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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71)화 (271/300)

달의 황홀경

271화

미련 없이 손을 놓아준 뒤에도 이설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작게 벌어진 입술이 까슬하게 올라와 건조하게 마른 티가 났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나마 정신을 좀 차렸는지 이설이 후다닥 뒤로 물러나 머리맡 벽으로 도망쳤다. 한 걸음도 채 되지 않는 거리를 벌리면서도 왼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베개에 머리를 부딪치며 고꾸라지기까지 했다. 그 동선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우찬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어딜 그렇게 가.”

“…….”

“왜 그런 표정인 거지? 그럼 내가 더 의심할 수밖에 없잖아.”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예의 그 순하고 멍한 눈으로 쳐다봤더라면 과한 오해였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학사 놈 혀에 휘둘려 앞뒤 분간도 못 한 어리석은 자신을 자책하며 뒤돌아 나왔을지도.

“그냥 모르겠다고 해. 내가 갑자기 왜 찾아왔는지, 모르겠다고. 그렇게 말해 어서.”

낮고 평이한 목소리로 읊조리며 우찬이 조용히 뇌까렸다. 사납게 노려보는 눈길에 밀린 건지 이설은 겁먹은 눈을 깜빡이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일말의 변명의 여지도 없어 보이는 눈동자에 도리어 화가 치솟았다. 손을 뻗어 반대편 발을 낚아채려는 순간 이설이 재빨리 발을 감추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서 잡아떼는 솜씨가 형편없었다. 띄엄띄엄 말하는 단어마다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제 말이 별로 신뢰감 있게 들리지는 않을 거라는 걸 본인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말없이 이설만 바라보던 우찬이 붙잡으려던 발 대신 포단 한쪽 끝을 세게 말아 쥐었다. 이설은 이제 울먹이기 시작했지만 가까스로 울음만은 참으려는 듯 숨을 짧게 쉬었다.

“시키시는 대로 했으니 제발, ……그러니까 제발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세요.”

북받치는 울음을 참고서 겨우 한다는 소리에 돌연 화가 솟구쳤다. 필사적으로 가리는 왼발로 손을 뻗자 이설이 더는 물러날 곳도 없는 벽으로 몸을 붙였다.

“하루만. 딱 하루만 시간을 주세요.”

“무엇을 위한 시간이 필요한 건지 말한다면.”

안쪽으로 접어 가린 발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우찬이 날카롭게 말했다. 이설은 창백한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숨만 고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얼굴 쪽으로 시선을 옮겨간 우찬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확신에 차 물었다.

“아직 도망칠 궁리를 하는 거지?”

“…….”

“일부러 날 다치게 하고 멀리 떨어뜨려 놓아서 시간을 번 거였어. 그렇지?”

떨리는 손이 아래로 떨어지자 눈물이 차오른 커다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무구한 눈동자가, 이제야 진심 같았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네가 왜 그렇게까지 황궁으로 돌아오지 않으려고 애를 썼는지 무척 궁금했어.”

우찬이 침상 위에 발을 올려 올라갔다. 마치 바닥인 양 침상 위를 성큼성큼 걸어 이설의 코앞에 멈춰 서자 발 바로 아래 몸을 웅크린 이설이 평소보다 더 작고 연약해 보였다. 이설은 더는 뒤로 물러날 곳이 없어 벽에 몸을 붙였다.

“그래서 그럴듯한 이유 몇 가지를 생각해 봤는데,”

천천히 무릎을 구부려 앉았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우찬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이설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어리석게도 이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어.”

“…….”

“설마 네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가졌을 줄이야.”

우찬의 얼굴 위로 짧게 미소가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침 간헐적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있던 이설은 순간 누가 목을 조르기라도 한 것처럼 숨을 흡, 하고 짧게 마신 뒤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겁먹은 얼굴을 넘어서 백지장처럼 질린 낯빛과 굳은 입매를 보니 부질없는 오해가 아니었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닫게 해 주었다.

사실을 알게 되면 그나마 기분이 좀 풀릴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화가 진정되는 것에는 일말의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을 치려던 거였지?”

“그건……,”

“하여 만났느냐?”

얼빠진 얼굴을 하고 에,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든 이설의 말간 볼 위로 눈물이 뚝뚝 흘렀다. 한번 터진 눈물은 그때서부터 속절없이 줄줄 흘러내리는데, 이설은 닦을 생각도 못 하고 멍한 눈으로 우찬을 바라봤다.

“목숨까지 내놓고 찾으러 다닌 사람이니 꼭 찾았어야 할 텐데 말이다.”

“대체 제가 누구를 찾는다는 말씀이십니까?”

울먹이다 못해 억울해 분이 넘치는 목소리로 이설이 울음을 토해내듯 물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뭔가를 숨기기에만 급급한 이설에게 더는 화를 누를 여력도 들지 않았다.

순식간에 양손에 움켜잡은 이설의 어깨가 헝겊 인형처럼 힘없이 흔들렸다.

“네 발목에 그 이름! 감히 내 것에 이름을 적은 그 자를 찾으러 간 것이 아니야!”

별안간 내리치는 고함과 함께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지기라도 하는 듯한 천둥소리가 울렸다. 예고 없이 찾아온 굉음에 궁인들이 다들 놀랐는지 멀리서 비명 소리가 낮게 들렸다.

못지않게 놀랐을 이설도 반사적으로 귀를 덮어 가렸는데 혼란스러운 표정을 보아하니 우찬이 한 말은 귀에 담은 것 같았다.

