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73화
“딱 한 번만.”
눈물에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꺼풀이 올라섰다.
“아무것도 묻지 마시고 제발 딱 한 번만 제가 부탁드리는 대로 해주시면 안 됩니까?”
“이대로 너를 내버려 두고 물러나 꼬박 하루를 기다려 달라니 이젠 네 말이 우습지도 않아. 내가 너를 어찌 믿고? 대체 그 하루 동안 네가 도망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길래 이리 고집을 부리지? 그리고 이름을 지우다니 이것부터 설명해.”
우찬이 고개를 돌려 발을 봤다. 혹시나 하는 이상한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금세 사라져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도망 같은 건 치지 않을 겁니다. 폐하 저는 정말 진심으로 폐하 곁에…….”
차마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하고 우는 이설에게 마냥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어떤 목적을 가진 간교한 술수일까 의심이 드는 한편, 이렇게까지 마음을 주저 없이 내던지는 이설은 처음이라 거짓인 걸 알면서도 들리는 대로 모두 믿고 싶어 마음이 흔들렸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힘이 다 빠진 몸이 제대로 앉지를 못하고 우찬의 앞으로 기울었다. 본능적으로 이설을 받쳐 안은 우찬은 냉랭한 표정은 그대로 두고 버릇처럼 이설의 몸을 안아 등을 쓸었다. 그러자 곧 숨을 헐떡이며 울어 젖히던 이설의 울음소리와 몸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이렇게 자신에게 완전하게 길들여진 몸에 다른 사람의 이름이라니. 바득바득 갈리는 어금니를 꽉 다물자 귀밑 턱이 딱딱하게 굳었다.
“폐하.”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도 않은 목소리가 귓가에 흩어졌다. 우찬이 조심스레 이설의 어깨를 밀었다. 다 운 줄 알았는데 아직도 얄팍하게 오르내리는 가슴으로 이설은 간헐적으로 터지는 울음을 참았다.
“제가 만약 제 손으로 직접 제 인연의 끈을 잘라 낸다면 저를 용서하실 건가요?”
“용서라니 무슨.”
이설의 말 전체가 전부 기이하여 무엇을 지적해 물어야 할지도 바로 생각나지 않았다. 이설에게 화가 난 것은 사실이나 그게 이설을 용서하고 말고의 문제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어쨌든 간에 이설은 궁에서 영영 나가지 못할 것이고, 사는 내내 제 눈 밖으로는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할 것은 물론 죽은 뒤까지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한번 끊어진 인연은 다시 이어 붙일 수 없으니 이 이름만 지운다면 저는 누구의 정인도 아닌 그냥 저입니다. 얼굴도 모르는 이름의 주인과는 완전히 남이 될 것입니다.”
“네가 또 간사한 말로 나를 홀리려 하는구나.”
“하늘이 점지해 준 폐하의 인연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다른 정인을 가진 건 아닐 테니 그때는 폐하 곁에 있어도 된다 말해 주세요.”
하얀 손가락이 우찬의 옷가지를 붙잡았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가 주문처럼 귓가에 번져 심장을 옭아맸다. 일부러 단내 나는 말을 골라 하는 것 같은 이설을 경계하며 바라봤지만 이내 속절없이 무너졌다.
“후에 폐하께서 저도 귀비도 아닌 진짜 정인 연이설을 데려오신다 하여도 못 본 척, 못 들은 척 그리 살겠습니다. 폐하 저를 제발 궁 밖으로 내치지만 말아 주세요.”
물기 어른 눈으로 올려다보는 얼굴이 새삼 애처로웠다. 눈물을 흘린 건지 밖에 나가 비를 맞고 온 건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젖은 얼굴은 온갖 괴로움을 참고 애원하고 있었다.
의복 자락을 힘없이 붙들고 있는 손이 미약하게 우찬을 당겼다. 여태껏 자기를 안아 달라고 졸라 본 적 없는 이설이었지만, 우찬은 이게 지금 그런 신호라는 걸 알면서도 이설에게 손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미동도 않는 우찬을 놓지 않고, 이설은 한층 더 일그러진 표정으로 울음을 한 번 참았다.
