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황홀경 (281)화 (281/300)

달의 황홀경

281화

연방 등을 쓰다듬던 우찬의 손이 사라졌다. 목덜미에 숨긴 얼굴을 슬쩍 들며 우찬의 얼굴을 살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웃음기가 사라졌다는 건 알 것 같았다. 괜히 눈치를 살피며 몸을 뒤로 뺐다.

“지금?”

“네. 조금 전에 성문을 지난다고 연통을 받았으니 지금쯤 금교(昑橋)를 지났을 겁니다.”

신경 써서 듣지 않아도 신경이 날카로워진 목소리에 괜히 이설이 무릎을 오므렸다. 그러다 우찬의 옆구리를 조인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옆으로 내려와 헛기침을 하며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우찬 때문에 피워 놓은 향을 계속 맡은 덕에 공교롭게도 이설의 상처도 통증이 무뎌졌다.

이설이 구겨진 의복을 정리하자 차란이 몸을 더 비스듬히 돌려세워 거의 우찬을 등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폐하의 병환 소식을 듣고 바로 황궁으로 온다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개맛골의 사택으로 향하는 중입니다.”

“자진해서 황궁에 날 보러 오겠다 했다고? 간이 부었군.”

“켕기는 게 없을 테니까요. ……손조익 본인 생각으로는 말입니다.”

우찬이 노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차란이 당연하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내내 우찬을 등지고 대화를 할 생각은 없는지 큼큼거리며 일부러 헛기침 소리를 크게 내고는 몸의 방향을 바로 했다. 그때쯤 이설도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태연한 얼굴로 서 있었다.

차란은 눈짓으로 인사했지만 전처럼 능청스레 먼저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이설은 그동안 자기가 벌여 온 짓들을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어찌나 민망한지 덧신 속에 발가락이 베베 꼬이는 것만 같았다. 차란이 그런 성정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속으로 저를 비웃으면 어쩌나 등 뒤로 식은땀이 다 흘렀다. 아까는 우찬이 쓰러지고 난 뒤라 정신이 없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마마.”

차란이 갑자기 되지도 않는 표정 관리를 하느라 진땀을 빼는 이설을 불렀다. 깜짝 놀라 네, 하고 대답하자 아래쪽에 있던 우찬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피식 웃으며 위를 올려다봤다.

“뭘 그리 놀라? 차란이 널 잡아먹기라도 하느냐?”

“아뇨, 아닙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신은 마마를 잡아먹지 않습니다.”

우찬의 짓궂은 농담에 차란이 실없는 첨언을 했다. 평소 같은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차란의 애잔한 노력에 힘입어 이설도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대꾸는 하지 못했다.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그……, 암어 해독서를 아직 받아 보지 못하여서 말입니다.”

차란이 은근히 말끝을 흐리며 이설을 봤다가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급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싶으면서도 상대를 재촉하기는 싫어서 급하지 않은 척을 하려고 했지만, 그러기엔 너무 눈에 보이는 티가 났다.

암어라 하니 무슨 얘기인 줄 몰라 눈만 깜빡였는데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우찬과 눈이 마주쳤다. 우찬의 찡그린 눈을 보니 그제야 뭘 말하는지 생각이 났다.

“그거라면 제가 분명 폐하께 전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글쎄.”

생각해 보는 척도 하지 않고 딱 자른 대답은 거의 부정에 가까웠다.

“잃어버린 것 같다.”

“그 중요한 걸 잃어버리셨다고요? 어디서요?”

“여기 어디서.”

우찬이 성이 없이 침상 끝 언저리를 손으로 휘휘 저어 가리켰다. 차란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직까지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터덜터덜 이설의 옆으로 돌아와 망연자실한 얼굴을 했다 순식간에 비굴해졌다.

“마마 염치없지만 한 장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일단 원문이 적혀 있는 서신을,”

“제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이리 와. 네가 급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차란이 할 일이지.”

“아, 예.”

