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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92)화 (292/300)

달의 황홀경

292화

길을 헤맸다. 갈래 길에서 너무 당연하게 틀린 길로 접어드는 이설에게 반대 길로 가시라 언질해 주며 윤 내관은 웃었지만, 이설은 낙담했다. 어쩌면 그동안 머리가 나빠진 것은 아닐까 무척 걱정스러웠다.

금군의 경비가 삼엄한 낯선 비은궁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이설을 맨 처음 반긴 것은 화홍이었다. 이설이 채 대문을 열기도 전에 멀리서 화홍이 치마를 걷고 호들갑스럽게 소리를 지르며 뛰어왔는데, 바로 뒤에 함께 있던 주 상궁은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화홍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비은궁 궁인들을 보자 반가운 마음에 함박웃음이 활짝 피었던 얼굴이 결국 울먹이기 시작했다. 입만 벙긋거리다 자리에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울며 통곡을 하는 이설을 따라 궁인들도 궁이 떠나가라 눈물을 흘려 댔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윤 내관과 태금궁의 궁인들이 겸연쩍게 뒤를 돌았고, 담장 너머로 금군이 흘끔거리며 안을 구경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줄 알았던 주 상궁도 울었다. 어찌나 애처롭게 오랫동안 우는지 안으로 들어가는 데에 연화가 몸을 부축해야 할 정도였다.

오랜만에 돌아온 침소는 전에 있던 것과 거의 다를 바 없이 그대로였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침상 위의 포단이 조금 두툼해졌고, 후원으로 열린 문 너머 보이는 푸릇푸릇했던 풍경이 조금 을씨년스러워졌다.

“여긴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마마도 참. 변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궁도 저희도 전부 다 그대로입니다.”

“오히려 변하신 건 마마입니다. 그간 대체 무슨 고생을 혹독히 하셨기에 팔다리 성하신 곳이 없으십니까? 태금궁 궁인들이 마마를 굶기기라도 한 것입니까?”

“얼굴이 반쪽이 되셨습니다, 마마!”

“환궁하신 뒤로 그래도 몸 건강히 끼니는 잘 챙겨 드실 줄 알고 한시름 놓았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속상해 죽겠습니다.”

빙 둘러싸고 와다다 말을 쏟아 내는 궁녀들의 울분과 성화가, 사실 이설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비은궁에 돌아왔다는 사실이 아직 감격이고 가슴이 두근거려 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충동을 참는 데에만도 기력이 쏟아질 것 같았다.

“잘 먹고 있다. 오늘도 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는걸.”

“요만한 간장 종지에 담아 드신 걸 저희가 모를까 거짓말을 치십니까?”

화홍이 새침데기 같은 얼굴로 대꾸하자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찬과 같은 반응에 어쩔 수 없이 눈물 자국 난 얼굴로 웃고 말았다.

모두가 익숙한 얼굴. 빠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세어 볼 필요도 없이 빈자리가 둘이다.

“그런데 기연이와 유강이는 어딜 갔니? 분명 두 사람도 함께 궁에 갇혀 지냈다고 들었는데.”

“아, 그게…….”

갑자기 당황하는 궁녀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다 종국에는 모두가 주 상궁을 일제히 바라봤다. 주 상궁은 이설의 옆에 함께 앉아 연신 이설의 손을 꽉 쥐고 있었는데, 못 본 사이 십 년은 더 늙은 듯 이마에 주름이 늘었다.

그나마 기력을 회복한 듯한 주 상궁 역시 아직 눈물 자국이 남아있는 얼굴로 평소의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궁녀들을 쫓아냈다. 아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이설 옆에 남아 그동안 있었던 얘기를 듣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주 상궁에게 대들지는 못했다.

문이 닫히고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서야 주 상궁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방금 전까지도 눈물을 흘렸던 탓에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낮고 침울했다.

“기연 님과 유강이는 비은궁 밖에 잠시 외출을 나갔습니다. ……예, 금군 몰래 나간 것입니다.”

시인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주 상궁은 그게 뭐 대수냐는 듯 일말의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 누구보다 궁의 규율을 우선시하는 주 상궁이 황명을 어기고 외출을 나간 기연과 유강을 비난하는 태도가 아닌 것에 이설은 조금 놀랐다.

“아시는 대로 비은궁은 며칠에 한 번 식량이 들어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바깥과 완전히 두절된 채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끔씩 이렇게 몰래 밖에 나가지 않으면 궁의 소식을 알 길이 없습니다.”

“궁은 언제부터 출입이 금하게 된 건가?”

“마마께서 연국 국경을 넘어 습격을 당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뒤 며칠 뒤였을 겁니다. 처음에는 저희 궁인들 중 누군가가 마마의 정행 정보를 외부로 유출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자네들을 의심했다고?”

혹시 그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있었던 것은 아닐지 놀란 이설이 높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다행히 주 상궁이 황급히 고개를 저어 이설을 안심시켰다.

“궁내 군청에서 조사가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모두들 혐의 없이 풀려났습니다.”

“그럼에도 폐궁 조치는 거두어지지 않았고?”

“예. 오히려 금군의 감시가 더 삼엄해지며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히 금하여졌습니다. 처음에는 이대로 저희를 굶겨 죽이시려는 건 아닌지 다들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마마께서 행방불명 됐다는 소식에 모두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요.”

