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황홀경 (269)화 (269/300)

달의 황홀경

269화

듣다 못한 차란이 나서서 학사를 말리기 위해 앞으로 나오려고 했지만 우찬이 손으로 막아 세웠다.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것인지 학자로서 기개가 꼿꼿한 것인지 학사는 흔들림 없이 우찬을 응시했다. 딱딱하게 굳어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 턱을 보니 아주 겁을 상실한 건 아닌 것 같았지만 물러서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한쪽만 이름을 가진 경우라도 보통 반년에서 일 년 이내에 다른 한 사람도 이름이 발현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애초에 인연이 아니었던 겁니다.”

학사가 숨도 쉬지 않고 재빨리 대답했다. 뒤로 빗겨선 차란이 반박하고 싶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숨 막히는 적막에 휩싸인 대전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처럼 긴장감이 타올랐다. 이민족의 서약서를 찢고 무력 충돌을 선포하던 날보다도 분위기가 침체됐다.

무겁게 침묵을 지키던 우찬이 살짝 뒤로 젖혔던 고개를 바르게 했다.

“그러니까 학사 그대의 말은 나와 연이설이 인연이 아니다, 이 말이로군.”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맞다면 폐하께서도 준비가 필요하실 테니까요.”

“준비?”

우습다는 듯 되묻는 말에 학사는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가 대답했다.

“정인이 아닌 게 확실해진 마마께서 궁이 더 계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진짜 정인도 찾으셔야 할 테고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차란은 이제 이를 갈기보다는 우찬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좌우로 시선만 움직이는 대신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슬금슬금 학사의 곁에서 멀어졌다.

학사가 기개가 곧아 진언한 것일 수도 있다. 우찬은 화를 내는 대신 팔걸이 양각에 움푹 팬 곳을 손가락 끝으로 세게 긁었다. 깃털 모양의 양각에 촘촘히 장식된 금 조각이 바닥에 투두둑 떨어졌다.

“그대의 말이 내게는 연이설을 꼭 쫓아내야 한다는 것처럼 들려.”

가라앉은 목소리는 초연했지만, 평소와 확연히 다른 분위기는 대전에 모인 그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었다. 오직 학사만이 무지했다.

“마마께서 정말 폐하의 인연이 아니시라는 가정하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지금이라도 폐하의 정인을 다시 찾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학사도 이제야 우찬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챘는지 아이 달래듯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분위기의 심각성은 딱히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보탰다.

“혹 마마께서도 안타깝게 닿지 못한 인연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마마께도 천명이 있으시다면 폐하와 가깝게 지내는 동안에는 그 이름을……, 폐, 폐하?”

느닷없이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난 우찬이 옆에 서 있던 호위군의 검을 뽑은 뒤 순식간에 단상의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젖은 장포를 휘날리며 성큼성큼 가까워지는 우찬을 뒤늦게 발견한 학사가 뒷걸음질 쳤지만 곧 목 가까이 닿는 서늘한 검날을 느끼고 자리에 굳었다.

“폐, ……폐하 갑자기 이 무슨,”

“계속 말해 봐.”

하고 있는 행동으로만 봐서는 한마디만 더 했다간 당장에 몸과 머리를 분리해 버리겠다는 것 같은데 우찬은 여상한 목소리로 학사를 재촉했다.

“나와 가깝게 지내는 동안에는, 다음에 뭐라고 했지?”

입술이 파리해진 학사가 입을 뻥긋거리다 겨우 진정이 됐는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설령 운명을 함께 하는 이가 따로 있다 해도 폐하와 가까이 지내시는 동안에는 이름이 발현되지 않았을 겁니다. 기운이 강한 사람과 있다 보면 종종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상성이 맞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동침을 하거나 감정을 나누다 보니 다른 한 사람이 피워야 할 꽃이 제때 피지 못하는 것이지요.”

기개가 너무 올곧아서 앞뒤 분간을 못 하니 분위기를 제때 읽지 못한 것이었나.

학사는 목에 닿은 검날을 힐끗거리며 겁먹은 티를 다 내면서도 결국 하고 싶은 말을 전부 했다. 짓고 있는 표정이, 도대체 왜 자신이 황제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곧 죽어도 ‘꼭 마마께서 그러시다는 건 아닙니다’ 따위의 말은 하지 않는 학사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우찬은 칼자루를 힘주어 잡았다. 하도 세게 힘을 주는 바람에 손이 떨리자 덩달아 진동하는 칼날에 학사의 목에 붉은 실처럼 상흔이 생겼다.

차란의 말대로 학사의 말을 귀담아들어서는 안 됐다. 두어 달 전쯤 들었다면 헛소리라 치부하고 넘어갔을 얘기에 마음이 세차게 요동치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만약 연이설에게 내가 아닌 다른 인연이 있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학사와의 거리를 바짝 좁혀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우찬이 검을 뽑아 들고 단상을 내려온 순간 이미 주위 대신들이 기겁을 하며 두 사람에게서 멀리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대화 소리를 들을 사람은 어차피 아무도 없었다.

“평생 내 곁에 있는 동안에는 내 것이 아닌 다른 이름은 절대 가질 수 없는 건가?”

