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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70)화 (270/300)

달의 황홀경

270화

멀리 빗소리만 요란하던 대전에 쇠붙이 떨어지는 소리가 정적을 일깨웠다. 우찬이 휘둘러 옆으로 던진 검이 매끈한 대전 바닥에 흠집을 내며 떨어진 뒤 멀리까지 굴러갔다. 검이 굴러간 방향에 서 있던 대신들이 놀라 숨을 들이마시며 후다닥 피했다.

우찬이 학사에게 검을 휘두르는 줄 알고 깜짝 놀란 차란과 흑영이 대전 아래로 뛰어 내려왔다.

“폐하!”

앞을 막고 있던 늙은 학사의 몸을 옆으로 밀쳤다. 휘청거린 몸이 바닥에 엎어지며 앓는 소리를 냈지만 눈길로 주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는 사이 우찬이 바깥쪽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때마침 뛰어 내려온 흑영이 우찬보다 먼저 밖으로 나가 앞을 막아섰다.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태금궁으로 돌아가야겠다.”

“궁인들이 오고 있습니다. 잠시만,”

“필요 없다.”

“페하!”

우찬이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방향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궁인들은 전혀 다른 곳에서 튀어나온 우찬을 보고 부랴부랴 오는 중이었다. 아래까지 계단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야 하는 데다 빗길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라 대열이 엉망진창이었다.

우찬은 쳐다도 보지 않고 학사에게 그랬던 것처럼 흑영을 옆으로 밀쳤다. 학사처럼 볼품없이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길을 터 줄 정도는 충분했다.

“그냥 맞고 가실만한 빗줄기가 아닙니다!”

당황하다 못해 황당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로 차란이 뒤따라 나왔지만 차마 우찬의 팔을 직접 붙잡지는 못했다. 아주 급하다 싶을 때 몇 번 그렇게 선을 넘은 적은 있었지만 지금은 등 뒤로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느닷없이 우찬이 대전 문을 박차고 나가는 바람에 얼이 빠진 대신들이 목을 내밀고 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폐하 제발!”

이미 돌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가는 우찬의 머리 위로 장대비가 쉼 없이 쏟아졌다. 커다란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워 머리 위로 쏟아부으면 이와 같을까. 한 치 앞을 내다보기도 힘들 정도로 쏟아지는 폭우 속을 걸어가면서도 우찬은 뱃속이 뜨겁게 끓어올랐다.

이설이 평생 자신의 이름을 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이미 여러 번 했다. 아쉽기는 했지만 화가 날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런데 이설에게 다른 정인이 있다? 그 몸 어딘가에 다른 사내 혹은 여인의 이름을 가지게 됐다?

이 생각에 닿은 것도 모자라 그럴만한 정황들이 머릿속에 엉켜 들어오자 불꽃처럼 달아오른 감정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태금궁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학사와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누셨기에 갑자기……, 폐하! 제발 고정하시고 걸음이라도,”

지나가던 궁인이 입고 있던 녹사의를 뺏어 가져온 흑영이 급한 대로 우찬의 머리 위를 막았지만 몸 전체를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차피 대여섯 걸음 만에 홀딱 젖은 몰골을 수습하기는 늦었다.

차란이 허겁지겁 달려와 옆에 붙어서는 온갖 회유를 시도했지만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고 귀 기울이지도 않았다.

초겨울에 내리는 빗방울은 우장절에 내리는 것과는 달리 얼음장처럼 차가워 체온이 식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뱃속부터 퍼지는 뜨거운 열기를 뱉는 숨만은 뜨거웠다.

“소의 마마 때문에 그러십니까?”

우찬의 걸음을 맞추느라 숨을 헐떡이는 차란이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하며 물었다. 빗소리에 자기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쯤 멀리 떨어져 있던 궁인들 대부분이 우찬의 뒤까지 따라붙었는데 누구 하나 성한 꼴을 한 이가 없었다.

“학사가 무슨 안 좋은 얘기라도 전한 것입니까?”