이 대목에서 주 상궁은 이마를 짚어 한숨을 내쉬며 이설의 얼굴을 살폈다. 이설이 제 눈앞에 이리 앉아 있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지 다시 손을 쓰다듬었다가 꽉 잡았다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데 폐하께서 저희 궁을 완전히 버리시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폐하께서는 죄 없는 궁인들을 그리 함부로 대할 분은 아니야.”

“예. 며칠에 한 번씩 넉넉한 식량과 물이 들어왔습니다. 끼니만 거르지 않는다면 사는 것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니 저희 모두 오매불망 마마께서 무사히 돌아오시기만을 염원하며 기다렸습니다.”

“자네들에게 큰 폐를 끼쳤어.”

“폐라니 또 가당치도 않은 말씀을 하십니다.”

다시 눈물이라도 왈칵 쏟을 것 같던 주 상궁이 본연의 엄한 얼굴로 돌아와 이설을 나무랐다. 입매가 매섭게 일자로 다물어진 것과 치켜 올라간 눈썹의 전체적인 이목구비를 본 이설이 갑자기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주 상궁은 따라 웃지는 않았지만 방금보다는 훨씬 풀어진 입매로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그래서 기연이와 유강이가 가끔씩 비은궁 밖으로 나가 황궁 소식을 알아다 오는 거라고?”

“예. 내섬시 관리들이 입단속을 얼마나 단단히 받았는지 몇 푼 찔러 주는 걸로는 쉬이 입을 열지 않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덕분에 마마께서 환궁하신 소식도, 태금궁에서 지내고 계셨다는 소식도 알 수 있었습니다. 태의가 태금궁을 수시로 드나들고 있다 들었습니다. 편찮으신 것은 비단 폐하 한 분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죠?”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설을 훑어보는 주 상궁은 이설이 환자라고 기정사실로 하는 듯했다. 하기야 스스로 생각해 봐도 이 꼴을 하고 아프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더 우습겠다.

이설이 멋쩍게 웃자 주 상궁이 정말 태금궁 궁인들이 밥을 굶긴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물었다. 태금궁의 정 상궁이 들으면 노발대발하였을 거라고 생각하며 이설이 적극 부인했다.

“그런데 밖에서 보니 금군 경비가 보통 삼엄한 게 아니던데, 기연이와 유강이는 도대체 어디로 궁을 빠져나갔다는 건가?”

“저기입니다.”

화제를 돌리는 이설에게 속아 넘어가 주며 주 상궁이 후원 밖으로 멀리 손을 가리켰다. 정확히 어느 지점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어딘가를 쳐다보며 이설은 그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그렇지만 그 틈은 너무 좁아서 태자 전하께서도 몸이 걸리실 정도였는데?”

“그래서 근처에 나무를 쳐 내고 담벼락의 구멍을 좀 더 넓게 뚫었습니다.”

“담을 훼손했다고?”

“예.”

담장은 황궁의 재산이다. 자기 궁 후원에 풀 한 포기나 나무 한 그루쯤이야 뽑아 버린다고 큰 죄는 아니겠지만 담을 훼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다른 궁인이 보기라도 했다면 황명을 어기고 궁을 벗어난 죄뿐만 아니라 황궁 소유의 담에 흠집을 낸 처벌까지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무시무시한 얘기를 하면서도 주 상궁은 그것 또한 무슨 대수냐는 듯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심드렁했다.

“안 계신 사이 유강이가 덩치가 더 커져 어지간한 구멍으로는 몸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

“게다가?”

“부쩍 성장기이시기도 하고요.”

“응?”

“…….”

“누가?”

유강이가 아직 성장기였던가? 그래, 매해 손가락 한 마디 이상은 자라고 있으니 성장기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주 상궁의 어색한 높임말과 뭔가 감추는 듯 석연치 않은 표정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누가 성장기라는 건데?”

주 상궁이 재차 되묻는 이설을 피했다. 영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주 상궁을 다시 불러 보려는 이설에게 멀리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아니라는 건 단번에 알아들었다.

“나가서 직접 보시지요.”

이설이 후원 쪽으로 시선을 돌린 사이 주 상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지러운지 자리에서 한 번 비틀하는 것을 이설이 재빨리 부축해 팔을 잡았다. 주 상궁은 그게 조금 민망했는지 멋쩍게 웃고는 이설과 함께 후원으로 나섰다.

후원은 이설이 없는 동안에도 잡초 하나 없이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없는 사이 아이들이 기를 쓰고 열심히 나무를 가꿨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짠했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뒤 소리가 커지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수풀 더미가 빽빽한 그곳은 한때 태자가 담에 난 구멍으로 드나들던 나름의 비밀통로였다.

어느 날 우찬이 찾아와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이후로는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잠시 잊고 지내던 곳이었는데, 이제 보니 새삼 발자국으로 다져 놓은 것 같은 인적이 눈에 띄었다.

어? 하는 사이 수풀 더미에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잡아 달라는 듯 휘적거리는 작은 손을 보자 이설은 홀린 것처럼 양손으로 잡아 제 쪽으로 세게 당겼다. 그러자 마치 땅에 묻은 당근이 뽑혀 나오듯 수풀 사이로 사람 형체가 쑤욱 뽑혀 나오며 반동으로 이설을 밀어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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