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90화
“일부러 그렇게 밟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우찬과 함께 태금궁으로 돌아가는 길. 이설은 벌써 네 번이나 물웅덩이에 발을 담갔다. 제 발이 젖은 것은 물론이요,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우찬의 발까지 젖게 한 뒤로 조심한다고 조심하는데, 우찬을 넋 놓고 보며 걷고 있노라면 어디가 마른 땅이고 어디가 물 고인 땅인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송구합니다. 신첩이 멀리 떨어져 걸을까요?”
“한 보 이상 떨어지기만 해 봐라. 궁인들 앞에서 체면이고 뭐고 눈물이 쏙 빠지게 해 줄 테니까.”
“…….”
“왜 웃지? 내가 그리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입가에 희미하게 띄운 미소를 알아챈 우찬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이설은 마음의 대답과는 달리 고개를 저으며 아닙니다, 하고 대답한 뒤 웃었다.
비 온 뒤 날이 갠 것처럼 오늘 하루 날씨가 무척 좋았다. 사실 금국은 늘 이렇게 날씨가 좋았는데 유독 오늘이 더 맑고 쾌청한 것 같았다. 문득 우찬과 함께 뱃놀이를 갔던 날이 떠올랐다. 아마 태자도 함께 갔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태자를 안 본 지도 한참 지났다. 언제 기회가 되면 은근슬쩍 태자를 보고 싶다 말을 꺼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그건 그렇고 조반은 먹었느냐? 영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두 그릇이나 먹었습니다.”
“간장 종지만 한 그릇으로 두 그릇이었겠지.”
“아닙니다. 대접만 한 그릇이었습니다. 정 상궁에게 확인해 보십시오.”
내심 뿌듯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말한 것이 조금 창피하긴 했지만, 오늘 아침 식사를 두 그릇이나 비워 낸 자신이 무척 기특하던 차였다. 얼마나 기특하였는지, 상을 치우러 온 정 상궁에게 자신이 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는 걸 꼭 우찬에게 언질해 달라고 부탁했을 정도였다. 이제 생각해 보니 들쭉날쭉하던 정 상궁의 입매가 웃음을 참으려고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잘했다. 그렇게 부른 배를 내게 자랑하러 대전까지 온 것이야?”
“산책도 할 겸 겸사겸사 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보러 말이지.”
“겸사겸사요.”
끝내 우찬을 보러 대전까지 걸었다는 말은 뱉지 못한 이설이 붉어진 볼을 긁으며 시선을 멀리 던졌다. 왜 사람은 부끄러울 때면 얼굴이 붉어지는 것일까. 발바닥이나 엉덩이같이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곳이 발그레해지면 들키지도 않고 좋을 텐데.
“그런데 폐하.”
“응.”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부드러운 어조의 단답에서 이설은 새삼 우찬이 자신을 은애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조금 전 대전에서 신첩이 주제넘게 나선 것은 아니겠지요?”
“이제 와 그런 걱정을 하다니, 늦어도 너무 늦은 것 아니냐?”
“늘 마음속에 걸리던 일이었습니다. 신첩 하나 때문에 금에 얼마나 큰 피해를 입힌 건지. 어떤 방법으로든 꼭 보상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생각 하지 말거라. 네가 궁에 있었다 한들 침입이라도 하여 널 납치했을 놈들이다. 네 탓이 아니야.”
훈계하는 어조에서도 느껴지는 애정에 웃음이 나는 걸 보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듯싶다. 잠시간 말을 잇지 못하는 이설을 조용히 기다리던 우찬은 이설의 머리 장식이 망가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제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대신 그런 묘안이 있거든 다음부터는 나와 먼저 상의하는 게 좋겠어.”
“그러려고 했는데 밖에서 대신들이 하는 얘기를 듣다 보니 저도 모르게……. 자중하겠습니다.”
“별일이구나 네가.”
피식 웃은 우찬은 그래도 별로 신경 쓰지는 않는다는 듯 이유를 캐묻지는 않았다.
대전 밖에 도착했을 때는 대신들의 열띤 회의를 빙자한 고성이 오가는 중이었다. 가만히 듣던 이설은 누군가 우찬의 무리한 전쟁 선포를 비난하며 이번 일로 도국에 어마어마한 빚을 지게 생겼다는 지탄에 벌컥 대전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 일은 우찬이 끝까지 몰랐으면 좋겠다.
“매암 광산은 네 이름으로 연국에 서신을 보낸 뒤 도국과 조율해 볼 것이다. 산을 통째로 넘겨줄 수는 있지만 그럴 필요는 없지. 적당히 합의점을 찾아볼 테니 걱정 말거라. 네 덕분에 차란이 한 시름 놓았겠어.”
“승상께도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안 그래도 큰 빚을 진 터라 늘 신경이 쓰였는데요.”
“그런 놈 같은 거 마음에 담아 두지 말거라. 불쾌하니까.”
우찬이 인상을 팍 일그러뜨리며 이를 악물었다.
“승상뿐만이 아닙니다. 그간 빚을 진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이를 어찌 다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 미인은 신첩을 찾으러 직접 출정까지 했다 들었습니다.”
“아, 그랬지.”
잊고 있었던 일이 생각난 듯 우찬이 제법 놀란 티를 냈다.
우 미인이 자신을 찾기 위해 직접 부족민들을 이끌고 출정하여 이민족들과 칼을 들고 싸우기까지 했다 들었다. 아무리 출신 부족이 다르다 해도 같은 가지에서 갈라진 동족을 상대로 칼을 드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까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 빚은 내가 갚아 줄 테니 넌 아무 걱정 말거라.”
