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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77)화 (277/300)

달의 황홀경

277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눈빛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많이 혼란스러울까? 그래도 괴로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이설이 입을 뻥긋거리다 이내 고개를 떨궜다.

“설아.”

화를 내는 것도, 위로하려는 것도 아닌 모호한 말투로 부르며 턱을 들게 했다. 눈이 마주친 찰나 현기증이 나며 잠시 시야가 뿌옇게 흩어졌다 다시 모였다. 아무래도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모양이었다. 정신이 온전히 남아 있을 수 있는 것도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다.

“알아챘을지 모르겠지만,”

“잠시만요!”

이설이 후다닥 우찬에게서 물러나며 소리쳤다. 무릎에서 내려앉느라 몸이 쿵하고 떨어지며 휘청거릴 정도였지만 팔로 받쳐 겨우 넘어지지 않는 것에 그쳤다.

“잠깐만 저도 생각을 좀,”

“길게 생각할 필요 없어.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을 테니까.”

“그렇지만……,”

급하게 변명의 여지를 찾아보려는 듯 눈동자를 굴리는 소리가 밖에까지 나는 것 같았다. 저 쪼그만 머리통 속은 지금쯤 얼마나 바삐 일하고 있을지 눈에 선하다.

이설이 생각을 정리하려고 시간을 끄는 동안 우찬 역시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상황이 파악되는 건 순식간이지만 이로 인해 폭풍처럼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거셌다. 온기와 냉기가 뒤섞여서 무엇 하나 콕 집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보다 더 당황하고 있을 이설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열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는 이설은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는 듯했다.

“말이 안 됩니다, 말이 안 돼요. 왜, 도대체 왜 이런…….”

“금황족은 이름이 귀해 남이 함부로 불러서도, 들어서도 안 돼. 하여 어렸을 때부터 아명이 더 익숙하단다. 아명이 천명의 증표가 되는 경우는 기록상 전무했으니 좀 더 가볍게 생각한 것이지. 너만 해도 태자의 아명을 알고 있지?”

우찬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는 하고 있는지, 이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역시 알아듣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태자에겐 정명보다 아명이 더 익숙했을 테지. 그래서 네게 해도원이라는 이름을 먼저 알려 준 것이고.”

“그게, 그런,”

“황족들은 대부분 아명에 익숙해. 정명은 태어나 누구도 불러 준 적이 없거든. 나 또한 그렇고.”

우찬은 가끔 자기 이름이 무엇인지 문득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었다. 누군가 소리 내어 입 밖으로 불러 보는 것을 상상으로도 들어 보지 못했다. 어렸을 적 차란과 흑영을 다그쳐 몇 번 불러 보라 한 적이 있었지만 흑영은 물론 시건방진 차란조차 그 이름만은 감히 함부로 부르지 못했다.

그나마 익숙하던 아명도 황제로 즉위하기 한참 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아명이든 정명이든 이름은 그저 명목상의 장식일 뿐 하등 쓸모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네가 금우찬이라는 이름을 갖기를 바랐는데.”

“저도 그러기를 바랐습니다. 이런 건……, 이런 건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어서…….”

“허나 이제 너도 알아차렸겠지?”

“…….”

“이 이름이 누구의 것인지.”

이설은 지금 기쁠까 아니면 괴로울까.

“말해, 연이설.”

“…….”

“네가 누구의 이름을 가졌는지 말해 봐.”

아직 혼란으로 가득 찬 눈동자에 서서히 초점이 생기며 우찬에게 정면으로 향했다. 질문 뒤 한참 만에야 떨어지는 입술은 느리게 움직이지만 주저하지 않는다.

“이건 폐하의 것. ……금우찬의 다른 이름.”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 느껴지는 희미한 환희에 내내 불안하게 뒤엉켰던 감정들이 아래로 완전히 꺼져 사라졌다.

서서히 양쪽으로 말리는 입꼬리가 만들어 낸 기다란 호선이 그 어느 때보다도 길게 위로 뻗어 올라갔다. 환하게 웃는 우찬이 팔을 벌려 이설을 끌어당기기도 전에 이설이 상체를 던지듯 우찬에게 뛰어들었다.

안겨 든 이설이 목에 매달려 몸을 밀착시키는 것과 동시에 밀려오는 벅찬 감격이 환락의 절정으로 치솟았다. 이설과 닿는 그 순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환희를 끌어안은 듯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있는 힘껏 매달리는 이설의 간절함이 뼛속 깊이 느껴졌다.

“이 이름이 폐하의 것, 정말 폐하의 것이 맞습니까?”

“응 내 것이다. 네가 가진 이름은 내 것이야. 내 이름이다. 내가 너의 소휘랑이고, 금우찬이야.”

“폐하.”

부르르 떨리는 몸을 더 세게 끌어안으며 우찬도 이설의 어깨 위에 고개를 묻었다. 느끼지 못한 새에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은 왼쪽 손목을 보며 생에 처음으로 고마움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이설은 울지 않았지만 내내 몸을 떨었고 우찬은 말없이 어깨만 토닥여 주었다. 그걸로도 두 사람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차츰 마음이 진정된 이설이 어깨를 살며시 떼고 고개를 들었다. 울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눈 끝에 고인 눈물이 방금 생겨난 것이었다. 기쁨과 설렘이 잠시 가라앉은 두 눈에 그다지 반기지 않는 것이 찾아들었다.