이렇다 할 변명도 없이 눈을 빠르게 깜빡이자 고여 있던 눈물이 또 한 차례 아래로 떨어졌다. 전 같았으면 가엾다 마음이라도 움찔했을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기분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도리어 큰 비밀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구는 이설에게 이제는 배신감이라는 감정까지 물밀 듯이 올라와 목구멍에 닿았다.

“만났느냐? 도국에서 만났어? 빈민촌까지 갔던 이유가 그자를 만나러 간 것이지?”

“말도, 말도 안 되는……,”

“여인이었느냐 사내였느냐? 그래서 그자를 보니 황궁에는 더 이상 돌아오고 싶지 않았어? 그자가 마치 네 운명처럼 느껴졌느냐? 나와는 그리 달랐어?”

살집 하나 없이 마른 어깨를 힘주어 잡자 당황한 와중에 아프기까지 한 이설이 몸부림을 치며 빠져나오려고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사나운 태도로 성마르게 묻는 우찬에게 완전히 질려 겁을 먹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제 품에서 발버둥을 치는 이설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돌아 제대로 된 사고가 되지 않는다. 입도 뻥긋하지 않고 시선도 맞추지 않은 채 무작정 우찬에게서 멀리 떨어지려고만 애를 썼다.

“대답해! 네가 만난 자가 누구였는지!”

“아무도 읏! ……아무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우찬의 손아귀에 힘없이 흔들거리며 쥐어짜 낸 목소리로 외쳤다. 이미 처음 봤을 때부터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던 것 같던 이설은 이제 넋이 거의 다 빠져나간 모습이었지만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는 게 다분히 느껴졌다.

이성이 거의 바닥난 것은 오히려 우찬 쪽이었다.

“바로 도국으로 향한 걸 보면 그 정인이라는 자가 꽤나 이름이 알려진 놈이었을 테지. 도국의 왕족이라도 되느냐? 설마 처지가 비슷하다던 창화군은 아니겠지. 그자가 네게 이름을 주었느냐?”

“창화군이 어찌 제 정인이며, 그분이 왜 제게 이름을 주셨겠습니까? 폐하 제발 고정하시고,”

“그럼 누굴까. 감히 네 몸에 이름을 새긴 찢어 죽일 새끼가 도대체 누구일까 설아.”

잠시 팔에 힘이 풀린 찰나 이설이 어깨에 손을 털어 내고 몸을 웅크리려고 했다. 그 틈을 타 막 뒤로 감추려던 왼쪽 발목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놀란 이설이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는 힘이 여태껏 했던 모든 반항들 중 가장 격렬하고 거셌다.

적당히 받아 줄 생각도 없는 우찬은 있는 힘껏 발목을 쥐어 잡았다. 고통에 짓이긴 날카로운 비명이 치솟았다. 발버둥을 치던 반대편 발이 우찬의 복부와 옆구리를 걷어차며 상처가 완전히 벌어진 느낌이 났지만 살이 찢기는 통증에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 대답하지 않겠다면 내가 직접 확인해 보지.”

천을 겹겹으로 감은 뒤 얇은 버선을 신고 그 위에 두툼한 덧버선까지 신어 가렸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이상하다 생각하지도 않았을 차림이었지만 이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지간한 추위가 아니고서는 겉옷도 챙겨 입지 않는 이설은 쉬고 있을 때는 버선조차 신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다. 후원을 걸을 때는 일부러 버선을 벗고 맨발로 걸을 때도 있을 만큼 발이 답답한 걸 싫어했다.

환궁한 뒤로 내내 이런 식으로 발을 가리고 있었던 이설이 이제야 생각났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지난 며칠의 자신에게 분노했지만, 하루 이틀 빨리 알았더라도 이미 새긴 이름을 막을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싫습니다! 싫어요! 만지지 마십시오!”

잠시 숨을 고르던 이설은 우찬이 두꺼운 덧버선을 손쉽게 벗겨 내자 발작하듯 몸부림을 쳤다. 우찬은 가소롭다는 듯 비웃으며 아귀에 힘을 꽉 주었다. 다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떠는 이설을 보니 아마 발목이 아프다고 했던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던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름을 새긴 것이 제법 아팠던 모양이야.”

“하아…, 그런 게, 하… 아닙니다아…….”

“그러게. 처음부터 내 이름을 가졌으면 좋았잖아.”

우찬이 순식간에 말투를 바꿔 안타깝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이설이 잠자코 있다는 걸 느껴 슬쩍 시선을 움직여보자 팔꿈치로 겨우 상체를 지탱하고 누운 이설이 오만 증오의 감정을 담아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내가 원망스러우냐?”

당장이라도 이름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참아 우찬 역시 이설을 싸늘한 눈으로 노려봤다. 지금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은 차치하고서라도 당장 이설이 자신을 저런 눈빛으로 쳐다본다는 걸 믿을 수가 없고 견딜 수가 없었다.

“네가 나한테 이럴 수는 없지. 네가 날 그렇게 쳐다봐서는 안 돼.”

우찬이 분한 듯 이를 갈며 나직이 말했다.

“폐하야말로 제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울먹임이 가라앉자 그 아래 깔려 있던 먹먹한 목소리로 이설은 차분히 대꾸했다. 하지만 이미 몇 번의 비명으로 쉬어 버린 목소리로는 이제 와 담담한 척하려 해도 그저 절망에 빠진 사람의 마지막 발악처럼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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