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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75)화 (275/300)

달의 황홀경

275화

코끝이 벌게질 때까지 울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고집 사납게 올라선 눈이 못마땅한 듯 올려다봤다. 눈물을 닦아 주려 손을 들었다가 표정이 어처구니가 없어 짧은 숨과 함께 내렸다. 이설은 곧 죽어도 자기가 잘못했다는 얼굴은 아니었다.

“폐하도 제 몸에 다른 이름이 남아 있는 건 원치 않으시잖습니까.”

“…….”

“아픈 건 잠깐입니다.”

생각 많아 보이는 얼굴로 침묵하는 우찬의 속마음을 속단한 이설이 달래듯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걸로도 모자란다고 생각했는지 우찬의 볼 바깥쪽에 손바닥을 대고 감쌌다. 온기에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지금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안심시키는 거지.

눈살을 찌푸린 우찬이 얼굴에 닿은 손을 조심스레 떼어 냈다.

“내가 원치 않는 것과 네가 아픈 걸 비교할 수는 없다.”

“폐하의 마음이 더 중하니까요.”

“그것과 반대지.”

“저한테는 이게 맞습니다.”

어디서 이런 고집을 얻어 왔을까 혀를 한 번 찼다가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설이 이름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것은 자신의 탓이다. 이설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었다. 순전히 이설이 멋대로 오해한 것이긴 해도 애초에 귀비를 궁에 들이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슬금슬금 들기 시작했다. 귀비의 존재 자체가 이설로서는 불안의 씨앗을 틔우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어차피 폐하께서 자를 발목이 아니었습니까?”

심각한 눈빛으로 되묻는 얼굴이 농담이나 비꼬려는 게 아니었다. 하기야 그럴 위인이 못되지 연이설은.

그나마 부드럽게 풀려 있던 얼굴 근육이 움찔하며 굳는 게 느껴졌다.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 보고 있던 이설도 눈치 못 챌 리가 없었다. 입을 다부지게 다물고 말을 멈췄지만 실언하였다며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이 역시 이설을 탓할 수도 없고 우찬이야말로 몇 번이나 뱉은 말을 도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복잡한 마음에 뼈가 도드라진 손목만 연신 쓰다듬고 있으니 이설이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만일 폐하께서 정말 제 발목을 자르셨다고 해도 많이 원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를 많이 원망하지 않았을 거라고?”

“예.”

“착한 것도 정도껏 하거라, 설아. 멀쩡한 발을 잘라 불구를 만들었는데 나를 평생 미워하고 저주해야지.”

“그렇게 해서라도 폐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그다지 개의치 않을 것 같습니다.”

크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대답하는 이설은 정말 그런 게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무덤덤했다.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 폐하가 저를 많이 미워하시는 것 같아 비참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지금은 어떤데.”

“그냥…….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제가 미워 그리 말씀하신 건 아닌 것 같아요. 저도 제가 맞는지, 이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한바탕 소란을 떨고 나더니 머리가 좀 영특해지기라도 한 모양이다.”

검지 끝으로 정수리를 톡톡 두드렸다. 살짝 장난기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는 것을 직후에 알았다. 기분이 이리 변덕스러워서야 되겠나 싶으면서도 입가에 스미는 웃음을 억지로 지우지는 않았다.

이설과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놀란 듯 벌어진 입술에 손가락을 넣으며 왜, 하고 묻자 도리질을 하며 손가락을 뺐다. 우찬은 좀 더 장난을 쳐보고 싶었지만 참고 눈썹만 위로 들었다 놨다.

“농 좀 한 것 가지고 삐치기는.”

“삐친 게 아니라 그냥 좀,”

“그냥 좀?”

“옛날 생각이 나서 좋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해서요.”

“좋으면 좋은 거지 이상하기는 뭐가 이상해.”

가볍게 웃어넘기는 말이었지만 우찬도 이설이 무슨 기억을 떠올렸는지 어림짐작은 됐다. 이설에게 스스럼없이 농을 하던 때가 있었다. 이설의 말과는 달리 옛날 일도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이설이 입궁한 뒤로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폐하께서 절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농을 하시는 게 농 같지가 않고, 뼈 있는 말처럼 들렸어요.”

“지금은 아니라는 걸 알겠느냐?”

“그때와는 뭔가 다른 것 같습니다. 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기분이 이상해요.”

이설이 꼬물거리며 몸을 가까이 붙였다. 갑자기 왜 이렇게 어린애처럼 구는 건지 모르겠다가도 혼란스러운 얼굴을 보니 더는 묻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생각이 복잡하게 뒤엉킨 얼굴이다. 영특해진 건 둘째 치고 여전히 조막만 한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그리 바삐 하는지 모르겠다.

안정감 있게 안아 주려고 팔로 안아 들었다가 젖은 옷이라는 걸 깨닫고 슬쩍 밀어냈다.

“젖었다.”

“그러게요. 왜 이리 젖으셨습니까?”

“다 너 때문이니 타박할 생각 말거라.”

누가 들어도 빈말인 것을 이설은 또 한껏 진지하게 받아들여 시무룩해졌다. 아랫입술이 불퉁하게 튀어나온 모습을 보니 이설이 말한 옛날 생각이란 게 이런 것인가 싶다. 뱃속에 불씨가 켜진 듯 뜨겁게 부풀어 오르는 열기를 밖으로 뱉으며 이설의 손을 꽉 잡았다.