“어찌 말입니까?”
“곧 알게 될 것이다. 이설아.”
“예.”
또 우찬에게 한눈을 팔다 물웅덩이에 발을 쑥 담그려던 이설을 품에 당기며 우찬이 낮은 목소리로 이설을 불렀다. 두 사람이 틈 없이 밀착된 모습을 보고 뒤를 따르던 궁인들이 일시에 멈춰서 바닥으로 고개를 숙였다.
“궁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든, 너는 그저 내 옆에 있으면 된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지?”
“물론입니다.”
“그래 똑똑하다. 이리 똑똑한 데다 아침을 두 그릇이나 먹었으니 포상을 내려야겠구나.”
달리 부른 티가 나는 것도 아닌 납작한 배를 쓰다듬으며 우찬이 농담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대전에서 주제넘게 나선 것은 아닐까 내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던 이설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우찬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또 무슨 장난을 쳐서 나를 곤란하게 만드실까, 내심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하는데 포상이란 아주 뜻밖의 것이었다.
“윤 내관.”
“예, 폐하.”
마찬가지로 꼭 끌어안은 두 사람을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윤 내관이 종종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현 시각 이후로 비은궁의 폐궁령을 철회한다. 비은궁 궁인들의 바깥출입을 허하고 궁의 안주인을 맞을 준비를 하라 전하여라.”
“분부 받잡사옵나이다.”
허리를 깊이 숙였다 핀 윤 내관이 눈짓하자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호위군 중 하나가 담을 훌쩍 넘어 사라졌다.
“폐하!”
얼굴에 화색이 만연해진 이설이 그렇게 지키려던 채신머리를 잊고 탄성을 내질렀다. 우찬이 함박웃음이 핀 얼굴 위로 입을 맞추자 놀란 윤 내관이 부리나케 몸을 돌렸다.
“나는 갈 곳이 생겨 가 봐야겠다. 너도 이만 갈 곳이 생겼겠지?”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정말 신첩의 궁으로 보내 주시는 겁니까?”
“분하기는 하지만 넌 비은궁에 있을 때가 가장 어여쁘니 어쩔 수 없지.”
“신첩은 폐하와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돌아 버리겠군.”
이설을 품에서 떼어 내며 우찬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충동을 억누르듯 주먹 쥔 손을 이마에 대며 한숨을 길게 내쉬고서야 허탈하게 웃었다.
“일이 끝나는 대로 갈 테니 기다리고 있거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내 궁에서 벗어나는 게 그리 기쁘더냐? 근래 본 것 중에 가장 크게 웃는구나.”
“폐하의 궁이 좋은 이유는 폐하께서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신첩이 가장 좋아하는 곳은 폐하께서 계신 제 궁이고요.”
우찬이 다시 주먹을 말아 쥐어 이마에 갖다 댔다. 이번에는 한숨 두 번으로 평정심을 되찾은 뒤 이설의 볼을 쓰다듬었다.
“이만 가는 게 좋겠다. 더 얘기했다가는 아무 데도 보내지 못할 것 같다. 안 그래도 전할 얘기가 있는데…….”
“아직 남은 일이 많으십니까? 너무 무리하시는 건 아니신지 걱정입니다.”
아까부터 상처는 괜찮냐 몇 번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우찬이 갑자기 야속해졌다. 제가 감히 우찬에게 훈계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옥체를 돌보지 않아도 너무 돌보지 않는 우찬의 무심한 성정이 이렇게 미울 수가 없다. 저러다 정말 또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쩔지 애타는 건 주변인들뿐이다.
상처 걱정을 하기 시작하자 우찬은 더 얘기하기 귀찮은 듯 이설을 비은궁 방향으로 밀어냈다. 모퉁이를 지날 때까지 네 번쯤 뒤를 돌아봤는데, 그때까지도 우찬은 서 있던 곳에서 꼼짝 않고 이설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퉁이를 지나 비은궁으로 향하는 이설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자 윤 내관이 웃으며 물었다.
“그리 좋으십니까?”
“예. 무척 좋습니다.”
“그래도 너무 좋은 티를 내시면 늙은이가 많이 서운합니다. 다른 궁인들도 그렇고요.”
“아, 그렇습니까?”
“허허. 농담입니다, 마마. 그래도 너무 빨리 걸으시면 발에 무리가 올 수 있습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으로 걱정하는 윤 내관에게 마주 웃어 보인 뒤 걸음을 조금 늦췄다. 닮은 구석이라고는 비슷한 연배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윤 내관에게 고국에 계신 아바마마의 모습이 겹쳐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바마마께서 나흘 전 달의 뒤편으로 돌아가셨다.
아침에 태금궁에 있을 때 우찬에게 서찰을 전해 주러 왔던 내관이 입을 잘못 놀리는 바람에 마침 복도를 나서던 이설의 귀에 들어가게 됐다. 크게 화가 난 상궁이 노발대발하는 것을 말리느라 바로 슬퍼할 틈 없이 있다가 산책을 핑계로 밖을 나섰다. 그냥 우찬이 너무 보고 싶었다.
그동안 제 앞길이 막막하여 잊고 산 것이 죄책감이 되어 돌아왔지만 이내 병환으로 크게 고생하셨을 아바마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아바마마는 늘 먼저 돌아가신 어마마마를 그리워했다. 많지 않은 후궁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달로 돌아간 어마마마는 비단 이설에게만 그리움의 대상은 아니었다.
우찬이 해야 할 말이라는 것은 이 부고 소식이 아닐까 싶다. 혹 어떻게 말을 전해야 할지 너무 고민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