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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79)화 (279/300)

달의 황홀경

279화

“일어나지 마세요. 태의가 괜히 약을 독하게 지어 드린 게 아닙니다.”

우찬이 팔꿈치를 대고 상체를 일으킬 기미를 보이자 이설이 황급히 어깨를 눌렀다. 가뜩이나 힘도 없는 판에 일으켜 세우던 몸이 고작 이설이 미는 힘에 쓰러지자 우찬이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이설을 봤다.

얼떨결에 우찬을 밀어 버린 이설은 이설대로 당황하여 안절부절못하며 양손을 깍지 꼈다. 이제 와 그런 행동이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는 어린애처럼 유달리 순진무구해 보이기도 했다.

“소, 송구합니다, 폐하. 그럴 생각으로 민 게 아닌데, 이렇게 쉽게 넘어지실 줄은…….”

“내가 겨우 네까짓 힘에 이렇게 쉽게 밀릴 줄 몰랐다 이 말인 거지?”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쉬이, 조용히 해야지. 밖에 것들이 들으면 또 시끄러워진다.”

우찬이 손을 휘이 저었다가 이쪽으로 오라 손짓했다. 어쩐지 팔에 기운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기분이 착잡했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있던 이설이 조심스레 다가가 침상 끝에 걸터앉았다. 우찬을 바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게 불손해 보이긴 했지만 가까이 앉으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 다시 한번 우찬이 몸을 일으켜 세워 앉았지만 이설은 멀뚱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태의가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한다고 했는데…….”

“태의가 신의였다면 내가 지금 깨어나지도 않았겠지.”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아프다.”

포단을 들쳐 상처를 보려다 우찬이 하는 얘기에 깜짝 놀라 도로 덮었다. 내심 물어보면서도 괜찮다는 얘기를 들을 거라고 생각했다가 봉변이라도 맞은 듯 머리가 띵해졌다. 화살에 맞은 어깨가 너덜너덜해져서도 아프다 소리 한번 안 하던 우찬이 아니던가. 자신 때문에 생긴 상처인 것도 모자라 재차 덧난 것도 자신 때문인 곳을 아프다 하니 마음이 불안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태의를 불러오겠습니다.”

“어딜.”

생각도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이설을 다시 아래로 잡아당긴 우찬은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이설을 자연스레 받아 들어 품에 눕혔다. 어정쩡한 자세로 우찬에게 기대어 안긴 이설은 상처가 또 터지는 게 아닌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우찬의 표정은 의외로 평온했다.

“농담이다. 태의가 약을 독하게 쓴 건 맞는 모양이야. 아픈 곳은 하나도 없다. 그냥 좀, 머리가 어지럽구나.”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셔서 그렇습니다. 어찌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버티실 수가 있으셨습니까? 너무하셨습니다.”

“잔소리도 좋으니 네가 이리 기운 차린 모습을 보니 좋구나. 우는 것도 예쁘지만 이번에 넌 너무 많이 울었어.”

“정말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그래 맞다. 설령 안 괜찮아도 네가 아픈 게 아니니 너무,”

“폐하께서 아프신 게 곧 제가 아픈 것입니다. 제발 존체를 귀하게 돌보시옵소서.”

근래 몇 번 우찬의 말을 끊고 할 말을 하는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있었다. 고쳐야 하는 나쁜 버릇이 됐는데도 아직 깨끗하게 고치지 못했다. 다만 우찬이 이를 가지고 트집을 잡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혼자 성이나 씩씩거리는 이설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우찬이 빙그레 웃었다. 오래 앓아눕지는 않았지만 좌우지간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의 몰골이라고 하기에는 더없이 화사하고 찬연하여 이설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야지. 앞으로 이 존체를 귀하게 돌보는 데에 내 열과 성을 쏟을 테니 너는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거라. 다시는 다치지도, 아프지도 않을 것이다. 이 몸에 흠집 하나 내는 자는 잡아다 본보기를 보여 죽이겠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니 다행이긴 합니다만…….”

저를 놀리려고 일부러 과장된 얘기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 이설은 탐탁지 않은 눈으로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도 영 찜찜한 구석이 가시질 않아 눈을 끔뻑거리며 쳐다보자 우찬이 웃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 존체는 오직 이설이 널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네 안위와 평강을 위해서라면 내가 뭐든 다 하마. 그러니 너는 이제 아무 걱정도 말거라.”

“제가 고작 그런 이유로 폐하의 존체를 걱정하는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우찬이 생각하는 바를 이제야 알아챈 이설이 허리를 벌떡 일으켜 세우며 서운함 가득한 어투로 물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제 안위나 평강 같은 게 아닙니다.”

“안다.”

“그러신 분이 어찌 말씀을 그리 서운하게 하십니까?”

“서운하더냐?”

“예 서운합니다.”

“네가 서운해서 나는 기분이 좋다. 앞으로도 종종 서운하게 해야겠어.”

가볍게 미소 짓는 우찬의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억 속에서 아주 깊숙이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우장절이 끝난 직후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 꿈결처럼 사라진 환상인 듯싶기도 하다.

어깨를 토닥이는 우찬의 손의 온기가 좋아서 대꾸도 하지 않고 잠시 동안 그대로 멈춰 있었다. 우찬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한참을 안아 주다가 나직이 목소리를 냈다.