“그럼 저는 왜, ……저는 무엇을 위해……,”

역시나 우려했던 대로 후폭풍처럼 찾아온 회한이 이설을 집어삼켰다. 두 사람이 그토록 바랐던 서로의 운명에 묶인 것보다 그간 행했던 일들에 대한 후회가 밀려온 것이다.

이설이 도국 양화성에 도착한 직후부터 바로 직전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돌이켜 보자면 두루마리 한 필을 양쪽으로 메워도 끝이 없다. 무엇을 위해 이설이 그동안 수없이 고난을 겪었는지 우찬은 도무지 위로하고 변명해 줄 방법이 없었다.

“폐하께 그런 짓을 벌인 것입니까?”

“내게 그런 짓이라니?”

“폐하의 마음을 부정하고, 궁을 나가게 해 달라 빌고, 옥체에 상처를 입히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 이곳에……, 폐하? 이게 왜 지금……?”

의도치 않게 우찬의 옆구리에 손을 갖다 대며 중얼거리던 이설이 그 순간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 와중에 자신이 겪은 고생은 생각도 안 하고 남의 일부터 걱정하기 시작하는 순진해 빠진 마음 씀씀이에 허탈해지는 것도 잠시. 우찬은 이설의 손이 닿자 심하게 욱신거리기 시작하는 통증에 본의 아니게 눈을 찌푸렸다.

“별일 아니다.”

“별일 아닌 게 아니라, 피가……!”

“신경 쓰지 말고 이리,”

“설마 내내 이 상태로 계셨던 겁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설이 우찬의 말을 끊고 손바닥을 펼쳐 내려다봤다. 하얀 손을 적신 검붉은 피가 제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연이설과 혈흔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것인지 그동안 너무 많은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쉬이, 목 상한다. 큰 소리 내지 말고.”

“혹시 제가 아까 발로 걷어찼던 것이……?”

놀라 사색이 된 얼굴이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태의를 업고 뛰어올 것처럼 다급해졌다. 걷지도 못하는 것이 침상 위에서 허둥지둥 대는 꼴이 우습게도 심히 사랑스러워 팔을 당겼다. 기력이 급격히 떨어져 겨우 이설을 붙들어 당기는 데에도 힘에 부쳤다.

“피를 많이 흘렸어.”

“태의를 불러오겠습니다!”

“곧 정신을 잃을 거다.”

“폐하!”

“잠시 안 보이는 동안 도망가지 않는다고 약조하거라.”

금방이라도 몸이 옆으로 넘어갈 것처럼 기울어지자 이설이 황급히 어깨를 받쳤다. 그러다 옆구리에 손이 닿자 화들짝 놀라 우찬의 머리를 어깨에 받쳤다. 우찬은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무력함을 이설 앞에서 드러내는 것에 일말의 부끄러움도 들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이설이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아 토닥이는 손길에 안정감을 느꼈다.

“도망가지 않습니다. 이제 아무 데도 가지 않아요. 발목에 인장은 주종 관계의 증표이지 않습니까? 제가 폐하께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넌 내 종이 아니라,”

속사포로 속삭이는 말의 어폐를 느낀 우찬이 지적하려고 했으나 이설이 한발 먼저 밖에 사람들 불렀다. 날카롭게 갈라지는 쉰 목소리로 밖에 아무도 없느냐며 소리치는 게 답지 않게 우렁차 웃고 싶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폐하, 다시 눈을 뜨셨을 때는…….”

이설의 목소리와 맞물려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작 중요한 뒷말은 듣지 못한 채로 우찬은 서서히 수면 밑으로 가라앉듯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잃기 직전 들었던 생각은 어이없게도 비가 그쳤으니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워도 이설이 사라지는 일은 없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

”얼굴 좀 펴세요, 윤 내관. 이러다 윤 내관이 먼저 숨넘어가겠습니다.“

“폐하만 무사히 일어나실 수 있다면 다 늙은 이 노인네 숨넘어가는 게 문제겠습니까? 비 승상?”

“윤 내관 하나 숨넘어가는 걸로 폐하께서 쾌차하신다면 제가 그 숨, 제가 몇 번이고 넘겨드리겠습니다.”

“거, 말 좀 곱게 합시다, 흑영.”

“세 분 모두 이만 조용히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마마,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옆 빈방으로 안내해 드릴 테니 한숨이라도 주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

“소의 마마?”

가볍게 어깨에 닿는 누군가의 손에 놀라 뒤를 돌아봤다. 움츠린 어깨 뒤로 소운이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뒤로 윤 내관과 차란, 흑영이 제각각 자기만의 걱정을 표현하는 얼굴로 나란히 서 있었다.

“부축해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폐하 곁에는 제가 남아 있을 테니 네 분은 이만 나가 보셔도 좋습니다.”

“태의 말로는 독한 약을 썼다 합니다. 내일 아침까지는 일어나지 않으실 테니 여긴 아랫것들에게 맡기시고 이만 들어가 쉬십시오. 옥안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나긋하지만 강경한 말투로 설득하려는 소운은 물러날 기세가 없는 듯했다. 어지간하면 소운에게는 고집을 부리지 않는 이설이지만 이번에는 어림도 없다는 듯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괜히 아픈 모습을 보였다가는 억지로라도 질질 끌려 나갈 것만 같았다. 이 자리에 누구도 자신을 그런 식으로 다를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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