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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87)화 (287/300)

달의 황홀경

287화

간밤에 어느 틈에 잠들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설과 새끼손가락을 걸어 약조를 하는 망측한 짓을 한 뒤 도란도란 담소를 좀 더 나누다가 이설이 먼저 잠이 들었다. 태자가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며 잠든 이설을 잠깐 동안 바라보다 우찬도 곧 잠이 들었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아침 햇살이 쨍하게 내리쬐는 아침이었다. 이른 아침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시간이라는 건 쏟아지는 햇살의 밝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시간까지도 이설은 아직 꿈나라였고, 우찬도 이설을 깨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자리에서 조심스레 내려왔다. 어이없게도 제 머리카락을 꽉 쥐고 잠든 이설의 손을 펼치느라 얼마나 신경을 쏟았는지. 침상에서 내려오고 나니 어깨가 다 결릴 정도였다.

점심은 같이 먹자는 말과 함께 조반과 탕약을 절대 거르면 안 된다는 엄포를 강하게 내포한 글을 짧게 남겨 둔 뒤 침소를 나갔다. 반나체로 나온 우찬을 보고 몇몇 궁녀들이 얼굴이 새빨개져서 황급히 옆방으로 모셨다. 거기서 환복하자 어제 몰골 그대로의 차란이 들어왔다.

“간밤에 평안하셨습니까?”

“그런대로.”

“간만에 안색이 좋아 보이십니다. 오늘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도 일어나지 않으셨다고요?”

“그래서, 불만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마음이 놓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을 해도 좋게 받아 주지 않는 우찬이 야속한지 차란이 불만 어린 표정을 내심 참으며 대답했다. 우찬은 비웃음으로 대꾸한 뒤 뒤를 돌아 머리를 손질했다. 어떻게 해 드릴지 묻는 궁녀에게 거슬리지 않게 하라 명했다.

잠시 후 높게 묶은 머리 위에 화려한 비녀를 꽂은 우찬이 태금궁을 나섰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땅을 밟으며 목적지도 말해 주지 않고 걷기 시작하는 우찬을 따르던 윤 내관이 결국 먼저 목적지를 물었다.

“폐하 대전에 대신들이 폐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지금 폐하께서는 어딜 가시는 길이옵니까? 이 길은 대전과 반대 방향입니다.”

“대전 회의는 비 승상에게 일임하였으니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나는 무암궁으로 간다.”

“예, 알겠습니다.”

의외의 대답에 놀란 기색 없이 윤 내관은 대답을 겸허히 받아들인 뒤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반대 방향으로 멀어지는 차란의 뒷모습을 보며 내키지 않는 듯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이내 우찬의 뒤를 쫓아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한때 잠깐이나마 생기가 흘렀던 무암궁은 귀비가 거처로 삼기 전보다도 훨씬 음침하고 스산한 모습으로 변했다. 담장을 지키고 서 있는 금군의 흉악한 분위기 때문에 그 앞을 지나는 궁인들도 없었다.

거침없이 궁의 대문을 열고 들어간 우찬은 신도 벗지 않고 성큼성큼 귀비의 침소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기별도 없이 벌컥 열리는 문소리를 듣고도 귀비는 놀라지 않았다. 이미 저기 먼 곳에서부터 우찬의 발소리를 듣고 마음의 준비를 내심 한 모양이었다.

“이쯤 오실 줄 알았습니다.”

“네가 무슨 수로?”

“태자의 외조부인지 태부인지 하는 작자가 슬슬 궁에 돌아왔을 때가 됐다 생각했으니까요.”

“아는 사이이더냐?”

“부락에 있을 때 두어 번 본 적은 있습니다만, 같은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워낙 몸을 사리는 양반이시라.”

“아마 아닐 거다. 대신할 사람을 보낸 걸 테지.”

“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한 며칠 못 봤다고 그새 마음이 진정이라도 된 건지 귀비는 한껏 여유로운 태도로 우찬을 맞이했다. 여전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꼴을 하고선 침상 위에 앉아 있는 게 숨만 겨우 붙은 산송장 같기도 했다.

“끝까지 모른 척 잡아뗄 줄 알았는데.”

“그런다고 누가 제 우직한 충직을 알아주기나 한답니까? 어차피 폐하께서도 저를 팔아 태부 그 작자를 궁지로 몰아넣으실 생각 아니셨습니까?”

“이미 그리했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머리를 똑똑하게 굴릴 줄 아는 귀비였다. 보이지 않는 수를 내다볼 줄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차피 지금쯤 일을 그르쳤다며 제 부족 모두가 저를 욕하고 저주하고 있을 겁니다.”

“이 일과 관련된 이민족들은 대부분 참수되었다. 널 저주할 사람은 얼마 남아 있지 않겠군.”

담담히 대답하는 우찬의 말을 듣고 돌연 귀비가 날카로운 쇳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침상 양옆에 서 있던 금군 두 사람이 기분 나쁜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우찬이 눈짓하자 두 사람이 곧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때까지도 귀비는 깔깔거리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참수라니. 지은 죄에 비해 저승길은 편히 보내 주셨군요. 듣던 대로 퍽 인자하신 황제 폐하이십니다.”

“상종할 가치도 없는 버러지들에게 참수만큼 효율적인 형은 없으니까. 피차 귀찮을 필요 없지.”

대놓고 비꼬는 귀비의 도발에 흔들리지 않고 우찬이 무심히 대답했다. 귀비는 과장스럽게 웃고 있던 미소를 싹 지워 낸 뒤 매서운 눈빛으로 우찬을 잠깐 노려보았지만,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와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 같은 버러지에게도 참수가 잘 어울렸으면 싶은데.”

