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82화
“다만 지금 시국이 좋지 않은지라 합당한 처벌을 내리시더라도 맡은 바 소임을 끝낸 뒤 처벌받을 수 있도록 부디 선처하여 주시옵소서.”
우찬이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자 차란이 부복하며 선수 쳐 말했다. 갑자기 바닥에 납작 엎드려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가 왜 저럴까 싶어 우스갯짓을 하는 줄 알았는데 표정이 제법 진심이다. 그동안 자신이 벌인 망동에 대한 죄의 무게를 정말 뉘우친 듯싶다.
바닥을 쿵 내리찧은 이마가 다시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갑자기 하면 죽는다는 실없는 농담이 생각이 났다.
우찬은 고개를 들라는 말 대신 침대 머리맡에 나무로 된 장식 용머리를 너무 시끄럽지 않게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까만 머리통이 조심스럽게 올라왔다. 차분히 가라앉은 눈빛에 구태여 짜증을 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만사가 다 귀찮았고 혹 이설이 잠에서 깰까 걱정이었다.
“알았으니까 이만 나가 봐.”
“그럼 신의 향후 처벌에 대해서는,”
“가서 손조익을 좀 데려와.”
“예?”
일부러 작게 소곤거리며 얘기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닐 텐데도 차란이 우렁찬 목소리로 되물었다. 얼굴을 찡그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이설을 확인하니 좀 뒤척일 뿐 다행히 깨지 않았다.
우찬은 급격히 유하게 풀어진 눈빛으로 이설의 이마를 쓰다듬은 뒤 남의 눈치를 보는 것도 아주 싫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말입니까?”
“오랜만에 수도로 돌아왔으면 내게 문안 인사 정도는 드리는 게 마땅한 도리지.”
“직접 만나 볼 생각이십니까?”
우찬은 가급적 말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말을 아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차란은 여간 못마땅한 게 아니라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눈알을 좌우로 굴렸다.
“아직 회복도 다 안 되신 옥체로는 무리이지 않겠습니까? 병상에서 위엄을 보이시는 것이 심히 염려스럽습니다.”
“지금 당장 대전으로 돌아오라고 해. 사병들도 함께 있다더냐?”
“예. 어림잡아 일천쯤 된다던데 수도 밖에 대기 중인 사병들도 그 수가 꽤나 많을 것입니다.”
“무슨 수가 그리 많아. 제한 사병 수를 넘어서도 한참 넘어섰군. 이대로 역모라도 꾸밀 셈인가.”
가벼운 어조로 말하는 우찬과 달리 차란은 한껏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바닥 쪽으로 숙였다. 한숨이라도 쉬었는지 머리카락이 사르르 날린 뒤 얼굴을 들었다.
“폐하께서 병세가 악화되셨다는 걸 알고 일부러 일을 꾸밀 수도 있으니 독대는 다음에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만큼 끌었으면 됐지 뭘 더 얼마나 일을 질질 끌겠다는 것이냐? 귀비며 편국이며 처리할 문제는 어디 한두 가지고?”
“그건…….”
“가만히 있던 도국에서 이제 와 보상 문제를 걸고넘어진 건 현재 알아보고 있는 자가 있긴 한 것이냐?”
“그건 단 상국이 직접 창화군과 잘 얘기를 해 보겠다 하였습니다. 창화군이 금국으로 지금 오는 중이라 합니다.”
“궁에 제 방 한 칸 없는 무늬만 왕족인 사내와 무슨 얘기를 할 게 있다고. 금궁 밖에서 만나라 해.”
언성을 높이지 않을 수가 없는 까닭에 이설이 잠결에 신음을 내며 몸을 뒤척였다. 뭘 해도 사랑스러운 이것은 미간 사이를 찌푸리면서도 제 다리에 몸을 밀착시켜 허벅다리를 끌어안았다. 치솟던 짜증이 확 가라앉으며 앞으로 처리할 모든 것들이 마냥 하찮게만 느껴졌다.
전시 중에는 입도 뻥긋 못하고 가만히 숨죽여 있던 도국은 금국과 편국, 그리고 이민족 간의 전쟁이 일단락되고 나서야 슬그머니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설을 찾기 위해 도국 국경을 폐쇄하여 무역업에 막대한 손해를 입은 일, 국경 경비를 강화하느라 군에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어간 일 등을 이유로 은근한 압박을 넣었다.
“소운에겐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국고나 열라고 해.”
“기대하는 액수가 꽤 큽니다. 줄 땐 주더라도 다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협상을 상국이 하고 있는 중이고요.”
“어차피 이쪽에서 제시하는 금액은 모두 거절일 텐데 무슨.”
별 소용은 없을 테지만 소운이 나서서 일을 처리한다 하니 굳이 그만두라고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도국이 원하는 정도의 액수라면 국고를 털어 넘기면 된다.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긴 하나 그깟 돈이야 추후 다른 명목으로 되돌려 받으면 그만이고, 지금 당장이 아닐 뿐 우찬은 언제라도 그럴 명분들이 각 나라며 대신들에게 하나 이상씩은 가지고 있었다.
“알아들었으면 새벽달이 뜨기 전에 대전에 손조익이나 가져다 놔.”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봤잖아, 그거.”
