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85화
“널 찢어 죽여도 시원치가 않아.”
“선대 황후의 아비이며 하나뿐인 태자 전하의 외조부인 제게는 면책권이, 읏!”
쉴 새 없이 헛소리를 뱉어 내는 모가지를 움켜쥐었다. 컥하고 숨 넘어갈 듯한 소리를 낸 손조익의 얼굴색이 금세 검붉게 변했다.
“그런 건 애초에 있지도 않았어. 설령 있다 한들 반역죄를 저지른 네놈에게도 적용될 것 같으냐?”
“소, 소인은 반역, 을 크흣……, 아니라,”
“가만히 있어도 황제가 될 태자의 즉위를 단지 빨리 앞당기려고 했던 것이라고 말하고 싶겠지. 그래, 다 좋다. 다 좋아, 헌데.”
“폐하아, 용서……, 컥!”
“연이설까지 끌어들이는 건 너무 비겁했어. 난 그게 제일 용서가 안 돼.”
맥없이 풀린 손아귀 힘이 목을 놓아주자 손조익이 온몸을 들썩이며 기침을 했다. 짐승의 멱을 따는 소리처럼 불편한 소리가 길게 이어진 가운데 우찬이 다리를 펴고 일어났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이 고함 소리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금군 수십 명이 일사불란하게 들어와 손조익 주위에 섰다. 선봉에 서 있던 금위대장이 한 발로 바닥을 탁 치며 묵례하자 나머지 병사들이 뒤따라 묵례했다.
“금일 현 시각 이후로 태자의 외조부라는 중차대한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적과 내통해 반역과 매국을 도모한 태부 손조익을 극형에 처한다. 지금 당장 태원 손 씨 가문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직계 존속의 관직 임명을 제한한다. 죄인 손조익의 처분은 추후 내려질 것이니 그때까지 옥에 가두어라. 끌고 가.”
“예!”
금위대장의 우렁찬 대답과 함께 금군 두 명이 손조익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넣었다.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목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손조익이 어렴풋 이설을 향한 저주의 말을 내뱉은 것 같기도 했지만, 옆에 선 병사가 목뒤를 후려쳐 잠재운 뒤였다. 어차피 손조익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극악한 형벌로 다스릴 생각이다. 지금 두어 대 더 손을 봐준다고 마음이 후련할 것 같지도 않다.
“본궁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직 남아 있던 금위대장이 다가와 물었다. 손조익이 발버둥을 치며 손톱으로 긁어 놓은 마룻바닥을 보고 있던 우찬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친김에 귀비도 쫓아낼까. 그 사특한 것이 궁에 있는 한 이설은 아닌 척하면서도 내내 마음 한편이 불편할 게 분명했다. 물어보면 아니라고 대답하겠지만.
“그래야겠군.”
하지만 그랬던 생각도 잠깐. 먼저 잠이 든 이설을 혼자 너무 오래 둔 게 마음에 걸렸다. 오랜만에 푹 잠이 들어 깨진 않겠지만 가급적 옆에 있어 주고 싶었다. 잠든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꽤 오랜만이기도 했고 말이다.
호위하겠다는 금위대장을 무시하고 혼자 휘적휘적 걸어 나가자 복도 끝에 차란이 싱숭생숭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토록 재수 없게 여기던 손조익이 금군 손에 끌려 나가는 걸 보고도 속이 후련해 보이지 않는 마음은 이해가 됐다. 손조익을 따르는 수많은 대신들이 이 꼴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에 합당한 대비를 하는 것 역시 차란의 몫이었다.
“수고했다.”
드물게 칭찬을 하며 지나치는 자신을 보고 깜짝 놀란 차란이 뒷걸음질을 치다 벽에 등을 부딪쳤다. 머저리 같다는 생각을 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별궁에서 본궁의 침소까지 이리 멀었었나? 물웅덩이가 생긴 자리도 돌아가지 않고 그 위를 밟고 지나느라 가죽신이 폭삭 젖었다. 신을 벗고 급하게 안으로 들어서는 우찬의 발을 보고 상궁이 갈아 신을 덧신을 준비하겠다고 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바삐 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 다다르자 우찬을 발견하고 궁인들이 소리를 내려다가 인상 쓴 얼굴을 확인하고 입을 합 닫았다.
“조용히 열거라.”
평소처럼 벌컥 문을 열려던 궁인들이 괜한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차례로 열리는 사이 문을 지나는 동안 처음으로 발소리를 죽여 보았다. 조심히 걸음을 떼며 침소 안으로 깊이 들어가자 포단 위가 봉긋하게 솟아 올라온 게 보였다. 아직 자는구나 싶어 피식 웃으며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갑자기 몸이 옆으로 휙 돌아섰다.
“어딜 다녀오십니까?”
놀라 까무러친다는 표현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우찬 나름대로는 제법 깜짝 놀란 참이었다. 등불에 비친 하얀 얼굴이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삐죽였다.
“중간에 깼는데 옆에 계시지 않아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언제 일어났느냐?”
“한참 됐습니다. 일러 주지 않았다면 당장에라도 밖에 나가 봤을 거예요.”
이설이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키며 잠이 덜 깬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포단 자락을 손에 꽉 쥐고 입술이 댓 발 나온 모양새가 영락없는 어린애 같았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괜찮고 말고.”
“태의 말을 그렇게 허투루 들으셔야 되시겠습니까? 걱정입니다 정말.”
“잘 돌볼 테니 걱정 말거라.”
“……신첩이 그런 의미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는 거 알고 계시죠?”
“그런 의미라니?”