비를 맞으며 우찬을 쫓아가기도 바쁜데 궁금한 것투성이인 차란이 쉴 새 없이 말을 붙여 왔지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더 이상 직접적으로 비를 맞지는 않아도 비를 막아주는 궁인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걷고 있어 옷이며 신이 흠뻑 젖었다.

어떻게 할까.

만약 이설에게 진짜 다른 사람의 이름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게까지 꽁꽁 감추는 것으로 보아 이름이 있다면 발목이다. 이참에 아예 잘라 버릴까? 살을 도려내는 것보다는 그편이 더 나을 것 같은데.

……그런데 내가 이설에게 그런 끔찍한 짓을 할 수 있을까.

물에 흠뻑 젖은 몰골로 대문 문턱을 넘는 우찬을 보고 처마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던 궁인들이 대번에 놀라 달려왔다.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궁인들을 지나 본궁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이설을 돌보는 상궁이 내민 마른 천으로 대충 얼굴의 물기를 닦아낸 뒤 물었다.

“연이설은.”

“아침상을 치우러 들어갔을 때 서책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 후에는 확인해 보지 않았느냐?”

“예. 소인이 드나들면 서책에 집중하기가 어렵다고 하셔서…….”

상궁이 다소곳한 말투로 뒷말을 흘려 대답했다. 우찬이 다른 궁녀에게 받은 마른 천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잠시 터는 사이 상궁은 이제 막 따라 들어온 윤 내관과 눈이 마주쳤다. 못지않게 흠뻑 젖은 윤 내관은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꽉 다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러다 정말 고뿔에 걸리십니다. 마마께서도 놀라실 거고요. 일단 더운물에 몸부터 녹인 뒤 의복이라도 갈아입으시고 찾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폐하!”

“여기서부터는 아무도 따라오지 말거라.”

차란은 금세 젖은 천을 바닥에 던지며 복도 안쪽으로 들어가는 우찬의 뒷모습만 허망하게 바라봤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느냐며 한숨을 푹푹 내쉬는 윤 내관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침소 앞을 지키던 호위군 두 명이 우찬을 보고 깜짝 놀라 궁인을 부르려다가 우찬의 고갯짓에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옆으로 까딱 움직이자 찰나에 고민을 하나 싶더니 곧 소리도 내지 않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유독 시끄럽게 들리는 빗소리만 남았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기분을 눌러 감추는 노력도 허사였다. 텅 빈 복도에서 잠시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했지만 결국 바닥 난 인내심이 기척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폐하?”

활짝 열린 중간 문들을 지나 정면으로 이설과 눈이 마주쳤다. 화롯불 앞에 의자를 두고 앉은 이설은 숯을 고르고 있었는지 손에 인두를 들고 있었다. 별안간 문이 벌컥 열린 것도 놀랄 일인데 그 건너편에 홀딱 젖은 우찬이 맹렬한 기세로 걸어 들어오는 건 더욱이 상상도 못 한 일인 듯했다.

“갑자기 무슨 일, ……아니, 왜 이런 모습으로, 그런데 왜…….”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어린아이처럼 유독 겁을 먹은 기색을 보이는 이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순간 몸이 오른쪽으로 휘청 기울어졌다. 자세히 보니 왼쪽 발이 바닥을 제대로 지탱하고 서 있지 못했다.

윤 내관의 말대로 이설은 왼발을 절었고 매번 태의가 들여다보고 있다던 오른발은 겉으로 봐서는 멀쩡하기 그지없었다. 우찬이 아랫입술을 짓이겨 씹었다.

“뭘 하고 있었느냐?”

이설의 발치에 눈을 고정하고 우찬이 물었다.

“그냥……, 그냥 있었습니다.”

이설은 손에 든 인두와 우찬을 두어 번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인두를 화로 속으로 툭 던져 넣었다. 놀란 마음은 금세 진정 되었는지 이내 깊은 절망이 흐릿한 눈동자 위에 내려앉았다.

