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86화
“폐하, 신첩은 정말로……, 앗!”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흩어지다 갑자기 놀란 듯 탄성과 함께 온기로 가득하던 몸이 화들짝 떨어져 나갔다. 당황하여 동그랗게 뜬 눈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우찬을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신첩이 상처를 생각 못 하고…….”
우찬의 얼굴과 허리께의 상처를 번갈아 쳐다본 이설은 웃옷을 들쳐 상처를 확인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혼자 부산스럽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기분으로 보자면 확실히 괜찮지 않은 쪽이었다. 옷고름을 풀다 말고 냅다 안겨 들 때는 언제고 갑자기 혼자 기겁을 하며 놀라 사람을 밀어낸 뒤 안절부절못한다. 사람 간을 봐도 정도껏 해야지 이게 지금 무슨 짓이란 말인가.
그러고도 이설은 아직 죽상을 하고 우찬의 옆구리를 살폈다.
“아프셨습니까? 혹시 신첩 때문에 상처가 덧난 건 아닐까요?”
“덧났으면.”
이게 뭐라고 기분이 급격히 나빠진 우찬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유치한 티를 내는 스스로가 한심한 한편 우습기도 했다.
“태의를 부르겠습니다.”
“됐어 관둬.”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 앞으로 후다닥 달려 나가려는 이설을 붙잡아 도로 침상에 눕혔다. 튕겨 나오듯 상체를 일으켜 세워 울상을 하고 쳐다보는 얼굴이 귀여워 너털웃음이 났다.
이건 뭐 병 주고 약 주고 혼자서 다 하고 앉아 있군.
“태의를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됐으니까 이리 와서 다시 안겨 봐.”
우찬이 무릎걸음을 걸어 침상 쪽에 몸을 더 가까이 붙이며 말했다.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 이설이 답답했는지 이번에는 양팔을 뻗어 손짓했다.
“안겨 보래도?”
“가, 갑자기요?”
“아까는 갑자기가 아니었나? 와서 똑같이 안겨 봐. 하려던 말도 마저 하고.”
“별로 중요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사소한…….”
“이리 와서 해. 안 들려.”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자 이설이 수심 가득한 얼굴로 고민을 시작했다. 아까는 무슨 바람이 들어 와락 안겨 들었는지 이제 와 이성이라도 생긴 듯 영 부끄러운 눈치다. 수줍음 많은 이설도 좋지만 가끔은 대담하게 굴 줄 아는 것도 신선해 좋다. 문제는 그 대담한 객기가 오래 가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이리 오라고 손짓을 해도 요지부동. 혼자 뭘 그리 재고 걱정하고 고민하는 게 많은지 머리통을 열어 보든 심장을 꺼내 보든 해 보고 싶다.
“나를 여기 얼마나 더 무릎 꿇려 놓을 생각이야?”
퉁명스러운 말에 그제야 이설이 쭈뼛거리며 우찬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와서 안기라도 했지 누가 무릎을 꿇으랬다고, 싶은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참았다.
“아프시지 않을까요?”
“전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이설이 천천히 팔을 뻗으며 다가왔다. 목에 휘감기는 연약한 팔의 체온에 따뜻하다. 이설의 의지로 몸이 착 달라붙어 빈틈없이 안겨지기를 기대했지만 상처를 잘못 건드릴까 겁이 난 이설이 몸을 멀리 떨어뜨렸다. 결국 허리를 끌어안아 품으로 당긴 건 우찬이었다.
“기어이 내가 움직이게 만들지.”
“폐하, 상처가! 조금만 살살,”
“이 정도 안았다고 터지기야 하겠느냐? 걱정이 많은 거야 아니면 내게 안기는 게 싫은 거야.”
“걱정이 많은 것입니다.”
볼멘소리를 내긴 했지만 곧 죽어도 안기는 게 싫다 소리는 하지 않는 이설을 더 꽉 끌어안았다.
맘 같아선 이대로 입을 맞춘 뒤 눕혀 온몸 샅샅이 살펴 흔적을 남기고 싶었지만 이설의 몸 상태가 그걸 버틸 수가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살아 숨 쉬는 게 기이해 보일 정도로 이설은 한눈에 봐도 퍽 마른 데다가 힘 하나 없이 몸을 휘적거렸다.
체온이 오른 뜨끈한 몸이 품 안에서 바르작거릴 때마다 등허리에 긴장이 뚝뚝 끊어져 내렸다. 사람 속도 모르고 이설은 귓가에 옅은 숨 바람을 계속 불어 넣었다. 숨을 쉬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참.
“아까 하려던 말은 뭐였어?”
“별거 아닙니다.”
“그래도 해 봐.”
“그게 저, 폐하.”
“……응.”
노곤하게 녹아내리는 정신과는 별개로 아랫도리에 힘이 불끈 들어가지는 것을 참아 견디다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이설의 목소리가 한껏 침울하게 들리기에 또 괜한 걱정을 하는가 싶어 먼저 달래 주었다.
“아프지 않으니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그런 게 아니라.”
“응?”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너무 적나라하게 들렸다. 그게 얼마나 야한 소리인지 모르는 이설은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뱉기를 두 번 반복하고 한 번 더 마른침을 삼키고 나서야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쯤 입을……,”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아주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또 한참 뜸을 들이다 다시 마른침을 삼킨 뒤 말을 이었다.
“입을 맞춰 주시길 기다리고 있었사온데…….”
“큰소리로 또박또박 좀 말해 보거라.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어.”
