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88화
“이름은 어찌 적을까요.”
시찰 나갈 전국 명소들을 생각해 보던 게 한참 지난 모양이었다. 아직 바닷가 근처 지방은 생각도 못 했는데 어느새 귀비가 부릅뜬 눈으로 우찬을 노려보고 있었다.
우찬은 단조로운 목소리로 염두에 두었던 몇몇 대신 및 귀족들의 이름을 불렀다. 대개는 손조익을 따르는 자들과 훗날 태자의 앞날에 방해가 될 자들이었다. 꼭 이런 방법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처리할 방법은 많을 테지만 기회가 있을 때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잠시 후 귀비가 묵묵히 다 쓴 글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우찬이 각기 세 장의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폐하께서 보신다고 아십니까?”
건방진 도발에 오히려 조소로 응수한 우찬은 말로 대꾸하지 않고 종이를 각각 접어 품에 넣었다. 귀비가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본다고 알 리가 있나. 이설에게 보여 준 뒤 내용을 확인한 후 각 종이들은 적재적소에 쓰일 것이다.
이것도 다 이설이 할 줄 아는 게 많기 때문에 쓸모 있는 거짓 증좌가 되는 것이었다. 어쩐지 이설이 더 어여쁘단 생각이 들었다.
“약조. 꼭 지키셔야 합니다.”
“허튼수작을 부린 게 아니라면 그리하지.”
“이제 와 제가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본래 너희 야만족이라는 것들은 좀처럼 믿음직스럽지가 않단 말이야.”
천천히 자리에 일어서는 우찬을 올려다보며 귀비가 눈을 부라렸다. 피붙이도 아니고 같은 부족 출신도 아닌 것을, 싸잡아 낮춰 불렀다고 저리 화를 낼 일인가. 영 이해가 가지 않는 우찬이 가겠다는 말도 없이 귀비를 등졌다.
대전으로 가기 전에 이설에게 들를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귀비는 이미 머리에서 지운 순간 잔뜩 꼬인 목소리가 물었다.
“만약 소의에게 끝까지 폐하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무시하고 가려다 반쯤 뒤를 돌아섰다. 얼핏 보이는 귀비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끝까지 안쓰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랬다면 저를 의심하지 않고 정인이라 믿으셨겠습니까?”
“글쎄.”
애매하게 말을 흘리며 턱을 쓸었다. 이제 와 무슨 기대를 하고 묻는 것인지 귀비의 마음은 헤아릴 수가 없고 헤아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어차피 지금과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을 텐데.”
“…….”
“넌 여기에, 진짜 연이설은 나와 함께.”
“저도 이름이 있습니다.”
“그렇겠지.”
우찬이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 대꾸하며 눈썹을 찡그렸다. 왜 이런 영양가 없는 얘기를 주고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찌 한 번을 묻지 않으십니까?”
울먹이는 소리로 소리치는 귀비가 그제야 또래 여인들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저 감상이 그러할 뿐. 어떤 동정심이나 측은함도 느끼지 못한 우찬은 더 이상 대꾸할 가치가 없어 그대로 침소를 빠져나왔다. 문을 열고 나오기 직전 무미건조하게 마른 눈빛이 귀비를 이유 없이 훑어 내렸다.
문을 닫은 직후 악에 받친 비명 소리와 세간살이들이 박살 나는 소리가 처참하게 들렸다. 놀란 금군이 뛰어 들어가려는 것을 남의 일인 양 흘끗 본 뒤 미련 없이 무암궁을 나섰다.
대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멀리 내관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와 윤 내관에게 서찰 하나를 건넸다. 그리고 윤 내관에게서 다시 우찬에게로 전달되었다.
비밀스럽게 밀봉되어 있던 서찰을 열어 내용을 확인한 우찬이 대놓고 얼굴을 찡그리며 좋지 않은 기분을 드러냈다. 서찰을 받아 챙기려던 윤 내관은 우찬의 표정을 읽고는 뒤로 물러섰다.
요 며칠, 아니 며칠이라고 할 것도 없다. 어제부터 일이 잘 풀린다 싶었다.
“무슨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으십니까?”
“……됐다. 대전으로 가지.”
“태금궁은 들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일단은 그래야겠어.”
“예.”
차란에게 먼저 처리하라 맡겨 놓은 일이 무엇이었지. 편국으로부터 받을 전쟁 배상금을 논의하고, 각 지방의 수해 대책을 세우고, 도국으로 명목상의 보상금을 보내고. 그 밖의 것들은 생각할 게 아닌 것 같군.
수해 대책이야 국고를 열고 금군의 지원만 있다면 시일 내로 해결될 문제고, 전쟁 배상금 역시 받는 입장에서 크게 고민을 해야 할 것은 없다. 이미 편국 영토 일부가 금국으로 편입되기 직전이고 전쟁 포로들과 공납금을 맞바꾸는 일만 신경 쓰면 된다.
골치 아픈 건 도국으로 보내야 할 명목상의 보상금이다.
이설을 찾는 동안 도국의 도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모른 척 눈을 감기에는 두 나라 간의 도의상 결례가 생긴다. 아무리 금국이 대국 된 입장이라고는 하나 이런 큰 도움마저 사사롭게 치부해버린다면 추후에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막대한 보상금으로 그 값을 치러 주자니 금국 입장에서는 꼴이 우스워질까 걱정인 것이다. 성의 표시를 받는 쪽도, 하는 쪽도 서로 기분 상하지 않을 선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게 필요하다.
“폐하 대전은 이쪽인데 어디를…….”
