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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78)화 (278/300)

달의 황홀경

278화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깨어나셨을 때 제가 없으면 서운해하실 겁니다.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 두실 거고요.”

“뭐 그렇게까지 하실 분은…….”

소운은 본능적으로 우찬을 감싸면서도 난감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목석처럼 서 있는 세 사람 중 누구도 제 말에 동의할 것 같지 않다는 걸 깨닫고는 은근슬쩍 말을 흘려 버렸다.

“혼자 남아 있을 테니 모두 물러가셔도 됩니다. 승상과 상국께서는 아직 밖에서 할 일이 많이 남으셨잖아요. 그래도 비가 일찍 그쳐 다행입니다.”

“신당에 무녀가 제를 다 마치기도 전에 비가 그쳤다 합니다. 신내림을 받은 지 얼마 안 된 무녀라 신력이 좋은가 봅니다.”

뒤에 멀찌감치 서서 내내 눈치만 살피던 차란이 재빨리 끼어들며 말했다. 대답을 빼앗긴 소운은 대놓고 싫은 티를 내며 멀찌감치 물러서서 이유 없이 꽃병의 꽃을 만지작거렸다.

“민가는 피해가 어떤가요?”

“복구에 시일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수습 가능한 선입니다. 마마께서 걱정하실 일은 아니니 염려 놓으십시오.”

“어떻게 걱정을 하지 않겠어요. 제 나라, 제 백성의 일인데.”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분히 대답하는 이설을 보고 차란이 아차 싶었는지 입을 확 다물었다. 꽃병에 꽃을 보기 좋게 다시 꽂아 넣던 소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옆으로 다가왔다. 툭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누가 누굴 쳤는지 안 봐도 뻔했다.

“승상과 내관께서는 그만 나가서 일들 보십시오. 흑영은 마마께서 불편해하시지 않게 적당한 곳에 몸을 숨기는 게 좋겠습니다. 마마, 잠깐 저와 얘기 괜찮으시겠습니까? 잠깐이면 됩니다.”

“네 그러세요.”

“그럼 잠시만.”

소운이 잠시 세 사람과 함께 자리를 비켰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이설은 두 손 사이에 잡은 우찬의 손을 꽉 잡았다. 얼음장처럼 차갑던 체온에 이제야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길게 내쉬는 숨에 우찬의 소매가 펄럭였다.

금색 띠를 두른 흰 소매가 위로 훌렁 넘어가며 뼈가 굵은 손목이 드러났다. 적당히 그을린 피부에 눈에 띄는 흔적이 상처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얼른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눈을 감은 뒤에도 익숙한 모양이 흐릿한 잔상으로 남았다.

볼까, 보지 말까.

몇 번의 고민 끝에 이설은 허리를 옹송그려 소매 가까이 몸을 갖다 댔다. 그리고 혹시라도 우찬이 깨지 않게 조심히 소매를 위쪽으로 올려 걷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한 자신의 이름이었다. 발목의 제 것과는 다르게 금사로 촘촘히 수를 넣은 듯 단정하게 새겨진 이름을 본 순간 제 것이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언젠가 자신이 준 적이 있는 기억이 이제야 생각 난 것처럼 강렬한 확신이었다.

홀린 듯 이름 위를 한 번 쓸어 본 이설은 우찬이 다시 쓰러진 이후 처음으로 웃음을 지었다.

금의 황제에게 이름을 준 것은 연이설 자신이다.

금우찬은 제 것이라는 깨달음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든다.

“마마, 차 한 잔 드릴까요?”

“……아, 괜찮습니다.”

소운의 목소리가 들리자 침착하지만 재빨리 소매를 내린 이설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두 사람을 돌려보내는 데 애를 먹었는지 소운은 한층 더 피곤해진 얼굴로 이설 앞에 섰다. 앉기를 권유하자 망설이다 옆에 앉았다.

“하실 말씀이 뭔가요?”

“주제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상국께서 곤란해지시기 전에 제가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 여간 껄끄러워하는 게 아닌 소운을 위해 이설이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그간 저로 인해 황궁에 큰 폐가 되었던 일들에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예? 아니, 전 그런 것을 말씀드리려던 게 아니라,”

“아닙니다. 제 개인의 욕심으로 금국에 큰 피해를 입힌 것을 항상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했습니다. 무엇보다 저 때문에 폐하께서 이렇게 되셨기까지 한데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진작 누구에게라도 사과했어야 할 일이었는데 일이 풀리고 나서야 사과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았지만 소운이 이를 탓할 것 같지는 않다. 자신도 참 치사하다고, 스스로에게 혀를 차며 웃었다.

“상국께서 나서서 제게 책임을 지라 말씀하신다면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궁에서 나가는 일은,”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마마?”

황당해 마지않은 눈으로 소운이 제법 큰 소리를 냈다. 이설이 움찔 놀라며 우찬을 살피자 소운도 덩달아 놀라 두 사람의 눈치를 봤다. 다행히 우찬은 미동도 않고 가슴팍만 오르락내리락했다.

“마마를 궁에서 나가시게 한다니요. 농이라도 그런 말 마십시오. 제 목이 달아나는 수가 있습니다.”

소운은 우찬이 깨지 않아 다행인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하다 이내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한숨과 함께 밖으로 뱉어 버렸다.

“두 분은 이제 앞으로 괜찮으신 겁니까?”