“발도 아직 성치 않으면서 왜 그렇게 서 있어? 이리 와.”

엄밀히 말하자면 우찬이 이설의 성과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차란의 일이 늘어난 것이지만, 이설은 구태여 말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우찬이 자신에게 더없이 관대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여기에 너무 익숙해지면 안 된다.

멀뚱히 서 있는 이설의 팔을 당겨 우찬이 제 옆에 앉혔다. 엉거주춤하게 앉은 이유는 차란 때문이었는데, 우찬은 그것도 모르고 자꾸 허리를 당겨 자기 옆으로 바짝 붙이려고 하는 통에 아주 곤란해 미칠 지경이었다.

있던 곳을 다급히 뒤져 서신을 가져온 차란이 이설에게 물건을 건넸다. 허리에 감긴 우찬의 손을 못 본 척하려는 희대의 노력에 감탄이 날 정도였다.

여태 너무 많이 사람들이 펼쳤다 접었다를 반복한 탓에 너덜너덜 걸레짝이 된 서신을 거리낌 없이 펼쳐 들었다. 빠르게 훑어 내려가는 이설을 보고 차란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미 한번 풀어 보신 암어이니 내일 낮까지는 괜찮으실까요?”

“잠도 자지 말고 밤새 암어 해독이나 하라는 말이냐? 헛소리 집어치워라.”

“워낙 사안이 급하다 보니……. 그럼 마마, 내일 오후까지는 가능하시겠습니까?”

“혹시 승상께서도 한 번 들은 것을 잊지 않고 외울 수 있는 기억력이 있으십니까?”

별안간 신통방통한 재주가 있는지 묻는 이설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차란이 고개를 갸웃 옆으로 기울었다. 그리고는 우찬을 보는 것이 마치 그 뜻을 묻는 것처럼 보였다. 우찬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가 지난번 사냥대회 때 다친 어깨를 문지르며 한껏 비웃음으로 대답했다.

“소운도 아니고, 비차란이 그런 비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지.”

한껏 비꼬는 말에 차란이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제까짓 게 뭐라고 우찬이 하는 말에 토를 단다는 건지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설은 잠깐 생각을 하는 듯하다가 탁자로 자리를 옮겼다. 우찬이 허리를 끌어안은 팔을 놓지 않아 차란이 보는 앞에서 다소 어리광을 부리는 추태를 부려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뭘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급하다 하셨으니까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이미 새 종이에 글을 써 내려가는 이설의 뒤에서 차란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놀란 얼굴이 괜히 면구스러워서 못 본 척했지만 차란이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이게 원래 그렇게 쉽게 풀 수 있는 암어였습니까?”

“예, 풀이 방법만 안다면 그리 오래 걸리지는…….”

하루 이틀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거짓말을 친 전적이 있어 말을 조심스럽게 해야 했다. 우찬도 차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테지만 굳이 들추어 내지는 않았다.

휘갈겨 쓴 한바닥을 메운 종이의 먹물이 다 마르기도 전에 차란이 양해를 구하고 가져갔다. 우찬에게 넘겨줘 먼저 내용을 확인시킨 뒤 차례로 읽어 내려가는 표정이 한껏 어두워 이설은 꼭 자기가 잘못한 일을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다.

의외로 우찬은 별 충격도, 감흥도 없는지 이설더러 가까이 오라 손짓만 하고 말 뿐이었다. 이설이 가까이 가자 덥석 손을 잡았다.

“손이 왜 이리 차?”

“시, 신첩은 원래 몸이 찬 편입니다. 폐하께서도 신첩, 아니 저와 함께 있으면 시원한 것 같다고 하셨잖아요.”

“시원한 것과 찬 건 엄연히 다르지. 이리 안으로 들어와.”

“폐하!”