눈을 가늘게 떴다 다시 억울한 표정으로 울상이 되는 이설을 내려다보다 돌연 웃음이 터졌다. 시시각각 변하는 얼굴이 잠에 취해 뚱하게 부어 있다는 걸 그때서야 알아챘다. 고작해야 붓기이겠지만 볼살이 통통하게 오른 느낌이 꽤나 사랑스러웠지만 부은 눈은 안쓰러워 절로 혀가 차졌다.
“알고 있으니 표정 풀거라. 눈은 또 왜 이리 부었어. 울었느냐?”
“…….”
“울었어?”
그냥 한번 해 본 말이었는데 눈동자만 좌우로 굴리고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는 고개를 옆으로 휙 돌려 시선을 피한 뒤 다시 입술을 삐죽인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너를 두고 어디 도망이라도 갔을까 봐?”
“예.”
거침없이 솔직해진 이설이 기특하거나 놀라운 것도 잠깐. 얼마나 불안하고 걱정이 됐으면 머뭇거리지도 않고 대답을 할까 싶었다. 그리고 도망이라니. 이설을 쫓아냈으면 쫓아냈지 제 침소를 여기 두고 도망을 칠 거라는 생각을 하다니 자다 일어난 뒤라 정신이 몽롱하기라도 한 것 같아 낯설게도 귀여웠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을 해 보니 여긴 폐하의 침소가 아닙니까? 페하께서 저를 여기 두고 도망가실 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잠에 완전히 취한 것은 아닌 것 같고.
“그래 퍽도 똑똑하구나.”
“아, 신첩이 계속 결례를……!”
손을 뻗어 이설의 볼을 쓰다듬는 순간 깜짝 놀란 이설이 후다닥 자리에서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우찬을 옆에 두고 내내 누워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모양인지 금세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허둥지둥하다 바닥에 발을 내리려는 것을 우찬이 말렸다.
“누워 있어. 나도 곧 옆에 누울 테니까.”
눈두덩이가 무겁게 내려앉은 이설은 아직 잠이 쏟아지는 게 분명했다. 눕혀 재워 줄 생각에 조급해진 우찬이 급히 옷가지를 벗어 바닥에 흐트러트렸다. 이설은 침상 끝에 앉아 멍하니 그 모습을 보다 볼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그러다 젖은 덧신을 막 벗던 우찬이 의아한 듯 눈썹을 위아래로 치켜뜨자 휙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갑자기 왜 피하지?”
“폐, 폐하께서 갑자기 환복을 하시니…….”
“옷을 다 벗은 것도 아닌데?”
“…….”
“다른 생각이라도 한 것 아니냐?”
“아닙니다!”
때아니게 우렁찬 목소리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뻔히 장난을 쳤던 우찬도 놀라 헛웃음을 치다 한 겹 남은 웃옷을 그대로 걸친 채로 이설이 앉은 앞에 무릎을 대고 섰다.
우찬이 무릎을 바닥에 대자 대번에 질겁을 한 이설은 자기가 바닥에 내려앉으려고 했지만 우찬이 힘으로 말려 그 자리에 앉게 했다. 두 사람의 눈높이가 언뜻 엇비슷해졌다.
“이건 네가 풀어 보거라.”
“…….”
“오늘 밤은 아무 짓도 안 한다고 약조할 테니 풀어 봐.”
“정말 약조하시는 겁니까?”
“그렇대도. 오늘은 나도 피곤해 이만 자야겠다.”
사실 반은 거짓이고 반은 사실이다. 피곤한다는 것은 거짓,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는 약조는 사실.
옆구리의 상처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이설을 않으라면 안을 수 있겠지만 이설의 상태가 우찬을 받아들이기에 현저히 뒤떨어졌다. 제대로 먹지도 못해 몸도 비실비실한 데다가 자다 일어나 정신까지 몽롱해진 이설을 욕정대로 안았다가는 사달이 나도 아주 크게 날 것 같았다.
우찬이 끄덕이는 것을 굳게 믿은 이설이 천천히 웃옷 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일부러 안달이라도 나게 하기 위해 굼뜨게 행동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싫지 않아 지적하지 않았다.
“나한테 안기는 게 그렇게 싫더냐?”
흠칫.
별생각 없이 물어본 것인데 이설이 눈이 띄게 동요하며 손을 멈칫했다. 정곡을 찔렀나 싶어 쯧, 하고 혀를 차자 안색이 어두워진 이설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신첩은 오로지 페하의 존체만을 걱정할 뿐이라고요. 상처가 다 낫지 않은 상태에서 정사는 곤란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
그렇군, 하고 쉽게 받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우찬과는 달리 이설은 고름을 다 풀 때까지 어두운 안색을 걷지 못하고 내내 실망한 표정이었다.
옷을 벗기는 것까지 맡기기는 번거로울 것 같아 고름이 다 풀릴 무렵, 우찬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이설이 갑자기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퉁퉁 부운 눈을 하고서 쳐다다보는 표정이 더없이 애처롭고 가여워 보였다.
“폐하.”
“응, 왜 그러느냐?”
“신첩의 말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무슨 말을?”
“……신첩은 정말로 페하께 안기는 게 싫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 방금 그리 들었다.”
“…….”
“네가 억지로 내게 안기는 게 아니라는 것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러니 걱정 마.”
위로하듯 볼을 살살 쓰다듬으며 우찬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소심하기는. 괜히 자신이 오해할까 싶어 일부러 용기내서 하는 말이 기특했다. 얼른 누워 품에 안아 재우고 싶어 다시 급하게 옷을 벗으려는 순간 몸이 휘청거릴 만큼 이설이 와락 안겨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