“단순히 곁에 두시는 것이 아니라 마마께서 후궁의 소임을 다하심으로써…….”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잠자리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른 이름이 발현되는 것은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마의 천명을 완전히 끊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마마께 폐하가 아닌 다른 인연이 있다는 가정하에 말입니다.”

학사도 슬슬 상황 파악이 되고 목숨이 아깝기 시작했는지 이설에게 다른 인연이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것입니다, 폐하. 부디 오해 말고 들어 주시옵소서.”

“들어 본 뒤 판단하지.”

학사가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얕은 호흡으로 길게 뱉었다. 죽음을 앞에 둔 사람처럼 비장한 얼굴이었다.

“마마께서 환궁하신 뒤 존체를 살펴보셨습니까? 손목이나 발목, 귀 아래와 목덜미같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곳 말입니다.”

“그랬어야 했나?”

“만약 마마께서 폐하가 아닌 다른 사람과 연을 맺으셨다 해도 궁에 계시는 동안에는 이름을 가지실 수 없었을 겁니다. 폐하 곁에선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헌데 두 분께서는 근래 꽤 긴 시간을 떨어져 지내셨지요.”

우찬은 순간 학사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직감하고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덜그덕 거리는 소리에 놀란 학사가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발현되어야 할 이름이 있었다면 그때가 적기였을 겁니다.”

“…….”

“그때를 무사히 지나셨다면 마마께 다른 인연은 없는 것으로 보셔도 좋습니다. 드물게 더 나이가 들어 발현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학사는 주변 눈치를 살피며 말을 아꼈다. 어차피 들어 봐야 상관없는 말이었다. 이설이 자신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제 기운에 눌려 자기 인연을 찾지 못한다니, 바꿔 말하면 평생 찾지 못할 거란 뜻이었다.

“손목은 확실히 아니야.”

우찬이 검을 거두며 조소했다. 학사는 이제야 안도하며 마른 가슴을 쓸어내리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입바람에 우찬의 검은 머리카락이 뒤로 사르르 날렸다.

이설에게 다른 인연이 있을 리 없다. 연이설은 금우찬의 것이다.

고집스러운 집착으로 우기는 헛소리가 아니다. 언제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운 어느 시점부터 우찬은 자연스레 느끼고 있었다. 마치 태초부터 그렇게 정해진 것을 잠시 잊었다가 다시 기억해 낸 것처럼 알게 됐다. 이설은 내 인연이고, 정인이며 반려라고.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찬이 알고 있다는 것, 그게 중요했다.

“목 뒤나 귀 아래는 흔치 않습니다. 보통은 손목이나 발목이지요.”

겨우 목숨을 구제받은 학사가 조금 전보다는 덜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환궁하신 뒤 몹시 앓으셨거나 자주 아프신 곳은 없으십니까?”

학사가 다소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던 우찬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찰나에 뒤바뀌는 표정을 직감한 학사가 입을 꽉 다문 뒤 반걸음 물러섰다.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있던 대신들은 학사가 다시 겁먹은 표정을 짓자 덩달아 긴장했다.

“아픈 경우도 있나?”

“사람마다 증상이 많이 다르긴 합니다만 보통은 아프거나 간지러운 자극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래. 이름이 처음 발현되면 이런 자극을 느끼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우찬의 경우처럼 하루아침에 이름을 갖게 되는 것도, 아무런 전조 증상이 없었던 게 도리어 더 드문 일이라며 태의가 신기하게 여겼다.

“걷지 못할 정도로 통증이 심한 경우도 있느냐?”

“거의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개인차가 있으니 그런 경우는 절대 없다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학사 딴에는 여러 가지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거겠지만 얘기를 듣는 입장에서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우찬은 어금니를 꽉 다물어 턱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갑자기 전신의 피가 바싹 말라 빈껍데기만 남은 싸늘한 기분이 들었다. 여태껏 이상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어떤 사실들이 찢어진 종잇조각을 짜 맞추듯 이어지며 기분 나쁜 예감으로 덮쳤다.

습격 후 황궁으로 돌아오기 위해 양화성까지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던 이설이 돌연 마음을 바꿔 자신을 피해 달아난 이유가 뭘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곧 돌아가겠다는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은 생각해 볼 가치도 없었다.

그렇게 도망간 곳은 그래 봐야 도국의 허름한 빈민촌이었다. 머물기는 어느 비단 장수 집에 머물었던 것 같지만 목적지는 그 빈민촌이 맞았을 것이다. 대체 목숨까지 내놓고 그곳은 왜 갔던 건지 여태껏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한 가지 확신했었던 것은 이설이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찾고 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것 말고는 연고도 없는 타국 그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환궁한 이후 이설은 대부분 누워 있었다. 따져 보자면 발이나 다리를 다쳤기 때문이지만 정말 다친 게 맞는지 확인해 본 적은 없다. 유독 발을 만지는 것을 싫어했다. 늘상 포단 아래에 감춘 발이었는데도 손으로 잡을라치면 기겁을 하고 뿌리쳤다.

그때는 아파서 그러거나 단순히 제 손이 닿는 것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거라면?

1