“이름은 기필코 지우겠습니다. 살을 도려내야 한다면 도려낼 것이고, 다시 불로 지져야 한다면 몇 번이고 그렇게 할 테니,”
“다시 불로 지지다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
“이미 몇 번이나 물었어. 이름을 지운다는 게 무슨 의미지?”
맥없이 풀리는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무섭게 몰아붙이며 묻는 까만 눈을 피하며 이설이 입술을 씹었다. 연이설, 하고 재촉하는 목소리에 대답이 울컥 터졌다.
“지우려고 했습니다. 무슨 방법이라도 좋으니 지울 수만 있다면 어디서든, 어떻게든 지우려고 했어요. 그래서 폐하를 피해 도망친 것입니다. 이 상태로는 폐하를 만날 수가 없어서 일단 이름만이라도 지우고…….”
몸이 다시 빗속에 내던져진 것 같다. 정수리로 내리꽂히는 차가운 빗물이 살을 파고들어 몸의 열기를 완전히 빼앗는 것처럼 체온이 식었다. 정신이 반쯤 나간 이설이 횡설수설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건지 아니면 제 머리가 이설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멍하니 젖은 눈만 쳐다보자 이설은 숨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도국에는 정말 이름을 지우러 간 것입니다. 이름의 주인은 본 적도, 찾은 적도 없습니다.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믿어 주세요, 제발.”
“……그래서 이름은.”
우는 이설에게 홀린 건지 이설이 하는 말에 홀린 건지 잠시 멍하게 있던 우찬이 한 음 낮게 물었다. 이설이 발을 움찔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도국에서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궁에 돌아온 뒤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하루만, 딱 하루면 됩니다!”
“이번에는 잘할 수 있다니 대체 네 몸에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이 방법 말고는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말해. 네 몸에 무슨 짓을 한 건지 당장 말해!”
어렴풋이 대답을 예상한 우찬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설의 얼굴과 널브러진 왼쪽 발을 번갈아 쳐다봤다. 흥분한 우찬의 고함 소리에도 이설은 동요하지 않았다.
조금 전 절뚝이던 다리가, 손만 닿아도 아파하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목욕을 하다 미끄러져 발목을 접질린 게 아니야. 이름을 숨기려고 아픈 척을 한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네가 직접 한 짓이었어. ……그렇지?”
“그것 말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하여 네 손으로 직접 그 이름을 지우려고 했어? 네 몸에 상처를 내서?”
“인두로 지져 살을 녹이면 없앨 수,”
“연이설!”
별안간 소리를 치며 어깨를 쥐어도 이설은 놀란 기색 없이 침착했다. 자신을 쫓아내지 말아 달라며, 곁에 있고 싶다 할 때는 죽어 가는 이를 살려 달라 애원하는 사람처럼 그리 애절하더니, 제 몸을 인두로 지져 살을 녹였다는 얘기를 할 때는 남의 얘기 하듯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오히려 이설은 우찬이 마치 당연한 일에 역정이라도 내는 것처럼 원망하는 눈빛을 했다.
“이미 가진 이름은 억지로 지운다 해도 싫으십니까? 그럼 제가 어찌할까요?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발을 자를까요, 아니면 다리를 자를까요? 이름이 있었던 흔적조차 남지 않게 한다면 폐하 곁에 남아 있게 해 주실 건가요?”
“헛소리 집어치워 연이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입 다물어.”
“…….”
“네가 지금 하는 말에 일말의 거짓도 없다면, ……하아.”
우찬이 괴로운 듯 이마를 짚으며 얼굴을 숙였다. 자꾸 머리가 멍해진다 싶더라니, 이설 때문이 아니라 옆구리에서 피를 너무 많이 쏟아 정신이 아득해진 것이었다. 거기에 생각지도 않은 얘기들로 복잡해진 감정이 한데 뒤섞여 자꾸만 더운 숨이 나왔다.
“적어도 오늘 드린 얘기 중에 진심이 아닌 것은 없었습니다.”
