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76화
훌쩍이는 소리가 간신히 잦아들었다. 우찬은 맨발바닥에 입술을 붙였다 뗐다 하며 발을 간지럽혔다. 별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도 혀끝으로 발가락을 살짝 핥자 발가락을 오므라뜨리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지극히 이설다운 반응이라 웃음이 나오려던 걸 참았다.
“그만 울어야지.”
조곤조곤 달래는 목소리에 겨우 울음을 멈춘 이설은 아직 걱정스러운 얼굴로 발을 내려다봤다. 겨우 허락은 하겠지만 여전히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이 분명하다.
“보시거든 저한테는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정말 궁금하지 않아?”
“예. 절대 알고 싶지 않습니다.”
시시각각 태도가 바뀌는 모습을 기특하게 지켜봤지만 우찬도 착잡한 마음을 숨기느라 곤욕스러웠다. 보자마자 불같이 화를 내 이설을 또 불안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제 것이 아닌 남의 이름이 쓰여 있는 이설의 발목 위에 아무렇지 않게 이렇게 입 맞출 수 있을까.
“알았다. 그럼 그대로 고개 돌리고 있거라.”
이설은 그대로 엎드려 팔에 얼굴을 묻었다. 팔이 덜덜 떨리는 게 눈으로 확연히 보여 무척 안타까웠다.
살에 닿지 않게 조심스럽게 쥐었던 발목을 드디어 눈앞에 가져다 놨다. 얼핏 붉게 번진 자국들이 다 인두로 살을 지져 난 상처인 걸 깨닫고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얼마나 아팠을까. 우찬이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고통이지만 인두로 몸을 지지는 고신은 흔히 보았다. 생살이 녹아 들어가는 끔찍한 냄새가 어디선가 나는 듯했다.
다행히 불에 완전히 뜨겁게 달궜던 인두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그렇다고 위안이 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우찬은 미련한 결심을 한 이설을 탓하기 이전에 자신부터 돌아봐야 했다.
이설에게 더 많이 다정하게 대해 줬어야 했다는 후회가 한꺼번에 밀려 들어와 괴롭다. 하지만 이설이 겪었던 고생과 상처에 상응하는 대가라고 여기며 겸허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손을 떼며 우찬이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흰 종이에 묽게 탄 붉은 염료가 번진 것처럼 불에 덴 상처가 넓게 퍼져 있었다. 이런 줄도 모르고 조심히 다르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는 동시에 붉게 데인 피부 위에 선명히 남아있는 이름을 보았다.
“……보셨습니까?”
조용히 물어보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사부작거리며 발목을 만져대던 우찬이 조용해지자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모양이었다. 다만 이름을 궁금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우찬의 기분을 살피는 것만이 이설의 관심사였다.
“폐하.”
이설이 찔끔 고개를 돌려 우찬을 바라봤다. 우찬은 가만히 발목 위에 이름을 눈에 새겨 넣을 듯 뚫어져라 쳐다봤다.
도대체 왜.
“폐하, 보셨습니까?”
우찬은 들은 척도 않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대답을……,”
“보고 있다.”
깊숙하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감정 없이 대답했다. 이설이 고개의 각도를 뒤로 더 돌렸고 우찬은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려 인상을 찌푸렸다.
어떤 표정을 짓는 게 맞는 기분일지 모를 만큼 뒤섞인 감정들을 갈무리하지 못한 채로 정신이 번뜩 들었다.
“읽으실 수 있는 글자입니까?”
“…….”
“폐하.”
“읽을 수 있지. 읽을 수 있고말고.”
우찬이 가볍게 실소하며 이름 위에 손이 닿을 말듯 가까이 쓸었다. 이설이 움찔하며 본능적으로 다리를 움츠려들려고 하자 발바닥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다시 한번 터지는 실소를 이번에는 참아 삼켜 표정을 감췄다. 제 발목이 아니라 우찬의 얼굴을 살피는 이설은 점점 사색이 되어 갔다.
“생각이 바뀌었어? 내가 읽을 수 있다 하니 너도 알고 싶으냐.”
“아뇨. 아닙니다. 말씀하지 마세요.”
이설이 도리질을 치며 양쪽 귀를 손바닥으로 막았다. 베개 위로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달빛을 받았으면 한껏 예쁘게 빛났을 은사들을 보며 우찬은 무심결에 창밖을 내다봤다. 눈치채지도 못한 새에 비가 거의 그쳐 가는 중이었다. 처마와 흙바닥을 귀 따갑게 때리는 빗소리가 아까보다 훨씬 사그라졌다.
베개에 얼굴을 연방 비비던 이설이 숨을 짧게 헐떡이며 우찬을 봤다. 눈이 마주치자 피식 웃는 우찬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넋 놓고 지켜보다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화내지 않으시는 겁니까?”
“화를 내야 하나?”
“실은,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네 탓을 하지 않겠다고 약조하지 않았어?”
“그래도…….”
“왜? 내가 이자를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기를 바라기라도 하느냐? 얼굴을 보니 딱 그런 표정인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설이 고개를 흔들자 머리카락이 좌우로 흔들렸다. 버릇처럼 손가락으로 빗어 내려 주려는데 발목을 잡고서는 거기까지 손이 닿지 않아 관뒀다.
우찬은 이설의 붉게 상처 난 살갗을 피해 발등 쪽으로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야릇한 소리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았다.
우찬의 행동이 예상 밖이었는지 이설은 혼자 안절부절못하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지만 우찬은 신기한 건지 화가 난 건지 아니면 기분이 좋은 건지 모를 정도로 애매한 표정으로 계속 발목의 이름과 이설의 얼굴을 번갈아 들여다봤다.