눈, 코, 입은 물론 볼에 난 보송한 솜털 하나까지도 뜯어보던 우찬은 역시 눈에 거슬리기 짝이 없는 발목으로 시선을 보냈다. 웃음기 있던 입이 일자로 굳게 닫혔다.

“아무튼 이름은 일단 그리 두어라.”

“싫습니다.”

녹진하게 녹아내리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은 듯 서늘해졌다. 시무룩한 얼굴로 입술을 움직이던 이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단호하게 대답하며 우찬의 손을 치워 냈다. 다른 뜻은 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는지 대신 이마를 어깨 가까이에 기댔다.

“이 이름을 가진 채로는 단 하루도 살고 싶지 않아요.”

이렇게 단호하니 마냥 기특하다가도 저 고집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싶다.

게다가 우찬이라고 이설의 몸에 새겨진 다른 이름을 가만히 두고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설보다는 몇 곱절로 없애고 싶을 거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백성들이 목숨을 내놓고 큰돈을 들이며 법을 어기면서까지 시술을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안 돼. 네 몸에 그런 짓을 두 번 할 수는 없어.”

“처음이 어려웠지 두 번째는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안 된다고 대체 몇 번을 말하느냐.”

“……”

“그런 표정 지어봐야 방법은 없을 거다. 앞으로 네가 혼자 있을 일은 없을 테니 허튼수작도 부리지 못하겠지.”

“제 몸에 난 이름이니,”

“고집 그만 부리고 난 이 이름부터 확인해 봐야겠어.”

“폐하!”

거의 벗겨지기 일보 직전인 버선을 한 번에 잡아 벗기고 난 뒤 한 박자 늦게 이설이 몸을 튕겨 올라왔지만 우찬이 한 팔로 끌어안아 막았다.

“처리를 어떻게 할지는 나중 문제더라도 찾아보기는 해야지.”

“지우면 그만일 이름입니다. 처음부터 없었던 셈 치고 한 번만 모른 척 넘어가 주세요.”

“두 번 다시 네 몸에 칼을 대는 일은 없게 할 것이다. 인연을 끊는 방법은 더 알아볼 테니 일단 난 이자의 이름부터 봐야겠다. 네가 보기에는 사내인 것 같더냐 아니면 여인인 것 같더냐?”

종아리를 잡아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하고 웃는 낯으로 물지만 웃을 기분은 아니었다. 이설도 그걸 아니 더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한 손에 감기는 종아리에 살집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엉덩이는 나름 봉긋하게 살이 토실토실하더니 지금은 몸 어느 구석을 뒤져봐도 살집 잡히는 곳이 없었다.

“모릅니다. 읽을 수 없는 이름이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정말 찾지 않았어?”

“예.”

“궁금하지도 않고?”

“전혀요.”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 즉각 대답하는 이설이 어여뻐 죽겠는 건 죽겠는 거고, 봐야 할 이름은 봐야 했다.

사내일까? 여인일까? 어느 쪽이든 참지 못할 것이다.

“설에 네가 천자 공부를 게을리한 게 이리 잘한 일일 줄이야.”

안간힘을 쓰고 우찬에게서 벗어나 발을 감추려던 이설은 느닷없이 피식 웃는 우찬을 보고 황당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완전히 처음 보는 글자였습니다. 기억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아예 처음 보는 글자요. 소운 님이 주신 서책에서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거겠지.”

“아닙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어쩌면 아예 사라진 글자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고대 때부터 남아 있는 천자는 원래 수의 반도 되지 않는다 들었습니다.”

“쓸데없는 건 잘 기억하고 있구나.”

“차라리 지금은 사라진 글자였으면 좋겠습니다.”

발버둥 조금 쳤다고 금세 체력이 동이 난 이설이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우찬은 그것도 꽤 괜찮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다고 이름의 주인이 없는 것은 아니니 결국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금국의 귀족 이상 되는 이들과 비교했을 때 이설이 천자를 많이 모르는 것은 사실이나 일반 백성들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설조차 모르는 글자를 이름으로 삼았다면 어디 빈민가에 굴러다니는 천민은 아닐 터. 평민이라고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정말 어디 다른 나라의 왕족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렇다고 이설을 뺏길 건 아니지만 혹시라도 일이 복잡해져 이설이 마음고생하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불안해졌다.

“제발 보지 마세요, 폐하. 정말 싫습니다.”

울먹이며 옷깃을 잡은 이설이 손을 떨었다. 애잔해도 어쩔 수 없다.

“괜찮아. 너를 탓하지 않을 거다.”

“저 역시 폐하께서 가지신 이름을 한 번도 보지 않았잖습니까?”

“이건 네 것이다. 네 이름이야.”

말로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이설은 눈빛만으로도 이건 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해졌지만 거의 포기 상태에 이르렀는지 몸이 축 늘어졌다. 잘 추슬러 바닥에 내려놓은 뒤 발에 감긴 천을 풀기 시작했다. 얼마나 꽁꽁 두껍게 감아 놨는지 풀어진 긴 천이 수북이 쌓였다.

“그 아래 무슨 이름을 보셔도 저를 계속…….”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이설은 엎드려 팔에 얼굴을 묻었다. 무슨 말을 듣기를 바라는지 눈치챈 우찬은 천을 완전히 벗겨 낸 발을 감싸며 말했다.

“계속 은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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