턱짓으로 차란의 손에 든 종이를 가리킨 우찬이 성가셔 죽겠다는 듯 입술 새로 쯧, 하고 소리를 냈다. 무슨 의미인지 눈치챈 차란은 더는 토 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새 다리가 불편해졌는지 미약하게 절뚝이는 걸 보고 이설의 발은 괜찮은지 문득 떠올랐다.
“대전까지는 갈 길이 너무 머니 태금궁으로 들이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설이 죽을 뻔한 원흉이 된 놈이야. 황궁에 들이는 것도 내키지가 않는데 어디까지 그놈을 들여와?”
“그럼 별궁이라도……. 폐하께서는 본디 며칠 동안 절대적 안정을 취하셔야 할 상태이십니다. 신이 오늘 폐하께 손조익을 데려왔다는 걸 알면 윤 내관이든 단 상국이든 저를 죽이려 들 것입니다.”
차란이 부질없는 실랑이를 하는 게 싫어 그럼 별궁으로 데려오라고 간결하게 대답한 뒤 어서 물러가라 손을 저었다. 차란은 뭔가 황명을 받아들이면서도 탐탁지 않은 태도였지만, 이래저래 우찬을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는지 군소리 없이 침소를 나갔다.
여태 소곤대는 소음이 난무하던 가운데에서도 이설은 한두 번 뒤척인 게 전부일 정도로 잘만 잔다. 생각해 보면 궁을 떠난 뒤로 이렇게 마음 편히 잠들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부친이 위독하다는 얘기를 듣고 떠난 길이 오죽 불안했을까.
그러고 보니 사나흘 전 연국으로부터 받은 썩 좋지 못한 연통은 언제쯤 알리는 게 좋을지 걱정이다. 자신이 걱정을 한다는 게 우습고 어이가 없지만 그걸 자조할 여유가 없었다. 겨우 안정을 되찾은 이설이 다시 슬픔에 잠길 생각을 하면 제 상처가 후벼 파지는 듯 괴로웠다.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않는다고 평생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
젠장. 사람 하나를 마음에 품는 것은 무수히 많은 감정들을 온몸으로 부딪치는 일이다.
그래도 어린아이처럼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며 품에 파고드는 이설의 서늘한 체온을 생각해 보면 절대 싫지가 않다.
*
우찬이 조심스레 침상을 벗어날 때까지도 이설은 잠에서 깨지 않았다. 눈 떴을 때 자신이 없으면 걱정할 게 분명했지만 곤히 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 잠시간의 부재를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깊이 잠들었으니 아침이 올 때까지는 아마 깨지 않을 것이다.
볼록한 이마에 입을 맞추려고 허리를 접자 옆구리 통증이 거세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짧게 두 번 입을 맞췄다. 돌아서 나가려다 아래쪽 포단을 들춰 발목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언제 덧신을 신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조심성 많기는.
별궁에서 기다린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손조익의 기별이 전해졌다.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빛나는 별들을 보며 이설과 술을 마시기 딱 좋은 날씨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설은 술을 마시면 금세 열이 오르니 한여름보다는 초겨울이 적당했다.
“들라 해라.”
두 번쯤 더 들리는 윤 내관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나서야 우찬이 대답했다. 반쯤 열린 문으로 며칠 확연히 늙은 노인네 하나가 들어와 인사를 했다. 살이 많이 빠진 티가 나서 다른 사람인가 긴가민가할 정도였지만 얼굴만 봐도 기분 나쁜 생김새와 불쾌한 눈빛에 은근히 무례한 태도를 보니 우찬이 알고 있던 손조익이 맞다.
“병환이 깊어 그간 궁에 정양 중이라 들었습니다만 이제 쾌차하셨나 봅니다.”
“덕분에. 태부 자네도 못 본 새 많이 늙었군. 고생이라도 했나?”
“관직도 없는 늙은이가 고생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저 요양을 핑계로 유람 삼아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것이 이제 힘에 부치나 봅니다.”
“그래, 유람. 유람 좋지.”
겁먹은 모양새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벌인 짓에 비하면 무척 여유 있는 태도였다. 뻔뻔스러운 낯짝이 아주 혐오스러운 한편 이 정도면 손조익 저자도 제대로 된 간직도 없이 황궁에서 꽤나 오래 버텼으니 훌륭하다 칭찬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기껏해야 오늘까지겠지만.
“하여 이번 유람은 꽤나 멀리까지 다녀온 것 같던데.”
“거리상으로는 그리 멀지 않으나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조금 번거롭긴 했습니다만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페하께서도 기회가 되신다면 꼭 한 번 다녀오셨으면 합니다.”
“글쎄. 천자가 자리를 오래 비울 수는 없어서 말이야.”
“…….”
“물로 내가 천년만년 이 자리에 앉아 있을 건 아니지만.”
속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손조익은 뜨끔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노련한 늙은이답게 금세 갈무리를 한 뒤 의젓한 미소를 지어 올렸다.
“언제가 됐든 폐하의 뜻에 따라 달린 것이지요. 소신이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소신?”
“……송구합니다. 실언하였습니다. 소인이 관여할 일은 아니라는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미세하게 금이 간 백자처럼 갈라지는 얼굴이 이제야 보기 흡족했다. 일부러 모진 말로 다른 사람의 신경을 건드려 사지로 몰아붙이는 취미 같은 건 없었는데 어쩌면 이 재미를 몰라 그랬던 것일 수도 있겠다.
“한 가지 그대에게 제일 먼저 얘기해 줄 게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