그다지 오랜만에 보는 것도 아닌 이설은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여전히 하얗고, 마른 몸에 처연하다 못해 바스러질 것 같은 분위기까지. 저 작태를 하고 다른 사람을 정인으로 받아들이는 이설을 상상하니 배 속에 내장이 다 뒤틀려 갈리는 기분이다.

감히 내 것을, 도대체 누가.

다시 짓이겨 씹은 아랫입술이 찢어져 피가 터졌다. 침착하려고 애쓰는 우찬이 조용히 말했다.

“역시 내 안부는 절대 묻지 않아.”

가볍게 조소하며 가까이 다가가자 이설이 다급히 한 발 물러섰다. 확실히 왼발을 절었다.

“발이 불편해 보이는데.”

“괜, 찮습니다.”

짧은 대답에도 숨이 턱 막히는지 이설이 숨을 짧게 끊었다. 우찬이 발치를 유심히 본다는 걸 알자 왼발을 슬그머니 뒤쪽으로 감췄다.

“태의를 불러 줄까.”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구나. 태의 말로는 네가 다친 발은 오른쪽이라 하던데.”

부자연스럽게 딱딱해지는 입매를 보니 확실했다. 여태 거짓말을 하고 있었구나.

태의가 뭔가 착각한 것일 거라고 충분히 둘러댈 수 있는 말도 하지 않고 이설은 침묵했다. 오른쪽 뺨이 홀쭉해지는 걸로 봐서 입안 쪽 살을 또 꽉 깨물어 나름대로 표정을 참고 있을 테다.

폭우가 쏟아지는 소리가 유달리 큰가 싶더라니 창문이라는 창문은 죄다 열어 놨다. 평생 한 번도 열린 것을 본 적 없던 장식용 창문까지 전부.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덜덜 떨리는 게 그제야 이해가 갔다.

“비를 많이 맞으신 것 같은데 궁인을 불러 드리겠습니다.”

한참 침묵을 지킨 뒤에 꺼내는 말이 고작 이랬다. 실소조차 나오지 않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며 이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설은 태연한 척 서 있었지만 갑자기 찾아온 우찬이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빤히 보였다.

대체 뭘 하고 있었길래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거지.

바닥난 인내심으로는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내가 찾아온 것을 별로 내켜 하지 않으니 용건만 말하겠다. 마지막으로 묻는 것이니 잘 대답하거라. 도국으로 도망친 이유가 뭐지?”

“…….”

“말해.”

“분명 말씀드리지 않겠다고,”

“누군가를 찾고 있었느냐?”

그 순간 어색하게 흔들리는 동공이 미묘했다. 정곡을 찔러 당황한 건지 아니면 뜬금없는 얘기를 듣고 멍해진 건지 모르겠다. 아니면 이설의 거짓말이 꽤나 많이 늘었던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설은 떨리는 목소리로 딱 잡아떼고는 고개를 돌렸다. 처음에 놀라 눈이 마주친 뒤로는 어떻게 해서든 시선을 피하려고 하는 노력이 노골적이었다.

이제 와서 이설이 솔직해질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럼 확인을 해 보면 알겠지.”

이설이 다시 고개를 바로 하는 짧은 시간 우찬이 거리를 좁혀 가까이 왔다. 이설이 뒤로 물러나기도 전에 허리를 안아 들어 어깨에 들춰 멨다. 아등바등하는 다리가 인정사정없이 우찬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내, 내려 주십시오! 폐하!”

목소리조차 기운이 없어 쇳소리로 가냘프게 소리 지르는 이설에게 더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침상에 잘 펼쳐진 포단 위에 몸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후다닥 뒤로 물러나려기에 오른쪽 발목을 잡았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발목이 너무 쉽게 한 손에 잡혔다.

“이쪽이 아닐 텐데.”

반대쪽의 왼발을 내려다보며 읊조리는 우찬을 보고 이설이 경악하며 자리에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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