곰곰이 다른 생각을 하던 차에 대전으로 가는 길을 지나친 우찬을 종종 쫓으며 윤 내관이 다른 길을 알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길을 돌아 대전으로 올라간 우찬이 안으로 들어서자 대전에 모인 대신들의 시선이 한눈에 쏠렸다.
그리고 우찬은 그 시선들을 지나 대전의 가장 높은 곳, 늘 자신이 앉던 자리 옆으로 눈을 옮겼다.
“오셨습니까, 폐하.”
“이설 네가 여긴 무슨 일로…….”
나긋한 목소리로 자신을 맞이하는 이설은 생각도 못 했던 일이라 답지 않게 우찬이 말끝을 흐리며 천천히 대전 단상으로 올라갔다.
아침까지만 해도 부스스하게 헝클어진 머리에 세상모르고 자고 있던 이설이었는데, 언제 단장을 하고 여기까지 온 건지 말끔한 차림새로 서 있었다. 오랜만에 머리를 틀어 올린 이설이 낯설기도 하고 보기 어여쁘기도 해 눈을 뗄 수가 없었는데, 이설은 그게 부끄러웠는지 아닌 척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대전은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야? 그것보다 조반은 먹었느냐?”
아래에 수많은 대신들은 등지고 서서 이설을 마주한 우찬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물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긴장 넘치는 얼굴로 서 있던 이설은 조반을 먹었냐는 물음에 작게 웃음을 지으며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예, 먹고 나왔습니다.”
“폐하. 소의 마마께서 조금 전에 무척 솔깃한 제안,”
“발은? 걷기 힘들지 않고?”
다소 흥분된 어조로 둘 사이를 막 끼어들려는 차란을 무시하고 우찬이 발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설은 우찬과 차란을 번갈아 쳐다봤다가 조금 곤란한 듯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태의가 침을 놓아 준 뒤로 많이 좋아졌습니다. 여기까진 가마를 타고 왔고 조금씩 걷기에는 무리 없습니다.”
“몸도 좋지 않은데 왜 여기까지 온 게야. 내가 보고 싶어, 그리 참을 수가 없더냐?”
바로 옆에 누가 듣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 우찬이 농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입안에 맴돌아 발을 동동 구르던 차란은 대놓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이쪽만 바라보고 있는 대신들을 발견한 뒤 무표정을 유지하느라 애썼다.
붉어진 얼굴로 연방 아니라고 손사래를 칠 줄 알았던 이설이 수줍게 웃었다.
“예. 더는 기다리는 것만 하고 싶지 않아 신첩이 왔습니다. 근데 폐하께서 계시지 않던 차에,”
“송구하오나 두 분 말씀 중에 결례인 건 알고 있습니다. 헌데 지금 마마께서 정말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던 터라…….”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던 차란이 결국 참지 못하고 아주 조심스럽게, 대단히 송구한 태도로 이설의 말을 끊으며 끼어들어 왔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모양이 꽤나 중요한 얘기를 하던 중이기는 한 모양이다.
차란이 잠깐 말을 흘리는 사이 웅성대던 대신 중 한 사람이 주변 성화에 못 이겨 자진해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폐하. 말씀 중에 송구하오나 조금 전 루 소의 마마께서 하신 말씀이 사실이옵니까?”
몸을 돌려 세운 우찬이 젊은 대신의 말을 곱씹으며 자리에 앉았다. 맘 같아선 허벅다리에 이설을 당겨 앉히고 싶었지만, 제 위신은 그렇다 치고 저잣거리 기방의 창부처럼 보일 이설의 체면이 걱정스러워 참았다.
소의가 했던 말이라니. 그냥 이곳에 서서 참관만 했던 게 아니라는 말인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이설을 올려다보자 다소 난해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이설이 시선을 피했다.
“그 말은 소의가 자네들에게 거짓이라도 말한 것 같다 의심스럽다는 건가?”
“아니, 그런 뜻이 아니오라. 소신들 모두 도통 믿어지지 않아 재차 여쭈어보는 것뿐입니다. 부디 오해하지 말아 주시옵소서.”
“자네들이 도통 믿을 수 없다는 게 어느 부분인가?”
우찬이 여유작작한 미소를 띠며 다리를 꼬았다. 흘끗 이설과 눈을 마주했더니 마른 입술을 혀로 훑으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 선 차란은 영 모를 표정이다.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경험으로 보자면 기분은 좋되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표정이라고 볼 수 있다.
없는 새에 두 사람이 무슨 일이라도 벌인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지만 차란이라면 모를까 이설이 그럴 리가 없다.
하기야 최근에 이 사달을 낸 장본인이기도 하니 절대 아니라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다른 것이 아니라 허, 거 참.”
잠자코 듣고 있던 태사령이 다시 생각해도 믿기 어렵다는 듯 입을 뗐다가 허탈한 웃음으로 닫았다. 그리고는 우찬과 눈이 마주치자 큼큼, 헛기침을 내뱉은 뒤 조심스레 말을 전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마마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마마께서 직접 연국의 금광을 이번 일의 보상 명목으로 도국에 넘기시겠다고 하니 쉬이 믿을 수가 없어 소신들이 결례를 보였습니다.”
“……금광?”
“그것도 연국 동북 매암산 너머의 금광을, 소신들이 어디 상상이나 해 보았겠습니까? 매암산의 금광은 그 크기가 주안 땅의 곱절은 된다 들었습니다. 그런 노다지 땅을 마마께서 저희 금국을 위해 자진해서 도국으로 넘기시겠다는 게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