맥없이 풀리는 귀비의 목소리는 오직 절망만이 가득했다. 우찬은 귀비가 이 정도까지 나락으로 떨어져 비참한 기분을 맛봤다는 점에서 아주 약간 기분이 풀렸다. 적어도 이설이 귀비의 등장으로 느꼈던 최저의 기분으로 떨어졌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됐다.

“살려 달라고 애원해볼 수도 있을 텐데?”

“…….”

“눈물로 읍소라도 해 봐.”

“헛소리 집어치워!”

눈 깜짝할 새에 날아든 베개를 가뿐히 피하며 우찬은 휘날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손 하나 까딱 못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잽싸게 행동할 줄 아는 귀비에게 비웃음 가득한 찬사를 보내며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혹시 알아? 네가 살 수 있을지. 나는 오늘 기분이 꽤 좋거든.”

“왜? 간밤에 그 사내새끼랑 더러운 비역질이라도 하고 오는 길이야?”

남은 건 추악한 독기밖에 없는 눈으로 귀비가 날카롭게 물은 뒤 깔깔 웃었다. 억지웃음이 역력한 소리가 부자연스럽다 못해 괴기스럽게 들리기까지 하여 밖에 서 있던 금군이 문을 빼꼼 열어 안을 확인했을 정도였다.

“비역질?”

우찬은 그다지 대수롭지도 않은 듯 되물으며 생각해 보았다. 간밤에 비역질을 했으면 귀비를 찾아오는 짓 따위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분 좋게 일어난 아침에 귀비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리가 없다. 귀비에게는 사실 우찬이 ‘그’ 사내새끼와 비역질이라도 하고 오는 게 훨씬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편이 네겐 더 좋았을 것 같은데.”

“더럽고 비열한 놈들! 너희들은 짐승의 자손들이야! 내 조상들을 죽이고 우리 땅을 훔치고 피로 물든 땅에 나라를 세운 이 파렴치한 짐승들의 자손!”

“주인 없는 땅에는 먼저 깃발 꽂은 사람이 임자지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먼저 살고 있던 건 우리 부족이었어!”

“계절마다 거처를 옮기는 네놈들의 말대로라면 이 대륙에 너희 야만족의 땅이 아닌 곳이 있긴 한 것이냐?”

“야만족이라는 말 입에 담지도 마!”

베개를 쥐어뜯으며 씩씩거리는 귀비를 보는 게 생각만큼 썩 재밌지가 않은 참이라 얼른 끝내고 대전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란을 보내 놓았고 소운도 미리 자리에 참석하고 있겠지만 뭐든 직접 처리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죽고 싶어 발악하는 거라면 그만 입 좀 다물어. 소원대로 해 주러 온 참이니까.”

지겨운 한숨을 짧게 내쉬며 의자 하나를 돌려 앉았다. 적당히 거리가 떨어진 곳에 앉은 우찬을 쉼 없이 노려보던 귀비는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있다가 제풀에 지쳤는지 머리를 뒤로 기울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한참 뒤 독기가 어느 정도 풀린 눈으로 조용히 물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역시 눈치가 빨라.”

“거짓 진술이라도 하면 되는 겁니까?”

“비슷해.”

귀비가 자포자기한 듯 허탈하게 웃으며 허공에 시선을 댔다.

“네가 궁에 무슨 이유로 들어왔는지 한 장. 네가 궁에 들어올 수 있게 도와준 사람들의 명단 한 장. 네놈들이 하려고 한 짓들에 대해 한 장.”

“그럼 거짓 진술보다는 자백에 더 가깝지 않습니까?”

“널 도와준 사람들의 명단은 내가 일러 주는 이름을 적으면 된다.”

그런 속셈이었냐는 눈빛으로 비웃는 눈이 우찬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어차피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처리할 몇 명을 조금 일찍 내보낸다고 향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라도 귀비가 도움이 된다면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귀비가 이내 포단을 옆으로 걷어치우고 침상에서 내려왔다. 근래에 걸어 본 적이 없던 건지 발을 내딛자마자 앞으로 고꾸라지고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우찬은 도와줄 생각은커녕 탁자에 턱을 괴고 다른 곳을 보고 있다가 종이를 가져 온 귀비가 앞에 앉고 나서야 시선을 맞췄다.

“아, 한 가지 더. 글자는 네놈들이 사용하는 암어로 적어라. 쓸 줄 알고 있겠지?”

“그리 쓰면,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합니까?”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

“……그 대단하신 소의 마마께서는 참 별난 재주도 갖고 계십니다, 그래.”

역시 눈치가 빠르다.

조용히 글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하는 귀비의 글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우찬은 지금쯤 이설이 깨지는 않았을까 생각했다. 일어나자마자 조반을 먹이라고 상궁에게 미리 일러두었는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지 모르겠다. 귀비 일이 끝나면 대전으로 가지 말고 이설이 조반 드는 걸 확인할 걸 그랬나.

할 일이 많은 게 짜증 났던 적은 없었는데 유독 이설을 생각하면 약간 조바심이 났다. 이번 일만 마무리되면 남은 일이랑 다 내팽개치고 어디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으로 이설과 함께 시찰이나 나갈까 싶다. 기간은 내년 초봄에서 늦가을까지가 좋겠다. 궁을 오래 비운다고 다들 난리가 나겠지만 그쪽 사정까지 봐줄 필요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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