다짜고짜 손을 잡아당기는 우찬이 환자라는 걸 믿을 수가 없다. 휘청거리는 몸을 양팔로 받아 든 우찬이 앉은 채로 몸을 들어 이설을 제 옆에 놓았다. 해독문을 읽느라 바쁘던 차란은 그 광경을 못 본 척하랴, 마저 읽어 내려가랴 죽을 맛인 얼굴로 결국 다시 두 사람을 등졌다.

아픈 사람은 우찬인데 왜 자신이 포단 아래에 몸을 누이고 있어야 하는 걸까. 도통 모르겠는 얼굴로 이설은 몸을 웅크렸다. 사실 몸이 조금 많이 차긴 했다. 아무래도 긴장이 풀려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포단 아래로 우찬이 손을 밀어 넣었다. 잡으라는 건 줄 용케 알고 두 손 사이에 우찬의 손을 넣어 잡자 웃음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찬의 손은 늘 그렇듯 아주 부드럽지는 않지만 무척 크고 따뜻했다. 평화로운 하루의 끝인 것처럼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 감겼다.

“증좌가 이리 명확하게 남아 있다는 게 잘된 일이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이런 터무니없는 짓이……, 아, 음.”

별다른 생각 없이 몸을 돌렸을 차란은 다시 마주한 광경에 할 말을 잃은 듯 말끝을 흐리다 결국 말하기를 포기했다. 음, 하고 닫히는 입술은 말할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게 표가 났다.

이설은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고 싶을 만큼 창피한 한편 우찬이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고 일단 몸이 너무 무거웠다. 오랜만에 약의 도움 없이 잠이 쏟아진다. 이길 방법이 없었고 이기고 싶지도 않았다.

허리를 옆으로 숙인 우찬이 귓가에 대고 무슨 말을 속삭이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좋은 꿈을 꾸라는 말 같기도 하고, 은애한다는 말 같기도 하고 둘 다 같기도 하다.

*

“설마 그대로 잠드신 겁니까?”

당황한 차란 못지않게 우찬도 꽤 황당한 기분이기는 했다. 재울 생각이긴 했지만 이렇게 픽 쓰러지듯 잠들 줄은 몰랐다. 피곤하기야 했겠지. 아침부터 그런 일이 있었고, 더 길게는 아주 오래전부터 혼자 끙끙 앓고 있었을 테니까.

그래도 그렇지 눕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질 줄이야.

이전과 달리 손에 하나 더 넣은 건 이설뿐인데 온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든다. 꼼지락거리는 손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단단히 붙잡았다. 잔디를 손수 뽑으면서도 사내 치고 많이 부드러운 살결이 그간 짧은 고생을 한 탓인지 까칠한 굳은살이 만져졌다. 안쓰러워 입을 맞춰 주려다가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게 생각이 들었다.

“아직 안 나가고 거기서 뭘 하고 있어?”

“신이 나가야 하는 건, ……지 몰랐습니다. 송구합니다.”

자연스레 눈이 옆으로 돌아간 차란이 이설을 살피고는 대답했다. 우찬을 한 번, 손에 든 해독문을 한 번. 번갈아 봤다가 지금 할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입을 닫았다.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밤사이 존체 무탈하시길, 음…… 그런데 폐하.”

“왜.”

물러간다 말만 해 놓고 아직 한 걸음도 떼지 않는 차란이 슬그머니 우찬에게 몸을 정직하게 돌리며 불렀다. 우찬은 본 체도 안 하고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이설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간 신이 신하 된 도리 이상으로 폐하께 무엄한 망동을 일삼은 것에 대해 사죄의 말씀을 드리고자 때를 보고 있었습니다만 항상 일이…….”

겸연쩍게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는 차란이 무슨 말을 할지 대강 이해는 됐다. 상황 핑계를 대지만 사실은 제 기분이 좋아지기를 기다렸다가 유야무야 넘어가 주길 바랐던 게 아닐까 싶다.

확실히 지금 우찬은 지금 같은 기분이라면 대사천하(大赦天下:온 나라의 죄인을 사면함)라도 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