태연한 척 말하고는 있지만, 속내는 타들어 가고 있을 이설이 눈물을 삼키는 소리가 바깥까지 들렸다.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내리며 얼굴을 들었다. 여태 눈치채지 못한 피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어처구니없게도 피 냄새에 머리가 환기라도 된 듯 정신이 들었다.
“나를 연모하느냐?”
갑작스레 묻는 말에 이설이 입술을 잘게 떨다가 대답했다.
“예.”
“이름을 지운 것도 나 때문일 테고.”
“…….”
“다른 사람의 이름을 갖게 됐다 사실대로 털어놓으면 내가 널 폐위시킬 거라 생각했으니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저 폐하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을 갖고 싶지 않았습니다. 설령 폐하께서 저를 지금 내치신다 해도……,”
이설은 그 사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슬픔을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숨을 짧게 끊어 들이마셨다가 뱉으며 눈물을 참았다. 우찬은 벌겋게 부어오른 눈을 한 이설이 문득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짙게 들었다.
“이름은 지울 것입니다.”
“살을 저미고 그 위를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는 짓거리를 또 하겠다고?”
“아니면 발을 자를까요?”
“연이설.”
슬쩍 웃는 미소가 곧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앉아 있을 힘도 없으면서 바닥에 손을 대고 기어와 우찬에게 바짝 가까워졌다. 그리고는 아까보다 조금 더 강하게 허리춤의 옷자락을 붙잡아 안았다. 처연하게 매달리는 모습이 안쓰러워 쳐다보자 이설이 몸을 더 가깝게 밀착시켰다. 안아 달라는 뜻인 줄 그제야 알아차렸다.
“원하시는 대로 뭐든 다 할 테니 옆에 있어도 괜찮다고만 말씀해 주세요. 폐하께서 저를 연모하시는 것이든, 연이설을 원하시는 것이든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복잡한 감정에 머리가 어지러운 이유를 깨달았다.
우찬은 이설에게 다른 사람의 이름이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동시에 이설이 이를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또한 이설이 그 이름을 지우기 위해 갖은 방법으로 애를 쓰는 사실이 기특한 동시에 여태껏 혼자 겪었을 고통을 통감하며 죄책감에 괴로웠다.
자신의 품에 안기고 싶어 옷을 붙들어 당기면서 혹 내쳐질까 두려워 벌벌 떠는 이 작은 것이 저를 연모한다며 울었다.
머리에 날아 꽂히는 생각이 확신으로 분명해지는 순간 창밖에 빗소리도, 천둥소리도 모두 멈췄다. 텅 빈 자리에 이설과 단둘만 남아 있는 것처럼 둘 외에 모든 것은 뿌연 안개처럼 희미해졌다.
“계속 저를 은애해 주세요, 폐하.”
힘주어 옷을 당기는 이설을 역으로 당겨 끌어안았다. 다소 거칠었던 손길에 이설은 펄럭이는 종잇장처럼 날아와 몸에 달라붙었다. 아직 옷이 다 마르지 않은 탓에 이설의 몸이 젖을까 염려했지만 이설은 개의치 않는 듯 우찬의 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목을 휘감은 마른 팔이 세게, 더 세게 목을 끌어당기자 우찬은 이설의 허리를 들어 올려 다리 위에 앉혔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 숨을 들이마시자 익숙한 향기가 났다. 오랜 버릇처럼 무심결에 하얀 살 위에 입술을 대고 이로 긁어 살짝 물자 이설은 야릇한 신음으로 답했지만 이전처럼 부끄러워 몸을 밀어내는 대신 목을 더 바짝 끌어안았다.
“제발, ……애한다고, 말씀……,”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이설이 자꾸만 같은 말을 속삭였다. 우찬은 그게 무슨 말인지 금세 알아들었지만 대꾸도 하지 않고 이설의 마른 등만 줄곧 쓰다듬었다. 불거진 날개 뼈가 도드라지게 느껴질 만큼 마른 몸에 마음이 아픈 한편, 애정을 갈구하는 이설을 품에 안은 희열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