묻고 싶은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집약시킨 질문이지만 대답이 복잡할 필요는 없었다.

이설은 우찬의 얼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예 그럴 겁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말씀해 주실 수 없으시겠죠? 다른 이유가 아니라 폐하께서 다시 쓰러지신 데에 대한 연유를 듣고자 함입니다.”

“그거라면 제가 아마 폐하의 옥체를 발로 걷어찬 것 같습니다.”

무덤덤하게 대답하자 소운이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어색하게 웃었다.

“윤 내관에게는 제가 대충 둘러대 보겠습니다.”

“더 궁금한 것은 폐하께서 깨어나시거든 알 수 있으실 거예요.”

“놀랄 만한 것인가요?”

“그래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소운이 인자하게 웃으며 시선을 떨궜다. 눈빛의 방향이 정확히 자신의 왼쪽 발목을 향하고 있었다. 소운은 눈치가 빠르고 똑똑한 사람이니 어쩌면 조금은 어떤 눈치를 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묻고 싶지는 않았다. 소운도 먼저 묻거나 말을 꺼내는 등의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소운은 잠시 동안 말없이 우찬을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짐작도 되지 않았지만 딱히 궁금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매일 보는 옥안이지만 볼 때마다 참 놀랍고 감탄스럽습니다. 어찌 이리 아름답고 수려하신지.”

“상국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폐하를 보셨다지요? 폐하의 어린 시절은 어떠셨습니까?”

한결 풀어진 분위기에 마음이 편해진 이설이 전부터 늘 묻고 싶었던 것을 이제야 편히 물었다. 소운은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과 똑같으셨습니다. 아름답고, 무심하셨지요.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어린 시절에는 지금보다 조금 더 고우셨던 것 같기도 합니다. 피부가 무척 하야셨거든요.”

“곱기로는 지금도 고운 옥안 아니십니까?”

“아뇨, 그때는 좀 더 뭐랄까…….”

소운은 적당한 표현을 생각하려는 듯 미간에 인상을 썼다. 그렇게 입술을 삐죽이다가 결국 생각나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좀 곤란하다고 생각했는지 여러 번 망설이다가 얘기를 꺼냈다.

“비 승상이 폐하를 처음 뵈었던 날 자신에게 시집을 오라며 망발을 했을 정도이니 상상이 되십니까?”

“예?”

놀라 되묻는 이설을 옆에 두고 소운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소운이 이만큼 소리 내서 웃는 것을 처음 보는 이설은 그것보다도 차란과 우찬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한 충격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차란을 살려 보내 주신 건가? 폐하도 어렸을 때는 꽤나 인정이 너그러우셨던 걸까? 어떻게 그런 소리를 듣고 차란을 승상 자리에…….

우찬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던 이설을 옆에 두고 소운은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다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잠시 후 마마, 하고 이설을 불렀다.

“폐하를 잘 부탁드립니다.”

“……예.”

“밖에는 호위군과 윤 내관 그리고 태의가 밤새워 지키고 있을 겁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거든 말씀하세요.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의미심장한 웃음만 남기고 소운이 떠나자 화롯불에 숯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만약 우찬이 일다경 정도만이라도 늦게 자신을 찾아왔다면 어땠을까? 이 이름을 완전히 지우고 우찬과는 오해만 쌓인 채 영영 멀어지게 되지는 않았을까?

생각만으로도 전신이 오싹해지는 공포가 찾아왔다. 우찬을 떠나는 일은 이제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곧 죽음이라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떠올랐다. 자신은 절대 우찬을 떠나서는 안 되며 우찬 역시 제 곁을 벗어나면 안 된다고.

그게 모두가 말리는 와중에도 고집을 부려 우찬 옆에 남은 이유였다.

이설은 누가 두 사람 사이를 떨어뜨리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괜한 조바심에 우찬의 손을 더 꽉 붙잡았다. 있는 힘껏 손을 꽉 쥐고 또 쥐어도 뭔가 모자랐다.

그런데 그때 힘없이 늘어져 있던 우찬의 손이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어디 안 간다, 설아.”

무겁게 잠긴 목소리가 농담 어린 어조로 이설을 타박했다. 놀란 이설이 손을 쥔 채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폐하! 깨어나셨습니까? 왜 벌써……?”

태의는 우찬이 제 말을 듣지 않고 일찍이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다닌 것이 문제라고, 무척 에둘러 예의 있게 말했다. 하여 이번에는 오랫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말고 푹 쉴 수 있도록 독한 약을 처방했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한사코 호언장담하고 간 것이다.

다들 그런 줄로 믿고 내일 아침까지는 깨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모두를 비웃듯 우찬은 약을 쓴지 한나절도 되지 않아 잠에서 깨어난 듯 눈을 떴다.

“저 시끄러운 것들 내보는 데에만 한참이 걸렸다. 그나저나 단소운 저 놈. 내가 정신이 들었다는 걸 알고서 옛날 얘기를 꺼낸 거야. 오냐오냐 봐줬더니 기어오르기를 끝이 없구나.”

말은 그리하면서도 우찬이 화가 나지 않았다는 것은 이제 이설도 알았다. 갑자기 깨어난 우찬이 걱정되는 한편 뱃속에 몽글몽글하게 피는 연기가 가슴 여기저기를 부드럽게 간지럽히는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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