는? 편찮으신 곳은 없으십니까?”
“예. 저 역시 무탈하지요. 근데 전하 몸이 부쩍 자라신 것 같습니다?”
몸통을 끌어안아 체격을 가늠하던 이설이 살짝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런 걸 물을 때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놀란 걸 확인해 보고 싶었다.
“키가 좀 많이 큰 것 같습니다.”
“두 분, 누워서 그러시지 마시고 이만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주 상궁이 누운 채로 얘기를 이어가는 이설과 태자를 일으켜 세웠다. 갑작스레 쏟아졌던 비로 인해 젖어 있던 흙이 옷 뒤편에 지저분하게 묻었다. 조심스레 흙을 털어 내며 주 상궁이 조심성이 없으시다고 핀잔을 줬다. 못 보던 주 상궁 모습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이제야 제가 아는 주 상궁인 듯싶으니 그나마 마음이 좀 놓였다.
안으로 들어가는 짧은 사이 태자는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이설에게 찰싹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설은 못 본 사이 갑자기 훌쩍 커 버려 매미라고 비유하기도 어려워진 태자가 여간 신기한 게 아니었다.
“전하. 대체 못 뵌 새에 키가 얼마나 자라신 겁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의례복 소매가 맞지 않아 옷을 새로 지었습니다.”
“의례복이라면 연회 직전에 지었던 것일 텐데, 그때보다도 더 몸이 자라셨다고요?”
“자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소자는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자라셨습니다.”
나란히 마주 보고 서 있으면 눈높이가 이미 달라진 태자가 신기한 한편 대견하기도 한 이설이 연신 놀라워하며 단언했다.
궁을 오래 비웠냐 하면 사실 그것도 아니다.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고 난 뒤이지만, 생각해 보면 시간은 그리 오래 흐르지 않았다. 태자를 마지막으로 본 것도 아무리 넉넉잡아도 석 달이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사이 이리 키가 컸다고?
키라는 게 이리 쉽게 금방 자랄 수 있는 거라면 왜 자신은 그러지 못했는지 하늘이 원망스럽다. 제 키는 연국에서 분명 평균을 웃도는 정도의, 지극히 평범의 범주였으나 금국에서 만큼 이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태자 전하는 앞으로도 더 크실 텐데 벌써 놀라시면 안 됩니다, 마마. 돌아가신 황후 마마만 하셔도 아마 마마보다 키가 크셨을 겁니다.”
“아, 그런가?”
“모르긴 몰라도 성년이 되시면 지금 폐하보다도 더 훌쩍 자라실지 모르겠습니다.”
태자 앞에 차를 잘 놓으며 주 상궁이 태자를 보고 인자하게 웃었다. 원래부터 둘 사이가 이리 좋았나 생각해 봤지만,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던 사이라고 기억한다.
“지금 소자의 키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런가요? 언젠가 전하께서 저를 내려다보실 상상을 하니 저는 무척 속이 상하는데요.”
“아, 그건 아마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무척 상심하는 이설을 놀리려는 심산인지 태자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웃어 보였다. 그 순간 태자의 얼굴에서 우찬의 흔적은 짙게 엿본 이설은 역시 그 피가 어디 가질 않는다 싶었다.
태자는 키가 부쩍 커지니 우찬과 이목구비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지만, 한편으로는 우찬 특유의 분위기가 더 강하게 풍기기 시작했다. 아이 같은 조급함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많이 침착해지고 태도가 진중해졌다. 첫 등장의 방법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그런데 전하. 아직도 저 구멍으로 비은궁을 출입하고 계셨던 것입니까? 비은궁이 폐궁 되었을 때도요?”
“별수 있겠습니까? 아바마마께서 누구를 막론하고 비은궁 출입을 철저하게 금하셨는걸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폐하께서 출입을 금하셨다면 다 이유가 있으셨을 텐데 왜 이를 어기시고 또 그런 행동을 하셨느냔 말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소자를 보자마자 그리 혼을 내셔야 하겠습니까?”
“아니 혼을 내는 게 아니라…….”
차라리 태자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침울하게 말했더라면 더 엄격하게 혼을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감히 그럴 위치가 되냐 싶긴 하지만 태자는 정말 위험할 뻔했다. 만약 우찬이 이를 알았다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이곳을 통해 기연과 유강까지 밖을 드나든다고 하니 두 사람도 무사하지는 못했으리라.