“이 글자를 본 적이 없어?”
“예.”
“정말 없어?”
“예 한 번도 없습니다. 맨 앞글자만 유추해 보기를 아마…….”
“말해 보거라.”
이설은 틀릴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내뱉은 말이 진짜일까 봐 고민하는 것이다. 마치 저 이름을 자신이 아는 것이 금기라도 된 것처럼 아예 눈에도, 머리에도 담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쓰는 게 보였다.
“말해 보래도.”
“아마 그, ……소 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처음 보는 글자이긴 하지만 획의 배열을 규칙적으로 바꿔 보면 오늘날 글자와 비슷해 보여서…….”
“글공부를 아주 허투루 배운 건 아닌가 보구나.”
우찬이 이설의 엄지발가락을 앞니로 살짝 깨물었다 놓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반응이었는지 이설은 발버둥 치는 것도 잊고 멍하니 눈동자만 고정했다.
발목의 이름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우찬이 다시 피식 실소를 내뱉었다. 확실한 건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화를 내야 한다면 그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도대체 누굴 겨냥하여 화를 낸단 말인가. 책임질 자가 아무도 없었다.
굳이 따진다면 오래 전 죽은 그의 생모나 퀴퀴한 전통을 중시하는 윤 내관, 그리고 소운 정도? ……아니다, 소운에게는 책임이 없다.
“앞글자는 소 자를 쓴 것이 맞다. 지금은 사라진 글자긴 하지만.”
“궁금하지 않으니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헌데 생각해 보거라, 설아.”
우찬이 잡았던 발을 아래로 조심히 내려놓고 이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사라진 글자이지 않으냐. 죽은 글자를 성 씨로 삼는 가문은 없어.”
“예?”
“소 가 성을 가진 집안은 없다는 뜻이다.”
오랜만에 맹한 얼굴을 한 채로 예, 하고 되묻는 얼굴이 반가웠다. 눌러 붙은 눈물 자국을 엄지로 닦아 내어 주면서 우찬이 빙그레 웃었다.
“저건 아명이다.”
“…….”
“고대부터 금은 귀한 아이가 태어나면 아명을 먼저 적어 천지명관에 적을 올렸어. 그 뒤 정명(定名:남자가 성년이 되어 관례를 지낼 때에 아명 대신 정한 본명)이 정하여지면 정명을 함께 올렸고. 그런데 요즘은 정명을 짓기 위해 굳이 성년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 그래서 아명을 입적하는 일이 없어졌다.”
우찬은 문득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지는, 하지만 헤아려 보면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우장절의 어느 날 수신에 관련된 설화를 이설에게 설명해 줬던 때가 생각이 났다. 그때도 지금처럼 비가 내렸다는 것만 빼면 사실 비슷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설은 아직 맹한 얼굴로 우찬의 얘기를 귀담아듣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그런 고리타분한 전통을 따르는 이들이 있어. 아명을 입적시키는 데에 아무리 세금을 부과해도 기어코 그리하고 말지.”
더 이상 눈물은 흐르지 않지만 아직 울음기가 남아 있는 이설이 코를 한 번 훌쩍였다. 애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쳐다보는 우찬을, 이설은 창피한 건지 미운 건지 먼저 고개를 돌려 피했다. 우찬은 먼저 고개를 돌렸다며 화를 내는 대신 볼을 살살 쓸어내렸다.
“마치 내 어마마마처럼 말이야.”
고개보다 먼저 움직인 진회색 눈동자가 우찬을 향했다. 무슨 말씀을 하는 것이냐고 묻는 두 눈은 아직 무지와 수심만이 가득했다.
“저는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해 주시면 안 될까요?”
“네 발목에 써 있는 이름은,”
“싫습니다! 듣고 싶지 않아요.”
듣기 싫은 이름을 듣게 될까 봐 이설이 황급히 귀를 가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 가까운 거리라면 말한다고 못 들을 리가 없는 데도 어린아이처럼 고집을 부리는 이설이 귀여운 한편 저 절실함에 애가 탔다.
“들어야 해.”
억지로 팔을 내린 우찬은 짐짓 심각한 표정을 했지만 금세 풀어진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이설은 이제 모든 걸 자포자기한 듯 미간을 오므라뜨리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남은 두 글자는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도 쓰지 못하는 금지된 글자다.”
헤 벌어진 입을 보니 듣기는 하는 것 같지만 이해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우찬은 저쪽으로 내팽개쳐진 이설의 다리를 안쪽으로 접어 이설이 내려다볼 수 있도록 했다. 읽어 보라는 듯 눈짓을 하자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읽기로는 빛날 휘(煇)와 늑대 랑(狼)을 쓰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이설은 그렇게 거부의 의사를 밝혔음에도 결국 그 이름을 알게 됐다는 게 분하고 견딜 수 없는지 이를 악물고 눈을 돌렸다.
“누구의 아명인지 궁금하지 않아?”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폐하 저는 정말 이 이름의 주인 따위 알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름을 지울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테니 제발,”
“설아, 생각을 해 보라고 했잖아.”
이리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니 한 치 앞만 내다봐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답답한 것이 사실이나 사실 지금에 와서 크게 문제가 될 것도 없다.
“왜 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글자 두 개가 네가 본 모든 서책에서 지워진 금지된 글자가 되어 넌 볼 수조차 없었는지. 그런 글자를 아명으로 가진 이가 누구인지.”
“…….”
“결국 네가 스스로 찾아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