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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83)화 (283/300)

달의 황홀경

283화

우찬은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몸을 더 비스듬히 기울였다. 별궁으로 간다는 소식에 사색이 되어 버선발로 뛰어온 태의는 발을 동동 구르다 환약 하나를 급하게 지어 올렸다. 큰 도움은 안 되지만 통증이 무뎌진 듯한 기분이 들기는 했다.

“아직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은 것이지.”

“황공하옵니다. 부디 좋은 소식이기를 바라겠습니다.”

“물론이지. 누구에겐들 좋은 소식인 것만은 틀림없으니까.”

우찬이 억지웃음이 아닌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며 손조익과 눈을 마주쳤다. 평소와 비교하자면 다분히 호의적인 환대에 놀란 건지 손조익은 경계를 뚜렷이 세우며 내키지 않는 말투로 그렇습니까, 하고 응수했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소인이 무척 궁금해집니다.”

“복잡한 얘기는 아니야. 짐의 정인이 드디어 짐의 이름을 갖게 됐거든.”

말한 대로 복잡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설이 우찬의 이름을 가졌다는 것, 그게 제일 중요했다. 하필 이 중차대한 소식을 손조익에게 먼저 알릴 필요는 없었지만 누가 먼저 알아도 딱히 상관은 없는 일이었다.

젊었을 때와 달리 총명함이 반으로 죽은 탁한 눈동자는 크게 놀라지 않았지만 의아한 눈빛을 했다. 끝까지 모른 척 잡아뗄 셈인 듯하다.

“폐하의 정인이시라면 무암궁의 귀비 마마가 아니십니까? 그분께서는 진작 폐하의 이름을 가지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 그거.”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이름도 없는 물건인 것처럼 그거, 하고 대수롭지 않게 귀비를 칭한 우찬은 귀비 생각만으로도 괜히 짜증이 나 한쪽 눈을 찡그렸다. 어서 쫓아내야 그나마 이설의 마음 한 짐이나마 덜 수 있을 텐데. 해야 할 일의 맨 나중으로 미뤄 놓았던 일의 순서를 바꿀 필요가 있다.

“그건 가짜야. 간특한 계집이 어디서 내 이름을 훔쳐다 내 정인 행세를 한 것이었다.”

“…….”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와도 정도껏 튀어나왔어야지. 어디서 그런 맹랑한 짓을 꾸밀 생각을 했을까. 어지간한 뒷배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오랜 세월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웬만한 도발에도 끄떡 않던 능구렁이가 드디어 사지에 몰리자 몸을 꿈틀대기 시작했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입가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그동안 축적한 탐욕만큼이나 역겨워 더는 쳐다보고 싶지가 않았다.

짐짓 심각한 고민을 하는 척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던 손조익이 곧 표정을 가다듬어 대답했다.

“글쎄요. 외람된 말씀이오나 폐하의 정명은 궁 밖에서 암암리에 큰돈을 주고 팔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대놓고 사용하거나 천지명관에 입적을 시키지는 못하지만 부모가 그 이름으로 아이를 불러 주면 폐하의 운을 따른다고 믿는 무지렁이들이 있어 말입니다. 그러니 폐하의 이름을 알게 된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차후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궁인들의 입단속을 단단히 시키라, 윤 내관에게 일러놓겠습니다.”

“자네가 뭐라고 윤 내관에게 일러주고 말고를 한단 말인가? 윤 내관은 엄연히 짐의 사람인데.”

무슨 변명을 그리 길게 하나 귀담아들었으나 쓸데없는 소리를 장황하게 늘어놓을 뿐이었다. 말미에 던지는 말은 불쾌하기까지 해 조소가 얼핏 나왔다가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섰다.

손조익은 아직도 궁 내 모든 사람들이 제 손바닥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믿었다. 변변찮은 관직 하나 없는 주제에 태자의 외조부라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선대 황후와 황제가 남긴 유지를 믿고서.

“그리고 차후 같은 일이 일어날 리가 없지. 짐이 방금 말했잖는가. 짐의 정인이 짐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우찬은 불현듯 떠오른 이설의 발목을 머릿속에 다시 그리며 옅게 웃음을 흘렸다. 아무도 보지 못하게 꽁꽁 싸매고 다닌 그 아래에 제 이름을 새겨 다니는 연인이라니, 무척 비밀스럽고 배로 사랑스럽다.

생각해 보면 이설이 가진 이름이 제 정명이 아닌 아명이라는 점이 더 마음에 들었다. 살며 누군가 ‘우찬’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 줬던 일은 정말이지 손에 꼽는 단 몇 번이었다. ‘금우찬’이라는 이름을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이유는 단순히 이 이름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아명에는 나름의 애착이 있다. 성년이 된 이후야 들을 일이 없었다지만 어렸을 적에는, 특히 생모가 살아있을 때는 제법 익숙하게 듣고 자랐다. 생모는 본인이 직접 지은 이름이 우찬과 잘 어울린다며 곧잘 소리 내어 불러 주곤 했다.

“그럼 폐하의 정인이시라는 분은 혹시,”

“연이설. 처음 내가 데려왔던 그 연이설이다.”

“……그렇습니까?”

꺼림칙하던 의심과 불안함은 대부분 다 해소시킨 모양인지 한결 걱정이 날아간 얼굴로 손조익이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안쪽으로 말려 거의 보이지 않는 윗입술 때문에 사람이 한껏 영악하고 비열해 보였다. 별로 놀라는 눈치는 아니다. 원래 알고 있었을 리는 없겠지만 일이 틀어진 후 나름대로 예상은 했었을 것이다.