“보았느냐?”

“예?”

“내 손목에 이름. 보았어?”

“……대체 언제부터 깨어 있으셨던 겁니까?”

“글쎄. 애초에 잠이 들었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의미심장하게 웃는 얼굴을 보자 원래 우찬이 이렇게 웃음이 많았었나 싶다.

“말 돌리지 말고 대답부터 해야지. 이름, 보았느냐?”

따져 물으려던 이설을 선수 치고 우찬이 재차 물었다. 야무지게 물어볼 기세로 입술을 뗐던 이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꾹 닫고 괜히 눈동자만 좌우로 굴렸다.

“봤잖아, 맞지?”

“……예. 봤습니다.”

내내 정신이 온전했다면 이제 와 잡아떼는 게 더 민망한 일이라 이설이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을 푹 내쉬며 자연스레 우찬의 어깨에 턱을 올리는 자신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우찬은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등을 쓸어내렸다.

“잘했어. 보고 나니 어떻더냐?”

“한눈에 보고 알았습니다. 그게 제 이름이라는 것을.”

“어찌 알았는데?”

“그냥. ……그냥 알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제가 폐하께 드린 듯한 기억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그런 일 따위는 없었겠지만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처럼 희미하게요.”

“난 이 이름을 꿈에서 누군가에게 받았어.”

“예?”

대뜸 꿈 얘기를 꺼내는 우찬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지며 이설이 귀를 쫑긋 세웠다.

“사내인지 여인인지도 모르겠는 어떤 사람이었어. 널 만난 뒤 다시 꿈을 꿨을 때야 그자가 사내라는 걸 알았지. 그때는 네가 내 꿈에 나왔던 것은 아닐까 생각을 많이 했지만 넌 아니었던 것 같아. 하지만 너와 매우 닮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

“폐하는 그게 저와 관련된 누군가였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어쨌든 그자가 내게 네 이름을 준 것은 확실해. 기회가 된다면 사례는 톡톡히 치러 주고 싶군.”

“폐하께서 그리 말씀을 하시니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냐 물으며 우찬이 팔로 이설을 끌어안았다. 상체가 밀착될수록 옆구리에 가해지는 충격이 심해질 거라고 생각해 이설은 어떻게든 끌려가지 않게 완강히 버텼지만, 우찬의 힘을 이길 리가 없었다. 좀 전에 이설이 밀었던 힘에 맥없이 뒤로 쓰러졌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설은 우찬을 처음 만났던 날부터 종종 꿨던 봉황이 나오던 꿈에 대해 긴 설명을 시작했다. 불꽃으로 타오르는 깃털의 커다란 봉황이 얼마나 경이롭고 두려웠는지부터 마지막 꿈에서 깃털을 뽑아 제 발치에 억지로 떨어뜨리고 간 것까지.

우찬은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외로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그래서 그 봉황이 준 깃털은 받았고?”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받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 발치에 떨어뜨리고 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 발치가 아마 왼쪽이었을 테지?”

“예 아마 그랬을 겁니다. ……폐하께서는 성천자 봉황의 현신이신 동시에 후손이시지 않습니까?”

“다 미신이다.”

손사래를 치는 우찬은 평생 지겹게 들어온 얘기를 여기서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려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습니까? 저는 제게 깃털을 준 봉황이 폐하가 아니실까 생각했는데요.”

하지만 다소 기가 죽은 목소리로 이설이 속삭이듯 말하자 우찬이 곧바로 고개를 바로 돌렸다.

“폐하께서 누워 계시는 동안 가만히 생각을 해 보았는데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봉황, 보는 것만으로도 두렵고 경외로운 동시에 무척 아름다웠거든요. 마치 폐하를 볼 때와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게 폐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나인 걸로 하지.”

“예?”

“나 금우찬은 성천자 봉황의 현신이며 살아 있는 그의 후계이다. 그러니 네 꿈에 나타나 증표를 새겨 준 봉황 역시 나인 셈이지.”

별안간 손바닥 뒤집듯 생각을 바꾼 우찬은 뻔뻔스럽게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우겼다. 멀뚱히 놀란 눈으로 우찬을 바라보던 이설이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팔에 목을 감아 안겼다.

“예 그러세요. 폐하께서 제게 이름을 준 것으로 하시면 되겠습니다.”

“그편이 네게도 좋겠지?”

“물론입니다.”

“네 발목에 있는 내 이름은 다시 확인해 보았느냐?”

“아뇨. 폐하께서 쓰러지신 후 곧바로 호위군이 들어왔고, 내내 혼자 있던 시간이 없어 보지 못했습니다.”

말한 그대로, 우찬이 쓰러진 이후 혼자 있을 시간이 없었다. 아직까지는 우찬이 아닌 다른 누구에게도, 하물며 차란이나 소운에게조차 이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아 얘기조차 꺼내지 않았다. 호위군이 밀려 들어오는 사이 다급히 버선만 챙겨 신고 나온 지 한참이 지났다.

우찬이 제 정인이며, 자신이 우찬의 정인이라는 사실에 그저 감격스러워 했지 그 증표를 확인해 볼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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