그런데 태자는 늘 이설을 속이기 위해 안쓰러운 척하던 것을 관두고 눈빛을 서늘히 아래로 내리깔았다. 우찬이 어렸을 때로 돌아간다고 해서 저런 얼굴을 가질 것 같지는 않지만 눈빛 하나만큼은 이것과 남다를 게 없을 거라고, 이설은 내심 속으로 감탄했다. 그리고 동시에 태자가 여기서 조금만 더 자라도 이제 자신은 절대 이길 수 없는 사람이 세상에 둘이나 생기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보니 이설과 똑같은 의자에 앉으면 바닥에 닿지 않아 동동 떠 있던 발이 지금은 바닥에 착 놓여 있다. 정말 얼마나 자란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제가 뭐라고 전하를 감히 혼낸다고 말씀하십니까.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정말 큰일이 나셨을 겁니다.”
“아바마마께서는 태금궁에서 나오실 생각을 안 하시는데 아실 턱이 있겠습니까? 문안 인사도 받지 않겠다 하시고 대체 소자를 왜 그리 미워하시는지.”
“폐하께서야 말로 전하를 미워하실 턱이 있겠습니까? 정무가 바쁘시니 그, 어쩔 수 없이…….”
“……마마께서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아바마마의 편을 들어 주시는 겁니까?”
불퉁한 표정으로 투덜거리는 태자가 이제야 익숙한 모습이다. 고작 한마디 했다고 누가 누구의 편을 들어 주네 하며 툴툴거리는 태자는 이제 발에 닿는 바닥을 뒤꿈치로 툭툭 건드리며 불만을 드러냈다. 그제야 안도의 웃음을 내어준 이설이 탁자에 당과를 손수 집어 건네주었다.
“드세요. 당과입니다.”
“소자는 당과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
“그런데 궁 밖에 나가 있으니 이게 어찌나 먹고 싶던지. ……전하께서 제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는 것은 저를 생각한 배려라는 것 알고 있습니다.”
“소자는 그저 마마께서 무사히 궁에 돌아오셨으니 됐다고 생각하던 참입니다.”
“그동안 키만 훌쩍 자라신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전하.”
홀짝 차를 입에 갖다 대 마시며 이설이 웃자 태자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당과를 건네받았다. 한입 베어 물고는 오물오물 씹는 것이 아무리 봐도 맛있게 드신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이설과 있을 때 태자는 제법 말이 많은 편이었는데 오늘따라 유독 말수가 줄었다. 괜히 마음이 더 쓰이기는 했지만, 태자 딴에는 궁금한 것들을 참고 견디느라 맘고생 중일 것이다. 하지만 이설은 그래도 그간 있었던 일을 태자에게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태자가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 표정을 짓고 있어도 아직 아이는 아이다. 벌써부터 무거운 얘기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소자의 외조부께서 곧 극형에 처해질 것 같습니다.”
“예?”
너무 담담하게 얘기해서 이설은 태자의 외조부가 누구인지 잠깐 생각을 했다가 시간 차를 두고 놀랐다. 태자의 외조부라면 손조익.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던 여러 원인들 중 하나이며 자신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은 장본인이다.
“손 가는 이제 금국에서 씨가 마를 것입니다. 소자가 그나마 가지고 있는 패도 이렇게 사라졌습니다. 별로 쓸모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마마.”
“예, 전하.”
“외조부께서 마마께 무슨 해를 끼치려고 했는지 어림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소자가 대신해 사죄드립니다.”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손조익을 완전히 처리했다는 말에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던 이설은 의자가 드르륵 밀리는 소리를 들었다. 놀라 고개를 번쩍 들자 태자가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손을 바닥에 짚고 있었다. 놀란 이설이 몸을 던지다시피 바닥에 내던졌다.
“전하! 이러실 필요까지 없으십니다. 전하께서는 금 가의 사람이십니다. 손조익의 악행을 전하께서 대신 책임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허나 소자의 생모가 나고 자란 가문입니다. 소자 역시 그 집안의 핏줄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데,”
“어서 일어나세요!”
태자의 말은 한 귀로 흘려들으며 팔을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결국 성공하긴 했지만 버티는 힘에 새삼 놀란 이설은 진땀을 뻘뻘 흘렸다.
“전하께서는 장차 황제가 되실 분이십니다. 귀한 존체를 아무 곳에서나 무릎 꿇으셔서야 되겠습니까?!”
팔을 꽉 잡고 호통치는 이설에게 태자는 뚱한 얼굴로 올려다봤다. 가까이서 보니 콧대가 더 높아진 것 같기도 하고 눈매가 더 날카로워진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이목구비 전체 인상이 전보다 더 진해진 게 틀림없다.
“어서 약조하세요. 다시는 이러지 않으시겠다고요.”
“훌륭한 군주는 자기 잘못을 뉘우칠 줄 알고,”
“전하의 잘못이 아니었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태부 손조익은 소자의 하나뿐인 외조부였습니다. 당연히 그 책임을,”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 순간 알아챘다. 기별도 없이 이설과 태자가 함께 있는 침소를 함부로 들어올 사람은 궁내에 단 한 명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