“상황이 조금 복잡하게 되긴 했지만 마침내 두 분께서 이름을 나눠 가지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이설이 온전히 우찬의 이름을 가졌다는 소식을 이제 와서 손조익이 반기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다른 황후는 절대 들이지 못할 거라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차라리 뒷방 늙은이 행세를 좀 더 하며 인내하고 기다렸으면 결국 원하는 대로 됐을 것을. 성급한 성미가 일을 그르쳤으나 그것도 다 제 업보다.

“어때? 그대에게 기분 좋은 소식이 되었나?”

“이게 어찌 소인에게만 좋은 소식이겠습니까? 이 사실을 궁인들과 백성들이 알게 되면 다들 무척 기뻐할 게 틀림없습니다. 금의 황제와 연의 왕자가 서로 인연을 맺었다니 이 얼마나……,”

입에 바른 소리를 하며 말을 늘리는 손조익을 빤히 쳐다보며 우찬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드디어 오늘에서야 저 눈엣가시 같은 인간을 쫓아내고 마음의 짐을 훌훌 털어 버리게 되었는데 기쁜 마음도 없다. 얼른 다 치워 버리고 다시 침소로 돌아가 이설을 끌어안고 한숨 깊이 푹 자고 싶다.

“불필요한 축하는 이만 됐어. 중요한 얘기는 지금부터니까.”

“…….”

“알다시피 내 정인은 연국 국경에서부터 이민족의 습격을 받았어. 죽을 뻔한 고비를 숱하게 넘겼고 도국으로 도망친 뒤에도 쫓기는 신세를 면하기가 어려웠지. 지금 내 침소에서 잠이 든 내 정인은 정말이지 어렵게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다.”

“예, 소인도 멀리 있었지만 익히 소식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온데 이 이야기를 갑자기 왜,”

“누굴까?”

팔꿈치를 대고 있던 팔을 풀고 느릿하게 허리를 꼿꼿이 세운 우찬이 내리깐 시선으로 손조익을 내려다보았다. 대전에 단상만큼 높은 곳은 아니지만 시선의 높낮이 차이는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손조익은 아래턱에 위치해 서 있었다.

갑자기 목소리가 확 낮아지자 미소가 잔잔하던 얼굴이 싸하게 가라앉았다. 본색을 드러내는 분위기를 감지한 손조익도 달라진 눈빛으로 시선을 마주하니 얘기가 별로 길어지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누가 내 정인을 죽이려고 철천지원수나 다름없는 야만인들과 손을 잡고 그들을 수족처럼 부렸는지, 그대는 알고 있느냐?”

묘하게 일그러지는 이목구비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표식인 듯하다. 궁지에 몰리니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어려워졌나 하는 생각이 든 동시에 깨달았다. 여태껏 손조익을 이만큼이나 하대하여 독대했던 적이 없었다는 것을.

우찬은 언제나 그를 태자의 외조부로서 어엿한 웃어른에 가깝게 대우해 주었다. 하대를 하더라도 적절한 선에서 예의를 지켜왔으나 오늘에 와서는 달리 그럴 이유가 없었을 뿐이다.

“송구하오나 소인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이 뒷방 늙은이는 나라 안팎의 굵직굵직한 사정을 아는 것도 힘에 부칠 따름입니다.”

“침소에 정인을 혼자 재워 두고 나왔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통 모르겠습니다만.”

“바삐 돌아갈 곳이 있다는 말이다. 길게 얘기를 끌어 봤자 내 정인의 독수공방만 길어질 테지.”

“…….”

“손조익. 역모의 주동이 되어 사병을 모아 짐을 해하려 한 죄. 또한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타국의 왕가와 손을 잡고 매국 행위에 가담함으로써 나라와 백성들을 배신하고 기만한 죄. 이를 근거로 삼아 추포를 명한다.”

이밖에도 찾아보자면 함께 묶어 벌할 것들이 있겠지만 당장 하나하나 읊어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자질구레한 것들은 손조익이 잡아떼면 그만이고, 이미 이 죄목만으로도 더 이상 높아질 형량이 없었다. 어차피 손조익은 죽을 운명이었으며 아마 죽는 순간 명예를 챙기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런대로 예상은 하고 있었는지 크게 놀라는 기색 없이 손조익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선 자세 그대로였다. 우찬에게 할 말이 더 남아 있는지 기다렸다가 한참 지나도 우찬이 아무 말 없자 느릿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대답했다.

“소인이 역모와 매국에 가담했다는 증좌가 있습니까?”

“증좌라……. 글쎄, 네 하수인들 중 과연 몇 명이나 고문 끝에도 충의를 지킬 수 있는지 한번 확인해 볼까?”

“증좌도 없이 거짓 자백으로 소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먼저 안부 인사 겸 궁을 들른다고 했을 때 알아차리기야 했다. 켕기는 게 없으니 겁나는 게 없는 것이다. 대놓고 뻔뻔하게 구는 작태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잠든 이설을 혼자 내버려 두고 온 지 이제 일다경 정도가 겨우 지났지만 체감상 하루 반나절이 꼬박 흐른 것 같다. 잠깐 눈 떴을 때 혹시 오해라도 할까 싶어 흑영에게 단단히 일러두고 나왔는데 워낙 말주변이 없는 충복이라 무슨 말을 어떻게 전할지 사실 마음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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