거짓말이었다. 많이 얼버무리기는 했어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부 알아들었다. 여기서 마음껏 웃었다가는 창피함을 못 이긴 이설이 다 됐다고, 아무것도 아니라며 뒤꽁무니를 뺄까 봐 웃음을 참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일부러 웃음기는 없지만 달래듯 상냥한 말투로 어르자 용기라도 얻었는지 이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목에 두른 손이 꼼지락거리는 게 느껴져 웃음을 참는 게 정말 힘들었다.
“늘 이쯤이면 폐하께서 입을 맞춰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오늘은…….”
“오늘은?”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서 조금…….”
“오늘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물러나니 조금 아쉬웠다?”
“…….”
“대답을 해야 알지, 설아.”
어르는 어조에서 조금 엄격한 말투로 다그치는 우찬의 말을 듣고 이설이 조용히 네, 하고 대답했다. 한 음절에 단답에서 느껴지는 부끄러움과 창피함 그리고 아주 소량의 수치까지 한데 뒤섞인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우찬은 그대로 웃음을 터뜨려 버리고 싶은 걸 참느라 일부러 이설을 세게 끌어안아 상처를 자극했다. 기분 탓인지 아까보다 이설의 체온이 더 오른 것 같았다.
“그리 아쉬웠으면 네가 했어도 됐을 텐데?”
“그건 좀…….”
“그래 잘했다. 네가 먼저 입을 맞췄더라면 그걸로 끝나지는 않았을 거야.”
이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이설이 네, 하고 되묻기 전에 어깨를 밀어 몸을 떼어 냈다. 아니나 다를까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직면했다. 부끄러워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얼굴을 붙잡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
마른 입술에 진득하니 침을 발라 핥고 빨다가 벌어진 틈으로 혀를 밀어 넣자 이설이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부끄러워 눈도 마주치지 못한 것 치고는 꽤나 열렬한 환영이었다.
긴 입맞춤의 버릇처럼 이설의 허리께를 지분거리던 손이 웃옷 안으로 자연스레 들어갔다. 흠칫 놀라는 이설을 느끼고 나서야 상황을 인지하고 입을 뗐다.
“이 정도면 오늘 밤은 아쉽지 않겠지?”
차마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는 이마에 살짝 입술을 댄 뒤 자리에서 일어나 웃옷을 벗었다. 아랫도리에 툭 불거져 나온 형체를 본 이설이 큼큼 헛기침을 하며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기에 장난이라도 좀 쳐 볼까 하다 자제력을 잃을 것 같아 관뒀다.
“밤이 늦었으니 이만 자야겠다.”
“피곤하십니까?”
“조금. 너도 꽤 졸린 얼굴인데?”
“폐하를 기다리는 동안은 졸리지 않았는데 이제야 잠이 오는 것 같아요.”
우찬이 상의를 입지 않은 채로 자리에 눕자 머뭇거리던 이설은 뒤늦게 품에 덥석 안겼다. 맨살에 제 얼굴이 닿는 것을 최대한 막아 보려 애쓰는 게 느껴져서 우찬은 자비 없이 이설을 맨 가슴에 폭삭 안았다.
“잘 자고, 잘 먹고 얼른 건강해지거라.”
“폐하를 위해서라도 꼭 그러겠습니다.”
“널 위해 그러라는 말이다.”
핀잔을 주며 귓불을 손끝으로 꾹 누르자 이설이 장난스레 웃었다. 우찬이 따라 웃은 뒤 머리를 연신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야 널 비은궁으로 돌려보낼 수 있지.”
“비은궁이요?”
생각지도 않은 말을 들은 건지 놀란 이설이 몸을 멀리 떼어 내며 되물었다. 비은궁 같은 건 진작에 까맣게 잊어버렸기라도 한 것처럼 새삼 놀라는 눈치에 도리어 우찬이 당황했다.
“비은궁으로 돌려보내실 생각이십니까?”
“네가 건강해지면 그럴 생각이었다. 근데 네 반응이 이럴 줄은 몰랐는데. 왜? 계속 여기서 나와 함께 살 참이었더냐?”
“아니 그게 저는, 아니, 신첩은…….”
“신첩이라는 소리도 이제 입에 붙은 모양인데. 너만 좋다면 나야 거절할 이유가 없지.”
고민하기 시작하는 이설의 속마음은 사실 잘 알고 있다. 예상치 못한 얘기를 급작스럽게 들은 탓에 당황한 것이지, 이곳에 내내 남아 있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정 많은 이설이 제 궁인들을 나 몰라라 내팽개칠 리도 없고 손수 하나하나 가꾼 궁을 버릴 수도 없을 것이다.
별로 어려운 고민도 아닌데 끙끙 앓는 소리까지 내며 생각을 하는 이설이 끝내 답을 내린 뒤 물었다.
“비은궁으로 돌아간 뒤에도 신첩이 여기 올 수 있을까요?”
“안 될 이유가 없지.”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앞으로 잘 자고, 잘 먹고, 태의가 말한 대로 하루 일다경씩 산책도 하고. 시일 내로 건강을 되찾을 테니 폐하께서도 약조 하나만 해 주십시오.”
돌연 당당하게 약조를 하자 요구하는 이설 때문에 또 웃음보가 터지려는 걸 참고 무슨 약조를 할 것이냐 물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묻는 우찬과 달리 이설은 사뭇 진지하게 손가락까지 내걸었다.
“상처가 나을 때까지 절대 무리하지 않으시기로 말입니다.”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군.”
“꼭 지켜 주셔야 합니다.”
새끼손가락을 들이미는 건 여기에 제 손가락을 걸라는 뜻이겠지?
우찬이 어색하게 새끼손가락을 걸자 이설은 억지로 엄지손가락을 서로 맞부딪혔다. 어린아이들이 이런 식으로 약조를 공고히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해 본 적은 없었던 터라 뭔가 싶긴 했지만 내심 뿌듯한 얼굴로 웃는 이설을 보니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